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메(그랜드체이스 for kakao)/아바타

타종이 울렸다.

학생들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쳐 수업을 마무리하지 못한 사람은 오직 강단에 선 강사 아르메 뿐이었다.

"어어, 잠시만 기다리세요! 다음 시간까지 과제가..."

"야! 빨리 밥 먹으러 가자."

학생들은 허둥거리는 아르메를 무시하며 삼삼오오 뭉쳐서 학생식당으로 향했다. 몇몇인가 마음이 약한 학생들이 뒤를 돌아봤다가 황망해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우, 우리 이래도 괜찮은 걸까?"

"아, 뭐 어때서? 점심시간이 돼서 점심 먹으러 가겠다는데..."

"맞아. 수업을 제 시간에 못 마친 자기 잘못이지 뭐..."

"그래도 강사님도 여기 바이올렛 메이지 아카데미 출신이라던데... 말하자면 우리 선배님이잖아."

대륙 제일의 마법사 양성기관, 바이올렛 메이지 아카데미.

아카데미 학생들은 엘리트 마법사 코스를 밟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자부심에 의해 동문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해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르메를 떠올린 학생들은 콧방귀를 꼈다.

"그래! 무려 바이올렛 메이지 정규과정을 밟았으면서 지금 고작 시간강사라니! 믿겨져? 얼마나 낙제생이었으면 시간강사 밖에 안 될 수 있는 거지? 신경 쓰지 마. 우리에게 학점을 주는 건 저런 시간강사가 아니라 진.짜. 교수님들이니깐."

『꽈아앙!』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학생들이 학생식당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며 소동이 발생했다. 폭발의 중심에서는 몇몇 학생들이 소리치며 도망가고 있었다.

"마법 사고다. 달아나야 돼!"

"소환된 몬스터들이 폭주했어."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몇몇인가 학생들은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자칭 엘리트임을 자처하는 이들이었다.

"몬스터 따위야 제압하면 그만이지!"

『샤이닝 에로우!』

첫 번째 학생이 고속영창과 함께 빛의 화살을 발사했다. 하지만 갑각류 몬스터는 빛의 화살에 두들겨 맞고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두 번째 학생이 혀를 차며 자신의 지팡이를 꺼냈다.

"멍청아. 너 바이올렛 메이지 맞아? 마법사고로 소환된 몬스터는 아주 높은 확률로 일시적으로 강력한 항마력을 가진다는 것 안 배웠어? 저런 몬스터에겐 간접 공격을 먹여줘야지. 이렇게 말이야!"

『어스 웨이브!』

땅에서 솟아난 모래와 바위로 이뤄진 충격파가 몬스터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학생 또한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마법사고로 소환된 몬스터는 항마력 뿐만 아니라 강한 마력감지 능력을 가진다는 사실을...

몬스터는 마력으로 만든 충격파가 날아오는 것을 감지하고 옆으로 굴러 피한 뒤 주문을 외운 학생들 앞으로 빠르게 돌진했다. 예상하지 못한 기민한 움직임에 학생들은 크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어엇?"

"우와아악!"

몬스터가 휘두르는 집게발에 얻어맞은 학생들은 볼썽사납게 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뒤늦게 나타난 교수가 그들을 구조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학생들에게 나서라고 했죠?"

"으으윽.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사과할 시간이 있다면 어서 달려가서 아르메 선생님을 모셔오세요. 빨리요!"

"아, 아르메 강사... 님이요?"

학생들은 교수의 입에서 시간강사의 이름이 언급되자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이 다급한 순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시간강사 따위를 찾는단 말인가?

"그래요. 아르메 선생님 말이에요. 그녀는 이런 일에 가장 익숙한 마법사에요."

"가지 않아도 돼요. 제가 직접 왔으니깐!"

『블리자드 스톰!』

아르메는 그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눈보라의 주문을 외웠다. 놀라운 건 그 다음 순간이었다. 넓게 펼쳐진 빙하지대, 그런데도 눈보라는 오직 몬스터 단 하나의 개체를 향해서 휘몰아 치는 게 아닌가?

학생들은 마법으로 일으킨 눈보라를 섬세하게 컨트롤하여 하나의 대상에게 집중되도록 만드는 것을 처음 봤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다.

무엇보다도 적은 항마력을 가진 소환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항마력이 소용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퍼부어 적을 얼려 버렸다. 엘리트라고 자처하던 학생들은 손도 쓸 수 없었던 몬스터를 시간 강사라는 사람이 눈 깜짝할 새에 제압한 것이다.

교수는 아르메의 활약상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역시 그랜드체이스."

"그, 그랜드체이스? 그 전설적인 존재들 말인가요?"

"그래요. 그녀는 그랜드체이스의 아르메 글렌스티드에요."

학생들은 교수의 이야기에 경악했다. 단 하나의 적에게 집중하는 마력의 컨트롤, 강력한 항마력마저도 뚫어버리는 마력의 강도. 이 증거들만으로도 아르메의 정체를 의심할 수 없었다. 전설적인 존재, 그랜드체이스였다.

"너희들 몸은 좀 괜찮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아르메 선생님!"

아르메의 말에 학생들은 곧은 자세를 취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달라진 학생들의 태도에 아르메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교수님만이 뒤에서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거리를 찾은 리르는 두리번거렸다. 아르메의 가판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근처에서 다른 가판대를 꾸리고 있던 상인이 리르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아르메? 글쎄. 요 며칠 보이지 않던데?"
"장사를 접은 건가요?"
"아냐. 그렇진 않아. 나한테 누가 자기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으니까. 새로운 디자인이 떠오르지 않아서 공방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답변 감사합니다."

아르메는 악세서리 디자이너였다. 새로운 시안이 떠오르지 않으면 며칠이고 밤을 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아티스트였다. 그렇기 때문에 리르는 상인의 얘기가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리르는 아르메의 공방 위치를 알고 있었다. 분명 아르메가 다니는 학교의 빈 동아리방을 대여해서 공방으로 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이 다니지도 않는 다른 학교에 들어가는 건 낯선 경험이었다.

또각또각.

어둠 컴컴한 복도에 자신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괜시리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게 된다. 기껏 복도를 가로질렀건만 아르메의 공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아니, 불이 꺼져있다 착각할 정도로 암막 커튼이 빛이 새는 걸 막고 있었다.

"아르메 님, 계신가요?"
"어? 리르?"

대답과 함께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르메가 안에 있다는 걸 확인한 리르는 공방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커튼을 젖히는 순간 진한 페인트와 풀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리르는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 휘청거리고 말았다.

깜짝 놀란 아르메가 달려나와 그런 리르를 부축해줬다.

"괜찮아, 리르?"
"아아. 아르메님, 환기를 좀 해야 될 것 같아요."
"아, 응! 잠시만 기다려."

리르에게 자리를 권한 아르메는 어지러운 공방을 요령 좋게 가로질러서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리르는 그제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마실 것 좀 내올까?"
"으음, 아니오. 걱정 마세요.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니까."
"미안해. 손님이 올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환기도 좀 시켜두는 건데."
"아니에요. 제가 말씀도 안 드리고 불쑥 나타난 걸요."
"그러게. 여긴 무슨 일이야? 내가 거리에 나갔으면 어쩌려고?"
"그렇지 않아도 오늘 가판대를 열지 않으셨길래 공방으로 찾아온 거랍니다."

리르와 아르메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사는 곳도 다르고, 다니는 학교도 달랐다. 생활 양식 어느 곳에서도 접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두 사람은 어릴 적 인연으로 맺어진 친구였다. 이 두 사람에 한 명을 더해서 셋이서 꼭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만남을 가졌다.

이렇게 리르가 다른 친구들에게 사전에 약속을 하지 않고 찾아오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아르메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기에 따로 질문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연습하고 있던 베이스를 집어 들고 연주를 시작했다.

리르가 동그랗게 눈을 뜨자 아르메는 민망한 미소로 답했다.

"며칠 전부터 배우기 시작했어. 악기라는 거 보기보다 다루기 어렵더라."
"아르메님이 연주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관심은 있었어. 딱히 인연이 없었던 거지."
"그럼 지금은 인연이 닿았다는 뜻이군요?"
"얘기가 그렇게 되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시간이 되자 리르는 다음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리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르메는 라이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아직 가게 마감 전이지? 그럼 오늘 레슨 때는 가게에서 제일 괜찮은 키보드 하나만 가져다 줄래? 뭐? 벌써 베이스는 포기한 거냐고? 그런 거 아니야!"

삐걱삐걱.

스피커 폰으로 라이언과 통화를 하면서 아르메는 화이트 보드 위에 겹겹이 그려져 있는 악세서리 시안을 지운 뒤 새로운 시안을 짜기 시작했다. 기타가 있고, 베이스가 있으며, 키보드가 함께하는 거리 공연 밴드. 아르메는 맨 위에 '리듬 체이스'라 명명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챙겨오는 거 잊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