예지 스콜리모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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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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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를린 영화제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황금곰상
제16회
(1966년)


제17회
(1967년)


제18회
(1968년)

로만 폴란스키
(막다른 골목)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출발)


얀 트로엘
(누가 그의 죽음을 보았는가)


역대 칸 영화제
파일:칸 영화제 로고.svg
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
제30회
(1977년)


제31회
(1978년)


제32회
(1979년)

수상자 없음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 마르코 페레리
(외침) / (시아오 마스키오)

안드레이 콘찰롭스키
(시베리에이드)
각본상
제34회
(1981년)


제35회
(1982년)


제36회
(1983년)

이스트반 자보
(메피스토)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달빛 아래서)


수상자 없음
심사위원상
제74회
(2021년)


제75회
(2022년)


제76회
(2023년)

나다브 라피드 /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아헤드의 무릎 / 메모리아)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 펠릭스 반 그뢰닝엔, 샤를로트 반더히르미
(당나귀 EO) / (여덟 개의 산)

아키 카우리스마키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역대 베네치아 영화제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특별 심사위원상
제66회
(2009년)


제67회
(2010년)


제68회
(2011년)

파티 아킨
(소울 키친)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이센셜 킬링)


에마누엘 크리알리스
(테라페르마)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Jerzy Skolimowski


출생
1938년 5월 5일 (85세)
폴란드 제2공화국 우치키에 주 우치
국적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직업
영화 감독, 극작가, 각본가, 배우, 시인, 화가
학력
바르샤바 대학교 (민족학, 문학, 사학)
우치 국립 영화 학교 (연출 전공)

1. 개요
2. 생애 및 작품 활동
3. 필모그래피
4. 기타



1. 개요[편집]


폴란드영화 감독, 극작가, 각본가, 배우, 시인, 화가.

정치적인 불만족과 욕망, 망명자로서의 불안 등의 주제를 초현실적인 이미지, 그리고 조각난 숏과 편집을 통해 난해하게 투영한 영화 세계가 특징인 영화 감독으로 평가 받으며, 철의 장막시절 폴란드 영화사에서 안제이 바이다 이후 로만 폴란스키[1]와 함께 '폴란드 학파' 세대를 대표하던 [2] 폴란드의 영화 감독이다.


2. 생애 및 작품 활동[편집]


1938년 폴란드 우치에서 태어나 [3] 1959년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민족학, 문학, 사학을 전공한 이후 단편소설을 쓰며 두 권의 시집을 낸 작가가 되었고, 재즈 음악가와 권투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엔 상당한 말썽쟁이였다고 한다.

1960년에 안제이 바이다 감독을 만난 뒤 그의 영화 <순진한 마법사>의 각본을 쓰고 조연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때 그의 격려로 우치 국립 영화 학교에 입학했으며, 평생지기 친구 로만 폴란스키를 만나게 된다.

1962년에는 친구 로만 폴란스키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물속의 칼>각본을 공동으로 집필했으며, 해당 작품이 호평을 들으며 스콜리모프스키도 덩달아 이름을 알리게 된다. [4]

이후 1964년에 우치 영화학교에서 실습용으로 찍고 남았던 필름 조각을 모아 제각각 장면들을 촬영한 장면들을 이어붙여 만든 <신원미상>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해당 작품이 1960년대 공산주의 치하의 폴란드를 살아가는 한 똑똑한 청년의 단절감과 소외감을 묘사하고 있었기에, 폴란드 정부에서는 해당 작품을 좋게 보지 않아 <물속의 칼>의 각본을 썼다는 점과 더불어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폴란드 정부의 눈밖에 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에는 30살의 노쇠한 권투선수가 늙어가는 육체에 느끼는 강박감을 다룬 두번째 영화 <부전승>을 연출했는데, 주인공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정교한 롱테이크로 찍어 77분이라는 분량 동안 영화 전체의 샷 개수가 35개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1966년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선정한 그해 베스트 10편 중 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6년작 <장벽>은 장뤽 고다르미치광이 피에로의 시각적 표현법에 영감을 받아 찍었다는 작품으로,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과 기괴한 사건의 병렬로 초현실적인 느낌을 선사하는 등 지나친 형식미를 추구한 탓에 평단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5], 흥행에서는 크게 실패했다.

1967년, <장벽>의 흥행 실패로 인해 차기작 <출발>은 벨기에에서 촬영하고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배우인 장피에르 레오를 출연시키는 등 처음으로 폴란드를 떠나 서유럽 측의 자본으로 제작했으며, 그해 196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나 마찬가지로 흥행은 실패하고 만다. 때문에 같은 해에 제작한 <손들어!>는 다시 폴란드로 돌아와 촬영했으나, 작품속에 담긴 반스탈린주의적 메시지 때문에 상영을 금지당하고 만다.[6]

이에 낙담한 스콜리모프스키는 결국 고국 폴란드를 떠나 망명자로서 해외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친구인 폴란스키와 달리 서유럽 측의 영화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게 제작비를 조달하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가야 했다.

<출발>의 비평적 성공으로 인해 서유럽 측의 초대를 받아 영국으로 망명한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1970년에 영국과 스위스 공동 제작으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 <제라드의 모험>을 만들었지만, 불행히도 이 영화는 감독의 재능도 발휘되지 못했고, 흥행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같은 해에 제작한 <딥 엔드>는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7],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의 호평 이후 배급상의 문제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하지 못한채 컬트작으로만 남고 말았다. 한동안 유실 영화로 꼽힐 정도였는데 2011년 새로 복원되면서 그나마 보기 쉬워졌을 정도.

1972년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킹, 퀸 그리고 잭> (1928)을 각색한 <왕, 여왕, 불량배>를 제작했으나, 역시나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스콜리모프스키는 한동안 제작비를 투자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8]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78년작 <외침>이 쳐다보지 마라, 위커맨 등과 함께 1970년대 영국식 기괴한 공포 영화로 주목받고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타면서였는데, 이때의 비평적 주목을 탄력으로 삼아 제러미 아이언스를 주연으로 만든 차기작 <달빛 아래서>가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하면서 스콜리모프스키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달빛 아래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84년작 <성공은 최고의 복수>[9]과 1985년작 <등대선>[10]은 일반적인 배급 루트를 구하지 못해 일부에서만 상영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 후에도 <백야>에 출연하는 등 배우 활동과 감독 활동을 겸하며 이반 투르게네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봄의 급류> (1989),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를 원작으로 한 <30 도어 키>[11] (1991)를 감독했지만 호평에도 불구하고 역시 반향을 얻지 못한다.

결국 계속되는 침체로 인해 스콜리모프스키는 한동안 감독생활을 접고 2000년대 말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업 화가로 전향해 활동을 하며 지낸다. [12]

그러던 도중 로스앤젤레스에서 폴란드로 귀국해 2008년 <안나와의 나흘밤>을 찍으며 17년만의 신작을 내서 주목을 받았고, 이어 찍은 2010년작 <이센셜 킬링>은 당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고 감독의 오랜 지지자였던 카예 뒤 시네마에서도 <달빛 아래서> 이후 29년만에 그해 베스트 10으로 선정하는 등 감독의 성공적인 귀환을 알렸다.

2015년에는 계속해서 폴란드에서 촬영한 '11분'이라는 영화를 내놓아 제7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2022년, '당나귀 EO'를 통해 자그마치 33년만에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13] 참고로 초청 감독 중 최고령자다. 그리고 당나귀 EO는 국내에서 최초로 극장에 정식 개봉하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작품이 되었다.


3. 필모그래피[편집]


연도
제목
연출
각본
출연
비고
1960
순진한 마법사
Niewinni czarodzieje

O
O
안제이 바이다 감독작
1962
물속의 칼
Nóz w wodzie

O

로만 폴란스키 감독작, 공동 각본
1964
신원미상
Rysopis
O
O
O
장편 연출 데뷔작
1965
부전승
Walkower
O
O
O

1966
장벽
Bariera
O
O


1967
출발
Le départ
O
O

제1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
1970
제라드의 모험
The Adventures of Gerard
O
O


1970
딥 엔드
Deep End
O
O
O

1972
왕, 여왕, 불량배
King, Queen, Knave
O

O
제2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78
외침
The Shout
O
O

제31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 수상작
1981[14]
손들어!
Rece do góry
O
O
O

1982
달빛 아래서[15]
moonlighting
O
O
O
제35회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1984
성공은 최고의 복수
Success Is the Best Revenge
O
O

제37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85
등대선
The Lightship
O
O

제4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85
백야
white nights


O

1986
심취
Mesmerized

O


1987
빅 샷
Big Shots


O

1989
봄의 급류
Torrents of Spring
O
O
O
제4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91
30 도어 키
30 Door Key
O
O
O
제4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1996
화성침공
Mars Attacks!


O

2000
비포 나잇 폴스
Before Night Falls


O

2007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


O

2008
안나와의 나흘밤
Cztery noce z Anna
O
O


2010
이센셜 킬링[16]
Essential Killing
O
O

제6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특별 심사위원상 수상작
2012
어벤져스
Marvel's The Avengers


O

2012
비엔나전투 1683
11 settembre 1683


O

2015
11분
11 minut
O
O

제7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2022
당나귀 EO
EO
O
O

제75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 첫 국내 극장 공식 개봉작.


4. 기타[편집]


  • 상술했듯 힘들게 제작비를 조달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던데다가, 배급망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했고, 감독작들도 그리 유명한 편이 아니다.[17] 이런 점에서는 당나귀 EO의 모티브가 된 당나귀 발타자르를 만든 로베르 브레송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로베르 브레송도 은퇴작이었던 돈(1983)를 MK2 설립자인 마린 카미츠와 프랑스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서야 겨우 만들 수 있었다. 그 바람에 '달빛 아래서 감독'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어벤져스에서 초반에 블랙 위도우한테 두들겨맞은 러시아 악당 할아버지'로 설명하는 게 빠를 거라는 슬픈 농담도 있다. 국내에서 당나귀 EO가 개봉하는 2023년 10월 3일 이후에는 이 농담도 조금씩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 그리고 크지 않은 인지도 탓에 작품들의 복원이나 회고전 [18], 혹은 DVD/블루레이 출시도 요원했던 편이어서, 감독 본인도 2011년 영국판 <딥 엔드> 블루레이 발매를 알리는 이용철(평론가)가 쓴 씨네21 기사에서 "내 영화를 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푸대접만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은 실망한 듯이 "자신이 만들었던 작품을 단 한 작품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터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용철(평론가)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일부 작품을 미리 봤기 때문에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매우 예리한 질문[19]에 답한 끝에 인터뷰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20] # 실제로 친구인 안제이 바이다로만 폴란스키는 물론이고 같은 폴란드 출신 영화 감독들인 안드레이 줄랍스키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에 비교해봐도 관심도가 적은 편. 해외에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펴낸 스콜리모프스키 총서에서도 참조할 최근 비평을 찾는게 힘들어 196-70년대 자료를 찾아야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 젊었을 적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한 전적 때문인지 영화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으로도 유명했는데, 전술했듯 그 한스 짐머를 처음으로 영화 음악가로 발탁해서 자신의 80년대 영화 음악을 담당하게 하는 등 탁월한 안목을 자랑했다. 이외 뮤지션들하고 친했는데, 캣 스티븐스와 친교가 있어서 그에게 '딥 엔드'에 실릴 곡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게 바로 Tea For The Tillerman에 실린 'But I Might Die Tonight'. 의외로 업계에서 발이 넓은 사람이라서 잭 니콜슨, 마르그리트 뒤라스랑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 데뷔 전 사라고사 매뉴스크립트 및 폴란드 시절 초기작에 출연한 배우 엘주비에타 치제프스카(Elżbieta Czyżewska)와 결혼했으나 부전승 찍을 당시 이혼했다. 이후 배우 요안나 슈체르비츠(Joanna Szczerbic) [21]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다. 두 아들 모두 시나리오 작업 등 아버지의 영화 작업에 참여했으나, 차남 유제프는 2012년 인도에 체류하는 도중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2014년 아내 슈체르비츠와 사별한 이후, 스콜리모프스키와 수년간 함께 일해온 (편집,각본,제작) 1973년생 에바 피아스코프스카(Ewa Piaskowska)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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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사람 모두 절친 사이이기도 하다.[2] 정확히는 2세대에 속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1세대 말기~2세대 초기에 두각을 보여 데뷔했다.[3] 전쟁 때문에 저항군이었던 아버지가 처형되고 어머니는 유대인들을 숨겨주는 등 상당한 고생을 했다. 전후 어머니가 주 체코 폴란드 대사관에서 일해 체코에서 살았는데 이때 바츨라프 하벨이나 밀로스 포먼 같은 체코 뉴웨이브 인사들이랑 알고 지냈다고.[4] 등장인물들이 한 공간에 고립된 채 감정적인 분투를 벌인다는 면에서는 폴란스키 감독의 테이스트가 느껴지지만,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반목'이라는 플롯의 줄기는 스콜리모프키 감독의 테이스트가 느껴진다는 평을 받는다.[5] 전작 부전승에 이어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는 1968년 베스트 10편중 7위로 선정하는 등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을 지지해주었다.[6] 결국 이 작품은 14년뒤인 1981년이 되어서야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재편집을 한 후 1981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7] 데이비드 린치가 훌륭한 컬러 영화라 칭찬했을 정도다.[8] 영미권에서 제작한 작품 중 한편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없었기에, 이 시절 제작자들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첫마디로 “저는 스콜리모프스키라고 하는데 혹시 제 이름을 들어보셨나요?”라고 물어보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9] 여담으로 한스 짐머의 영화 음악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데, <달빛 아래서>에서 한스 짐머가 일렉트로닉 음악 일부를 담당하던 인연으로 그를 발탁했다.[10] 그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특별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11] 고국 폴란드의 소설임에도 영국에서 제작하느라 영어 영화가 되었는데,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점 때문에 매우 싫어하는 영화라고 한다.[12] 감독 활동을 쉬는 와중에도 제작비를 벌기 위함인지 팀 버튼 감독의 화성침공,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스턴 프라미스 등 배우로 출연한 작품들은 알음알음 있다.[13] 2008년 <안나와의 나흘밤>으로 17년만에 복귀했을 당시 제61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받긴 했으나, 그 이후로 낸 두 작품은 모두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했었다.[14] 제작은 1967년에 했으나, 폴란드 당국의 상영금지로 인해 1981년이 되어서야 재편집 한 후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15] 원제를 음독한 '문라이팅', 혹은 '야근'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16] '특급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17] 심지어 국내의 경우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 감독작이 단 한 편도 없었다. 홈 비디오로는 등대선이 VHS로, 달빛 아래서가 DVD로 나온 적이 있다. 당나귀 EO가 국내에서 2023년 10월 3일 정식 개봉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일본은 그나마 사정이 낫긴 한데 딥 엔드가 조춘早春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해 예전부터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었고 복귀 후 회고전을 가지고 꾸준히 정식 개봉해 DVD가 나오기도 했다.[18] 그나마 회고전은 간간히 하는 편인데, 가장 최근에는 2021년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전작 회고전을 가졌다. 한국에서는 2009년 하술한 회고전이 처음 열렸고, 2023년 당나귀 EO 개봉 전 10편 정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회고전이 열렸다.[19] 예를 들어서 해당 영화를 어떤 경로로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 등이었다고 한다.[20] 상당히 자존심 강한 성격인지, 인터뷰 하러 온 기자들에게 어떻게 봤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제대로 대답 못하면 면박까지 줬다고 한다. 심지어 달빛 아래서는 성공을 거뒀음에도 이용철이 기획해서 한국에서 발매된 DVD가 최초 DVD였다고. 2023년 기준으로는 그래도 많이 보기 쉬운 축에 내려온 편이다. 당나귀 EO가 성공을 거두자 기존작들이 MUBI나 크라이테리온 채널에서 스트리밍하고 블루레이 발매가 잡힐 정도. 다만 197-80년대 영어 영화는 여전히 보기 힘든 게 많다.[21] 폴란드 현지에서는 섹스 심벌 이미지를 내세워 유망주로 꼽혔던 배우였다. 예지가 엘주비에타랑 사귀기 전에도 어느 정도 썸이 있었으나 당시에 거부했고, 이후 이혼을 거친 후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활동을 줄이더니 폴란드를 떠난 후로는 배우 활동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다. 성공은 최고의 복수에서 아들들과 함께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