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상드르 페시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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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아이티의 군인으로, 이후 남부 아이티의 대통령을 맡았다.
2. 생애[편집]
생도맹그 포르토프랭스에서 프랑스인과 혼혈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며, 페시옹이라는 별명은 흑인 동우회를 만든 '제롬 페시옹 드 빌뇌브'를 따서 명명되었다.
영국과 스페인의 생도맹그 침공에 맞서 앙드레 리고, 장피에르 부아예 등과 연계해서 1799년 6월 '단도 전쟁'에서 투생 루베르튀르에 맞섰다가 패배했다. 그러나 물라토군은 12월 세력을 회복하고, 남부 자크멜을 방어했으며 이때 수비대 사령관은 페시옹이 맡았다. 하지만 결국 1800년 3월 자크멜은 함락되었고 페시옹과 물라토 지도자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리고 등과 함께 1802년 샤를 르클레르가 이끄는 1만 2000명의 정예 프랑스 원정군과 생도맹그로 돌아왔으며 투생을 반역자로 처리한 후 아르카에에서 비밀 회의에 참가, 1802년 10월 독립군에 참가하여 한때 자크멜에서 같이 싸운 장 자크 데살린을 지원했다.
1806년 데살린이 암살당한 후 페시옹은 '공화제 옹호자'로서 앙리 크리스토프와 충돌했고 결국 나라는 남북으로 갈라져 북부는 앙리가 왕으로 즉위했고, 페시옹은 남부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흑인과 물라토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페시옹은 임기 초반에는 민주주의를 지지했으나 이후 의회의 제약을 귀찮게 여기며 1818년에 의회를 해산시켜 버렸다.[1]
상업적인 플랜테이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지지자와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했으며 '친절한 아버지(아이티어: Papa Bon-Kè, 프랑스어: Papa Bon-Cœur)'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국가 경제에 타격이 갔으며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급 농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1818년 황열병으로 사망했고 장 피에르 부아예가 그 뒤를 이었다.
3. 기타[편집]
- 시몬 볼리바르를 비호하여 물질적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 아이티 500구르드 지폐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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