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몬트 리페-바이센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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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gmont Prinz zur Lippe-Weißenfeld.jpg
에크몬트 프린츠 추 리페-바이센펠트(Egmont Prinz zur Lippe-Weißenfeld : 1918년 7월 14일~1944년 3월 22일)

1. 서훈
2. 국방군 보고
3.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다
4. 글라이더 애호가
5. 입대
6. 개전 초기
7. 항공단 사령관이 되다
8. 추락 사고



1. 서훈[편집]


전상장 흑장
공군 전선비행장 금장
철십자 훈장 2급 / 1급
독일 금십자훈장 (1942. 1. 25)
기사 철십자훈장 (1942. 4. 16)
곡엽 기사철십자훈장 제263호(1943. 4. 2)
국방군 보고 4회


2. 국방군 보고[편집]


다음 소개하는 야간전투기 승무원들은 본토 방어전에서 놀라운 무공을 세웠다. 우선 길드너 상사, 포펠마이어 하사와 슐라인 상병, 프린츠 추 리페 중위, 레네트 하사와 젬라우 소위, 페터 하사, 그리고 베르헨스 하사이다. - 1941년 6월 19일 화
Bei der Abwehr feindlicher Luftangriffe auf das Reichsgebiet zeichneten sich folgende Besatzungen von Nachtjagdflugzeugen in hohem Maße aus: Erstens Oberfeldwebel Gildner, Unteroffizier Poppelmeyer und Unteroffizier Schlein, zweitens Oberleutnant Prinz zu Lippe, Unteroffizier Renette und drittens Oberleutnant Semrau, Unteroffizier Peter und Unteroffizier Behrens.

27일 밤에 제국 영공에서 영국 폭격기의 공습을 격퇴하는 임무에서 헬무트 렌트 대위와 프린츠 추 리페-바이센펠트 중위는 100대째 야간 격추를 달성했다. - 1942년 1월 28일 화
Bei der Abwehr eines Angriffs britischer Bomber auf das Reichsgebiet in der Nacht vom 27. Januar erzielte eine Nachjagdstaffel unter Führung von Hauptmann Lent und Oberleutnant Prinz zu Lippe-Weißenfeld ihren 100. Abschuß.

길드너 상사는 26일부터 28일까지, 그리고 리페-바이센펠트 중위는 18일과 21일 밤에 폭격기를 성공적으로 사냥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 1942년 3월 27일 금
Oberfeldwebel Gildner errang seinen 26. bis 28. und Oberleutnant zu Lippe-Weißenfeld seinen 18. bis 21. Nachtjagdsieg.

리페-바이센펠트 중위는 어젯밤의 공중전에서 3번의 승리를 달성했고, 렌트 대위는 자신의 35번째 사냥감을 격추시켰다. - 1942년 6월 21일 일
Oberleutnant zur Lippe Lippe-Weißenfeld errang in der letzten Nacht drei Luftsiege, Hauptmann Lent erzielte seinen 35. Nachtjagdabschuß.


3.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다[편집]


긴 이름만으로도 귀족 출신임이 단박에 드러나는 에크몬트 프린츠 추 리페-바이센펠트는 1918년 7월 14일에 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네덜란드에 영지를 가진 전통깊은 귀족인 리페가(Haus Lippe) 출신이었던 아버지 프린츠 알프레트 추 리페-바이센펠트(Prinz Alfred zur Lippe-Weißenfeld)와 괴스 백작부인(Countess Goëß)인 안나 바이센펠트(Anna Weißenfeld) 사이에서는 4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장남인 에크몬트를 제외하면 코롤라(Carola), 소피(Sophie), 도라(Dora) 모두 여동생이었다.


4. 글라이더 애호가[편집]


이들 가족은 알트바르텐부르크(Altwartenburg)라고 불리는 16세기에 지어진 오래된 에서 살았다. 바이센펠트는 소년 시절부터 등산이나 사냥 같은 야외 활동을 즐기는 것에 크게 집착하고 있었다. 14세부터 사냥 대회에 참가한 그는 같은 시기에 사격 외에도 음악 감상이나 스포츠에도 관심을 쏟았는데, 그러다가 잘츠부르크 부근에서 가장 높은 산인 가이스베르크(Gaisberg)산에 있는 활공장에서 둥실 떠오르는 글라이더를 구경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하늘을 나는 것에 관심이 생긴 소년은 오스트리아 항공 클럽(Austrian Aëro Club)에 부속된 글라이더 학교에 입학했고, 그것을 계기로 어린 나이에 이미 그라츠(Graz)와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의 제2항공연대에서 기초 비행 과정에 참가했다.

5. 입대[편집]


이처럼 그는 남 부러울 것 없는 유복한 귀족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부모들은 소중한 장남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에 관해 가르치는 것은 잊지 않았다. 18세가 되던 1936년에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자원 입대한 그는 얼마 안가 독일 공군으로 이적했는데, 처음에는 전투조종사가 아니라 제76구축항공단(ZG 76)에서 정찰기를 몰게 되었다. 그렇지만 지원 임무보다는 직접 적기를 격추시켜 무공을 쌓고 싶어 안달이 난 에크몬트는 상부에 전투부대로 배속해 줄 것을 여러차례 요구해 1940년 8월 4일에는 제1야간전투항공단(Nachtjagdgeschwader 1 : NJG 1)을 지휘하고 있던 볼프강 폴크(Wolfgang Falck) 소령이 발탁해갔다.

그 무렵 독일의 첫 야간전투기 부대의 지휘관이 된 폴크는 유능한 조종사를 끌어모으기 위해 동부서주하고 있었지만, 새로 생겨난 실험부대로 여겨지고 있어서 조종사들은 반신반의하거나 백안시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비무장 정찰기를 몰던 에크몬트 소위는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즉시 폴크 소령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6. 개전 초기[편집]


야간전투기 조종사는 주간 작전에 임하는 조종사들과는 생활 패턴도 장비도 판이하게 달랐지만 신속히 적응한 에크몬트의 격추는 1940년 11월 16일 밤과 자정을 지나 17일 사이에 빅커스 웰링턴 쌍발 폭격기를 떨구면서 시작되었다. 두 번째 제물로는 북부 네덜란드 상공을 어정거리고 있던 휘틀리 폭격기를 잡아냈다. 1941년 1월 말에 그는 해상에서 폭격기 요격 훈련을 하던 도중 Bf 110의 한쪽 날개가 떨어져나가는 기막힌 경험을 했다. 보통이라면 그대로 바다에 처박혀 익사했을 테지만, 에크몬트는 재빨리 후방석 승무원인 요제프 레네트(Josef Renette) 하사에게 탈출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낙하산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두 시간을 헤엄쳐 구조된 둘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기지로 돌아오자, 야간전투기 부대 총사령관인 요제프 캄후버 장군으로부터 짤막한 전보 한통이 와 있었다.

"누가 근무 중에 수영을 해도 좋다고 허가했나?"


그는 1941년 3월 13일에도 후방석에 요제프 레네트 하사를 태우고 Bf 110D-2(Werknummer 3376)를 이륙시켰고 잠시 후 베르겐(Bergen) 부근에서 아군의 대공포에 피격 당해 둘 모두 다쳐서 비상 착륙하기도 했다. 4월 10일에는 1대의 웰링턴을 격추시켰는데, 이것은 NJG 1이 100번째로 격추시킨 적기였다. 이 격추를 축하해주기 위해 내로라하는 야간 에이스 베르너 슈트라이프(Werner Streib)와 헬무트 렌트, 그리고 지휘관 볼프강 폴크 소령까지 호텔에 모여 밤새 떠들썩하게 파티를 즐겼다.

11월 15일에 에크몬트는 NJG 2 예하 제5비행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1941년 말까지 그의 야간 격추수는 15대로 늘어나 있었다. 1942년 1월 25일에 그에게는 독일 금십자 훈장이 주어졌고, 3월 26일 자정 무렵부터 27일 밤에 걸쳐 웰링턴 3대와 애브로 맨체스터를 연달아 격추시켜 한꺼번에 4대의 RAF 폭격기를 떨군 바이센펠트는 격추 기록을 21대로 고쳐쓰게 된다. 이 무공으로 4월 16일에 기사 철십자훈장을 수여받기 전에 3월 27일에 국방군 보고를 통해 독일군 점령지 구석구석에서 방송을 탔자먼 이것은 그에게 있어 이미 3번째 영예였다.


7. 항공단 사령관이 되다[편집]


1942년 7월까지 리페-바이센펠트는 37대의 격추 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무렵 독일 야간전투기 파일럿 중에서 톱 클래스였다. 대위로 승진한 그는 10월 1일에 제3야간전투항공단(NJG 3) 예하 제 I 비행단장으로 임명되었고, 추가로 3대를 더 격파해 그의 격추 행진에는 거칠 것이 없어보였다. 당시 루프트바페가 발행하던 선전 잡지인 지그날에 실린 그의 인터뷰를 발췌해보자.

"전투기 조종사인 내게 있어서 가장 쉽고 흥미진진한 임무는 1942년 동안 조국 독일에 폭탄을 던지려 날아오는 적 폭격기들과 함께 나는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서툴렀고 충분한 훈련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초계 중인 내 Bf 110과 몇 번이고 마주쳤는데, 주로 웰링턴이나 휘틀리, 가끔은 거대한 쇼트 스털링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표에서 최대 150 km나 떨어진 우리 방공 라인에 가로막히고 우리에게 포착된다. 이런 종류의 임무는 퍽 단순해서 그리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항상 탐조등과 대공포의 표적이 되어 갈팡질팡하는 적기 승무원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탄 Bf 110은 그들보다 훨씬 빠르고 더 중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는 거의 항상 적기를 육안으로 포착한 다음에야 사격을 가했는데, 일단 기관포 몇 발을 날려본다. 어떤 적기는 이런 짧은 사격에도 겁을 집어먹고 무턱대고 도망가려고 했는데, 이럴 경우는 아주 좋은 먹잇감 이상이었다. 가끔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상대는 우리 도시에 폭탄을 뿌리는 폭격기였고 반드시 격추해야만 하는 적이었다. 아마 이런 내 감정과 행동이 다소 이상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래야만 나 자신과 승무원이 살 수 있었다."


해가 바뀐 1943년 5월 31일에 다시 NJG 1으로 돌아간 그는 제III비행단장에 취임했고 그로부터 한 달 후 45대째 전과를 세웠다. 이런 활약으로 인하여 그는 8월 2일에 총통이 머무르던 볼프산체로 소환되어 곡엽 기사철십자 훈장이 수여받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이 시기의 그는 반복되는 야간 출격과 전투로 인하여 극심한 피로에 쩔어 신체에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이센펠트 대위는 1개월간 입원해 몸을 추스렸고, 소령으로 진급되어 1944년 2월 20일에 제5야간전투항공(NJG 5)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8. 추락 사고[편집]


바이센펠트 소령과 함께 임무를 해오던 레이다 조작수 요제프 상사와 기총 사수 쿠르트 뢰베르(Kurt Röber) 상병은 1944년 3월 22일에 북부 독일의 파르킴 비행장에서 벨기에까지 정기 비행을 하고 있었다. 벨기에 영공에 들어서자 그들이 탄 Bf 110G-4(C9+CD / W.Nr. 720 010)는 운해가 낮게 깔리고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악천후를 만났고, 마침 불어온 한파로 날개에 얼음이 얼기 시작했기 때문에 저공으로 낮게 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시정으로 인해 지형에 충돌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비행의 정확한 상황은 불명확하지만 그들이 타고 있던 야간전투기는 아르덴(Ardennes)의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추락했고, 다음날 완전히 파괴된 잔해가 발견되었다. 미혼이었던 그의 장례식은 루프트바페에 의해 1944년 4월 15일에 린츠에 있는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그때까지 51기를 격추시킨 리페-바이센펠트 소령은 그와 마찬가지로 야간 격추왕으로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던 하인리히 프린츠 추 자인 비트겐슈타인이 전사하고 꼭 두 달 만에 순직한 것이었다. 두 에이스는 서로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이젤슈타인(IJsselstein)에 나란히 매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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