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빈 키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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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bin Kitzinger.jpg
이름
알빈 키칭어[1]
(Albin Kitzinger)
생년월일
1912년 2월 1일
사망년월일
1970년 8월 6일 (향년 58세)
국적
파일:독일 국기.svg 서독
출신지
독일 제국 슈바인푸르트
포지션
레프트 윙 하프
신체조건
168cm | 69kg
소속팀
1. FC 슈바인푸르트 05 (1929-1946)
국가대표
44경기 2골 (1935-1942)
감독
1. FC 슈바인푸르트 05 (1941-1946)
1. FC 슈바인푸르트 05 (1950-1951)



1. 개요
2. 생애[2]
2.1. 어린 시절
2.2. 선수 생활
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3]



1. 개요[편집]


독일의 전 축구 선수.


2. 생애[4][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키칭거는 12살부터 고향 슈바인푸르트를 연고로 하는 1. FC 슈바인푸르트 05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2.2. 선수 생활[편집]



2.2.1. 클럽[편집]


18살에 1. FC 슈바인푸르트 05의 1군으로 올라간 키칭거는 은퇴할 때까지 슈바인푸르트를 지켰다.

슈바인푸르트는 1933년, 가우리가 바이에른에 편성되었다. 하지만 슈바인푸르트는 1939년과 1942년을 빼면 가우리가 우승을 하지 못했고 우승 후 진출한 독일 전국 챔피언십에도 두번 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2.2.2. 국가대표[편집]


1935년 8월 25일, 키칭거는 루마니아를 상대로 자신의 첫 A매치를 치렀고 독일은 4대2로 승리했다.

키칭거는 비록 1936년 올림픽에는 차출되지 않았지만 독일 대표팀에서 든든한 하프백으로 자리매김했다. 1937년 4월부터는 소속팀 동료 안드레아스 쿠퍼도 대표팀에 들어왔고 브레슬라우 엘프[5]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8년 월드컵에 참가한 키칭거는 개막전 스위스전에 출전했다. 하지만 예상외로 독일은 연장전을 다 치렀음에도 스위스와 1대1로 비기는 바람에 재경기를 치러야했다. 키칭거도 부상으로 인해 재경기에 참가할 수 없었고 재경기에서 독일은 스위스에게 2대4로 덜미를 잡혔다.

1942년 5월 3일에 있었던 헝가리전이 키칭거의 7년에 걸친 대표팀 경력에서 44번째이자 마지막 경기였다. 독일은 전반전에 1대3으로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지만 후반에만 4골을 몰아쳐서 5대3으로 역전에 성공했다.


2.3. 이후[편집]


축구 선수 은퇴 이후 키칭거는 휠 허브 제조업체에서 전기 엔지니어 겸 부사장으로 일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날렵하면서도 공에 대한 확신과 침착한 볼배급으로 이름을 날렸다.


4. 뒷이야기[편집]


  • 1943년, 슈바인푸르트 공습 당시 키칭거도 폭격에 휘말려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고 형 오스카르는 공습에서 사망했다.


5. 수상[편집]



5.1. 선수[편집]



5.1.1. 클럽[6][편집]


  • 가우리가 바이에른 우승 2회: 1938-39, 1941-42
  • 바바리안 컵 우승 1회: 1933

[1] 독일어 표기법으로는 키칭거, 발음으로는 키칭어이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키칭거는 1. FC 슈바인푸르트 05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1937년 5월 16일,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에서 열린 독일과 덴마크와의 시합. 독일이 덴마크를 8대0으로 대파했다.[6] 키칭거는 1. FC 슈바인푸르트 05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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