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토냉 아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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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냉 아르토
Antonin Artaud


파일:antoninartauds.jpg

본명
앙토냉마리조제프 아르토
Antonin-Marie-Joseph Artaud
출생
1896년 9월 4일
마르세유
사망
1948년 3월 4일 (향년 51세)
이브리 쉬르 센
국적
[[프랑스|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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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극작가, 배우, 연출, 시인, 연극이론가

1. 개요
2. 생애
3. 작품 목록
3.1. 영화
3.2. 도서
3.3. 공연
4. 여담



1. 개요 [편집]


프랑스의 예술가이다. 한 프랑스 연극 감독은 아르토를 '배우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화가'라 묘사했다.

잔혹 연극론을 통해 감정과 행동을 직접적으로 투사하고 표현하는,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식 연극과 반대되는 거칠고 즉흥적인 연극론을 제창해 현대 연극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극사나 연기에 대해 배우게 된다면 한번쯤은 접하게 되는 인물.


2. 생애[편집]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8남매 중[1] 한 명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앙투안 루아 아르토(Antoine-Roi)는 작은 해운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고, 어머니 외프라지 날파(Euphrasie Nalpas)는 터키에게 해 연안의 이즈미르 출신이었다. 아르토는 5세때 뇌수막염을 진단받았었다. 그 당시엔 치료법이 없었던 병이었지만 발작과 혼수상태를 포함한 오랜 투병 끝에 아르토는 살아남았다.[2] 부모는 심하게 쇠약해진 아르토를 위해 그를 요양원에 보냈지만 장기간 동안 있어야 했기에 비용이 많이 들었었다.

중학교 시절 교지에 루이 데 아티드(Louis des Attides)라는 필명으로 첫 시를 발표했다. 뇌막염 후유증으로 우울증, 신경증정신장애를 일으켜 요양소에 수차례 다녀왔다.
그 뒤, 1916년프랑스 육군에 입대한 아르토는 5년동안 6월초부터 7월 마지막 주까지 휴가를 가졌었다. 하지만 아편 중독과 정신 불안으로 휴식치료법을 시행했었다.[3] 19세 때 신경쇠약을 앓았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20년 파리로 올라온 후 의사 툴루즈의 집에 머물렀다. 의사는 자신이 만든 잡지 <내일(Demain)>의 공동 편집장에 아르토를 임명하고, 예술, 문화, 연극의 비평란을 맡긴다. 오렐리앙 뤼네 포[4]를 만나 단역으로 연극에 출연하게 되면서 뒬랭[5] 극단에도 출연한다. 그리고 단원이던 제니카 아타나지우(Génica Athanasiou)를 만나며 동거를 시작해 6년간 함께 살게 된다.

1923년에는 피토예프[6] 극단과 합류해 첫 시집 <하늘의 장기놀이(Tric Trac du Ciel)>를 출간했다.

1924년에는 당시 최고의 잡지였던 <NRF(Nouvelle Revue Française)>[7]의 편집장 리비에르와 시집 출간 문제로 교환한 편지들을 묶어 <자크 리비에르와 나눈 편지>를 출간했다. 잡지 <초현실주의 혁명>에 기고가로도 활동하며 브르통, 아라공, 로제 비트락 등과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한다.

1925년에는 여러 잡지의 기고가로 활동하고 <초현실주의 혁명>3호를 주간한다. NRF출판사에서 시집 <신경의 저울(Pése-Nerfs)>과 <연옥의 배꼽(Ombilic des Limbes)>을 출간한다.

1926년 아벨 강스[8]무성영화 <나폴레옹>에 마라(Marat)역으로 출연한다. 비트락(Roger Vitrac)과 아롱(Roger Aron)과 함께 알프레드 자리[9] 극단을 창설했으며, 문학 선언문을 발표한다.

1927년부터 30년까지는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칼 드라이어의 영화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에서 수도승 마시웨(Massieu) 역을 맡았고, 알프레드 자리 극단의 공연에 지속적으로 출연하였으며 영화 <조가비와 목사(La Coqulle et le Clergyman)>등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비롯해 훗날 <예술과 죽음(L'art et la mort)>으로 묶일 여러 편의 글, 선언문, 연극 시나리오 등을 쓴다.

1931년부터 33년까지는 연극 이론에 관한 수많은 글을 쓴다. NRF에 정기적으로 기고를 했으며, 1932년 10월 1일 <잔혹 연극(Théâtre de la cruauté)> 선언문을 NRF에서 출간한다. 그러는 한편 1919년부터 복용한 아편으로 수차례 해독치료를 받는다.

1934년에는 <엘리오가발르 혹은 무정부주의자 왕(Héliogabale ou ľAnarchiste couronné)>를 드노엘출판사에서 출간한다. 아니 베나르(Ani Besnard), 아나이스 닌(Anais Nin)과 만난다. NRF에서 <연극과 흑사병(Théâtre et la Peste)>을 출간하고 화가 발튀스(Balthus)와 만나게 된다.

1935년에는 폴리 바그람(Folies-Wagram) 극장에서 셀리와 스탕달의 작품을 바탕으로 쓴 잔혹극의 대표작 '센치家(Les Cenci)'를 무대에 올렸고, 연극에 관한 문집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1938년 부조리극의 성경으로 간주되는 <연극과 이중성(Le Théâtre et son double)>을 출간했다.

1937년에는 세실 슈람므(Cécile schramme)와 결혼을 추진했으나 결국 파혼한다. 마약 해독 치료도 받는다. 자신의 이름을 지울 의도로 드노엘출판사에서 '계시자(Le Révélé)'라는 이름으로 <존재의 새로운 계시(Nouvelles Révélations de ľEtre)>를 출간했고, NRF출판사에서는 무명으로 <타라후마라 지역 여행(Un voyage au pays de Tarahumaras)>을 출간한다. 아일랜드 여행에서 돌아온 뒤 카트르 마르(Quatre-Mares)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이후 9년 간 정신병원 생활을 하면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에는 생탄 정신병원으로 옮기고, 다시 빌레브라르(Ville-Evrard) 병원으로 옮겨 지낸다. 입원 중에도 지인들과 수많은 서신을 교환하고, 1942년에는 어머니의 노력과 시인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의 중재에 힘입어 비점령 지역인 '자유'지역 내에 위치한 로베르 정신병원으로 옮겨져 페르디에르 의사의 진료를 받는다.

1943년부터 46년까지는 로데즈 정신병원에 장기 체류한다. 정기적으로 전기충격 치료를 받는다. 페르디에르 의사가 추진한 예술치료의 일환으로 캐롤과 포의 작품을 극화하고, 수많은 글과 편지를 쓴다. 1945년 <타라후마라 지역 여행>에 글을 추가한 증보판도 출간했다. 같은 해 초부터 데생을 시작하고 ,방대한 양의 일기를 쓴다. 이 글들은 훗날 <로데즈의 노트(Cabiers de Rodez)>와 <파리 귀환 노트(Cabiers du retour a Paris)>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일기는 죽을 때까지 썼다. 1946년 4월에는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로데즈에서 보내는 편지(Lettres de Rodez)>가 출간됐고, 자크 프레벨과 우정을 쌓는다.

1946년 마침내 병원에서 나와 자유의 몸으로 5월 26일 파리에 도착한다. 아르토가 나올 수 있게 도와준 친구들, 특히 마르트 로베르와 아다모프가 그를 파리 교외의 이브리(Ivry)에 소재한 델마 의사의 요양원에 입원시키고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받는다. 6월 6일 피에르 화랑에서 아르토를 위한 경매전시회가 있었는데 많은 동료 예술가, 문인들이 자신의 그림, 데생, 수고를 판매하고 그 수익금 전액을 아르토에게 기탁한다. 6월 7일에는 사라 베르나르 극장에서 아르토를 위한 모임이 있었고, 브르통이 개막사를 읽는다. 라디오 방송용으로 '병자와 의사', '소외와 악마의 마술'을 녹음한다. 최고의 창작기를 맞이하여 왕성하게 글을 썼다.

1947년 1월 13일, 비유 콜롱비에 극장에서 <머리를 맞대고(Téte-a-Téte)>를 공연한다. 7월에 피에르 화랑에서 '초상화와 데생'을 전시한다. 더불어 마르트 로베르[10], 콜레트 토마(Colette Thomas), 로저 블랭[11]이 아르토와 함께 그의 작품을 낭송했으며, 이 해 <아르토 르 모모>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원제: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를 출간한다. 고통을 이기기 위해 다량의 클로라(抱水)를 복용한다.

1948년 <여기에 잠들다(Ci-git)>를 출간한다. 이해 아르토는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직장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이해 2월 1일, 라디오 방송용으로 이미 녹음이 완성되었던 그의 작품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가 방송국 사정으로 방송이 취소되면서 수많은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 그리고 3월 4일, 요양원 침실 침대 밑에서 한 짝의 구두를 손에 쥔 채 숨진 기이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약물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의심되었다.

연극에 있어서 그의 영향력은 수전 손택이 아르토 이전의 연극과 그 이후를 양분할 정도로 막대하다. 또한 그는 들뢰즈, 데리다, 푸코 등의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주요 개념들이 출발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정신적 스승이었다. 사후에 갈리마르 출판사[12]에서 『앙토냉 아르토 전집』(27권)이 간행되었다.

아르토는 광기와 고통의 궤적 속에서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연극 이론가로 살면서 반 고흐와 예술적으로 정신적으로 생생한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1947년에 쓴 에세이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로 아르토는 이듬해 생트 뵈브 비평상을 받았다. 집필 계기가 특이한데 1947년 1월에서 3월까지 파리의 오랑주리관에서 반 고흐의 그림 전시회가 개최되는데 때마침 1월 31일 주간지 《예술》에 관련 기사가 실린다. 그 기사는 정신과 의사인 베르와 르르와가 『반 고흐의 악마성』이라는 두툼한 저작을 출간했다고 전하면서 베르의 <그의 광기>를 간단하게 발췌, 소개하였다. 이 책은 반 고흐의 정신 상태를 광기로, 반 고흐를 광인으로 단정했다. 이 기사를 읽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20여 분을 보낸 뒤 그는 전시회에 자신을 데려다줄 것을 요청했다. 아르토는 이틀 뒤 전시회를 관람하고 극도의 열광 상태에서 단숨에 이 책을 써내려갔다.
계속된 전기 쇼크 치료와 투약으로 피해망상증에서 막 벗어난 상태에서 쓰여졌다는 것, 정신분석가들과 사회에 의해 고통받은 반 고흐를 내면 깊숙이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서 그를 대변했다는 점[13] 등이 여러 모로 이색적인 작품이다.


3. 작품 목록[편집]



3.1. 영화[편집]


영화 연도
제목
배역
1927년
나폴레옹
마랫
1928년
잔 다르크의 수난 [14]
조연
조개의 성직자 [15]
각본

주연
1931년
우든 크로시즈
조연
1934년
릴리옴 [16]
조연
1936년
더 로드 투 글로리
조연


3.2. 도서[편집]


제목
연극과 그 이중 (LE THÉÂTRE ET SON DOUBLE)[17]
첸치일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18]
신경 측정계(LE P?SE-NERFS)
엘리오가발 혹은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자 (H?LIOGABALE OU L'ANARCHISTE COURONN?)
신의 판단과 결별하기 위하여(POUR EN FINIR AVEC LE JUGEMENT DE DIEU)


3.3. 공연[편집]


제목
불탄 복부 혹은 미친 어머니
첸치일가 [19]

4. 여담[편집]


뮤지컬 <아르토, 고흐>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위에 언급한 고흐 관련 일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아르토의 연극론은 연구자들도 어렵다고 할 정도로 난해한 구석이 있어서 대중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이 작품이 한국에서 아르토의 인지도를 올린 공신이기도 하다.

Hearts of Iron IV의 대체역사모드 레드 플러드에서 프랑스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예술가들과 종교인, 그리고 기존 질서에 환멸을 느낀 모든 이들을 끌고와서 1920년대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을 평정하고 그 위에 초현실주의적 이념, '촉진주의'를 가진 국가로 만들었다. 더빨리더빨리더빨리더빨리더빨리더빨리더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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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다섯은 성인이 되기 전에 요절했다고 한다.[2]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략 20%의 생존자가 심각한 장애를 얻는 병이다. 유명한 예시가 하루아침에 시청각중복장애인이 된 헬렌 켈러.[3] 요양원장이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아편을 처방해서 아편중독은 더 심해졌다.[4] Aurélien Lufné-Poe, 1869~1940. 프랑스의 배우이자 연극인. 자유 극단 출신. 포르(Paul Fort)와 함께 1890년 예술 극단을 창단한 후 그와 결별하고 1893년 작품 극단을 창단해 헨리크 입센,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등 북구의 거장들과 자리의 작품을 연출한다.[5] Charles Dullin, 1885~1949. 프랑스의 연출가이자 극단주. 아리스토파네스, 셰익스피어, 몰리에르의 작품 등을 무대에 올렸으며, 아울러 루이지 피란델로를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한다. 훗날 연극계의 거장이 되는 바로(Jean-Louis Barrault)와 빌라르(J.Vilar)의 스승이다.[6] Georges Pitoéff, 1884~1939. 러시아 출신의 연출가이자 극단주. 1915~21년 제네바에서 활동하다가 파리에서 자신의 극단을 통해 크레이그(Edward Gordon Craig, 영국의 연출가)와 아피아(Adolphe Appia, 스위스 연출가)의 극 이론을 발전시켜 대사에 중점을 둔 연출을 시도한다. 일병 4인방의 한 명으로, 뒬랭, 바티(G. Baty), 주베(L. Jouvet)와 함께 아누이, 그리고 외국 작가인 피란델로, 버나드 쇼의 작품을 연출했다.[7] 1909년 창간된 잡지로 '경향은 다르지만 모두 문학의 위상에 고민하는' 소그룹의 문인들로 출발했다. 앙드레 지드, 코포(J. Copeau), 슐렝베르제(J. Schulumberger)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고, 당시 신생 출판사였던 갈리마르 출판사에 둥지를 틀었다. 지드는 제1호에 <좁은 문>을 발표했고, 1910년부터 발레리, 클로델, 발레리 라르보, 쥘르 로멩 등이 활약한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자크 리비에르가 편집장을 역임했고 장 폴랑(Jean Pauhlan)이 그 뒤를 이으면서 엄정한 비평, 새로운 문학성에 대한 개방, 신인 발굴로 위상을 높이면서 쉬페르비엘르, 지오노, 말로, 몽테를랑, 미쇼, 아를랑, 브르통 등의 작가를 발굴한다. 2차 대전 중 편집장인 드류 라 로셸(Drieu La Rochelle)이 적극적으로 나치 부역자 노릇을 하다 결국 종전 후 사형당하면서 잡지도 정간되는 등 암울한 상황을 겪었다. 그러나 1953년 장 폴랑과 마르셀 아를랑이 <신新NRF(Nouvelle Nouvelle Revue Française)>라는 이름으로 잡지를 계속 내면서 전쟁 전의 명성을 이어간다.[8] Abel Gance, 1889~1981. 92년의 생애 동안 평생 거장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위고풍의 천재성을 드러낸 영화감독. 1911년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파노라마와 회화성, 음향을 통한 원근법 등을 선호했다. 1918년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에 착상한 동명의 영화로 평화주의를 주창했고, <10번 교향곡>과 <바퀴>로 미국의 그리피스(David Wark Griffith, 1875~1848)와 러시아의 아이젠슈타인(Serfe Mikhailivitch Eisenstein, 1898~1948)에 비견되는 프랑스 무성영화의 거장으로 등극한다. 영화의 상업적 제약을 무시하고 장시간용 영화를 만든 탓에 그의 작품은 완전하게 상영된 적이 없다. 최고의 실험 영화인 <나폴레옹>(1927)은 원래 여섯 개의 작품으로 구상되었으나 첫 번째 작품만이 실제로 만들어진다. 영상에 가득 찬 수많은 실험 정신이 담긴 장면이 분실되었으나, 사망 직전 영국인 감독 케빈 브라운로우(Kevin Brownlow)에 의해 극적으로 발견되어 복원돼 1983년 오케스트라의 협연 속에 전작이 상연된다. 1930년 유성영화의 출현으로 타격을 입고 이후 생계를 위한 작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으나 간간히 천재성과 저력을 드러냈다. 1980년에는 명예 세자르상을 수상한다. 방대한 분량의 미완성 시나리오를 남겼다.[9] 1873~1907. 34세의 나이에 요절한 작가로 기이한 풍자극인 <위비 왕王(Ubi roi)> 연작으로 유명하다. 고등학교 시절 화학선생의 모습에서 착상(<부인에게 바람맞은 위비Ubi cocu>)한 이 인물은 1896년 작품 극단에서의 첫 공연부터 굉장한 스캔들을 일으킨다. 위비 왕은 파괴된 것조차 파괴하려는 무정부주의자 자리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위비 왕>과 <사슬에 묶인 위비Ubu enchaîné>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듯 '바다의 순수함'을 세계에 되돌려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의 희극성은 암울한 희극성,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껏해야 영국 광대의 암울한 희극성이나 시체들의 춤판 같은 희극성에 그쳤다'. 소설과 뛰어난 상징주의 시를 쓰기도 했는데 스스로 '신성한 풀'로 명명한 압생트 주로 건강이 악화된다. 점차 세상과 고립되어 '상상물리학(Pataphysique)' 이론가를 자처하며 언어의 완전한 해체와 그 기괴함 속에 언어를 새롭게 재현하고자 했다.[10] Marhe Robert, 1914~1996. 프랑스의 독문학자이자 비평가. 프랑스의 프로이트 연구 1세대의 한 명이다. 소르본프랑크푸르트에서 수학했고, 그림 형제, 프로이트, 카프카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이를 정신분석학에 근거하여 소개했다. 주요 저서로 <정신분석 혁명>, <기원의 소설과 소설의 기원>, <소설의 증오>를 발표했고 <독서의 책 1>(1977), <독서의 책 2-문학의 진실(Vérite littéraire)>로 비평가상과 문학비평대상을 수여했다. 80세에 <문학 가로지르기(Traversée littéraire)>(1994)를 출간했고, 1995년 그녀의 전작에 대해 국민문학대상이 수여되었다.[11] Roger Blin, 1907~1984. 프랑스의 배우이자 연출가. 부조리극에서 족적을 남긴 연출가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3년) 이후 주네, 베케트, 아다모프 등의 작품을 공연하여 유명해졌다. 아르토의 연극 <센치 일가>에 단역으로 데뷔, 이어 시인 프로베르의 추천으로 극단 '10월'에 입단했으며 1937년의 일대 사건이었던 장 루이스 바로의 스펙타클 <뉴만시아>(세르반테스의 작품)에 참여했다.[12] 문학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플레이아드 전집(총서)를 내는 출판사다.[13] 정신병원에 수용된 화가에 대해 정신병원에서 막 나온 작가만큼 잘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14]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15] 여성 감독이었던 제르멩 뒬락의 아방가르드 영화[16] 프리츠 랑이 프랑스에 망명했을 당시 만든 영화.[17] 잔혹연극론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18] 원제는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19] 스탕달(Stendhal)의 단편과 셸리(Shelley)의 희곡을 토대로 쓴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