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1세 드 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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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에두아르 1세 드 보주
Édouard I de Beaujeu
생몰년도
1316년 ~ 1351년 6월 8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보주
사망지
프랑스 왕국 아르드르
아버지
기샤르 6세 드 보주
어머니
마리 드 샤티옹
배우자
마리 드 띨
자녀
앙투안 드 보주, 마르그리트 드 보주
직위
프랑스 원수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프랑스 왕국의 프랑스군 원수.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서 싸웠으나 아르드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1316년경 보주와 몽펜시에의 영주 기샤르 6세와 프랑스 무관장 가샤르 5세 드 샤티옹의 딸인 마리의 아들로 출생했다. 1340년 잉글랜드-플란데런 반란군과의 전쟁에 착수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가담한 그는 모르타뉴에서 에노 백작이며 잉글랜드군과 힘을 합친 기욤 2세의 포위 공격에 맞섰다. 이때 그는 홀로 12명의 적을 처단해 해자에 던져 용맹을 떨쳤다고 전해진다.

1344년 키프로스 왕국의 왕 위그 4세의 가신이 되어서 스미르나 요새에서 튀르크군과 맞섰다. 프랑스로 돌아온 뒤 앙굴렘 공방전에서 두각을 드러냈으며, 1346년 크레시 전투에 참가해 필리프 6세를 안전한 후방으로 모시는 데 일조했다. 1347년 샤를 1세 드 몽모랑시가 프랑스 원수직을 사임한 뒤 필리프 6세에 의해 신임 프랑스 원수에 선임되었다. 1347년 7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포위된 칼레를 구원하기 위한 필리프 6세의 원정에 동행한 후 정찰병을 통해 적의 방비가 강고한 것을 확인한 뒤 왕에게 칼레를 구원하는 건 요원하다고 알렸다.

1350년 8월 프랑스의 새 국왕 장 2세대관식에 참석한 뒤 플란데런 전선으로 가서 잉글랜드군과 대적했다. 1351년 5월, 칼레의 총독이자 프랑스 북부 방면 잉글랜드군 사령관 존 드 보챔프가 300명의 맨앳암즈와 300명의 장궁병을 이끌고 생 오메르 주변 지역을 돌며 슈보시(Chevauchée: 약탈 행진)를 벌이는 걸 관찰하다가, 그들이 너무 많은 약탈물을 챙겨가느라 행군 속도가 매우 느려졌고 경계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이들을 공격해 섬멸하기로 하고 수천 병력을 동원해 출진했다.

1351년 6월 6일,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의 아르드르(Ardres)에서 양군이 조우했다. 잉글랜드군은 즉시 고지대에 올라가서 원형 방진을 결성했고, 에두아르 1세는 모든 기사들이 말에서 내리도록 한 뒤 고지를 향해 공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전투 도중 에두아르 1세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지만, 프랑스 병사들은 꿋꿋이 공세를 이어갔다. 늦은 오후에 생 오메르 수비대가 지원하러 오자, 잉글랜드군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존 드 보챔프와 측근 몇 명 만이 가까스로 탈출했고, 나머지는 프랑스군에 사로잡혔다. 프랑스군의 승리를 이끈 에두아르 1세는 전투가 끝난 직후 사망했고, 벨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띨의 영주 장 1세의 딸인 마리와 결혼해 앙투안과 마르그리트를 낳았다. 앙투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보주의 영주가 되었고, 마르그리트는 피에몽테의 영주인 자크 드 사보이아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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