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눌 드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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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아르눌 드 쇼크(Arnoul de Chocques : ? ~ 1118년)는 1차 십자군의 주요 성직자이자, 초대와 제 7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였다.


2. 생애[편집]


아르눌은 플랑드르 지방의 성직자의 사생아였다. 성직자 독신의 전통은 성경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권고로 4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이후 종종 유부남이 사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1] 그는 노르망디의 캉(Caen)에서 이탈리아 법관 출신의 성직자 란프랑코[2] 밑에서 수학했다. 1070년대에는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딸인 세실리아의 가정교사로 있었고 또한 십자군 연대기 작가 라울 드 캉(Raoul de Caen)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게다가 윌리엄의 이부 형제[3] 오도 드 바이외(Odon de Bayeux)[4]와 절친이었다. 이토록 일개 사제였지만 그의 가까운 지인들은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아르눌은 1차 십자군이 레반트로 진군하자 윌리엄 1세의 장남인 노르망디의 로버트 2세(Robert II de Normandie)의 고해 종군 사제로 참전한다. 도중에 아데마르 주교를 비롯한 십자군 고위 성직자들과 콘스탄티노플에서 알렉시오스 1세의 초대로 황궁을 답사했으며, 그곳에서 특별히 성정성창을 목도한다. 이후 안티오크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창이 발견됐다고 한 사제[5]가 주장하자[6], 아르눌은 자신의 경험으로 그 기적을 허구라며 비판했다. 당시 툴루즈의 레몽 4세는 십자군의 지도자였는데, 나이도 최연장자에 굉장히 신실한 기독교 영주였다. 성창이 나타나자 그 사제 옆에 붙어 기적이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며 군사들을 고무시키고 있었는데, 아르눌의 반박으로 기적의 성스러움이 훼손되자 성창을 발견한 사제는 스스로 불의 시련을 겪어서 증명하겠다고 했다. 결국 심각한 화상으로 천국으로 가버린다(...) 오도의 연대기에는 그가 불에서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하지만, 시련이 끝난 뒤 군중들이 달려들어 그로 인한 부상으로 죽었다고 기록한다. 불 속에서 끄집어 낸다고 달려들었는걸 이렇게 기록하는 수준 사태가 이렇게 되자 뻘쭘해진 레몽 4세는 이후로 아르눌과 사사건건 반목하게 된다. 이후 트리폴리에 다다르자 안티오크를 보에몽에게 빼앗긴 레몽 4세가 후방을 안전하게 하기위해 자신의 영토를 얻기 위해 트리폴리 점령을 주장한다. 아르눌은 남은 식량을 언급하며 바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해야한다고 맞섰고, 그의 바램대로 십자군 영주들은 모든 지역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 말 그대로의 진격이 이루어진다.

앞선 기적의 훼손으로 인한 십자군의 위기와 준비 없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공성전에 쓸 공성 무기가 없던 십자군이 고전하자 사기 저하가 뒤따랐다. 군량도 바닥이 보였고, 무슬림의 지원군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랐다. 그러자 간절한 소망이 기적이 또다시 발현된다. 아데마르 주교가 사제의 꿈에서 나와 예루살렘을 돌면서 기도를 하라고... 그러자 아르눌은 뒤늦게 후방에서 보급품을 조달해준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얻은 목재와 예루살렘을 돌다가 기적처럼 발견 된 재단 된 목재를 뒤섞어 데우스 불트를 외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렇게 만든 공성탑(Siege tower)에 불에 타죽은 페에르의 숭고한 영혼을 기리기 위해 그리스도 상을 만들어 장식하는 것을 도왔다. 예루살렘을 해방 된 후, 성묘 교회에서 성십자가가 발견된다. 이 발견은 당시에는 성창과 달리 논란의 여지가 없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나, 마음속 의심의 여지는 많았다. 아르눌은 이 발견의 주요 인물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성십자가는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가장 주요한 성유물이 된다.

기세가 등등해진 종군 성직자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4세기 만에 정식 예루살렘 총대주교로 누구를 앉힐 지부터 논의했다. 교황의 대리인으로 종군한 아데마르 주교는 이미 안티오키아에서 선종했었다. 아르눌은 프랑스 북부의 노르망디 출신으로 최근의 이슈에 중심에 있었기에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지만, 남부 프랑스 터줏대감 레몽 4세가 북부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중세식 지역감정 격렬히 반대해 회의는 곧 파행되었다.

고드프루아가 왕이 되자 레몽 4세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순례를 갔고, 곧바로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로 선출되었다. 그는 고드푸루아가 예루살렘 대신 지배할 이집트를 탈환하기 전 까지의 첫 번째 예루살렘의 통치자, 그리고 예루살렘이 세속적인 나라가 아니라 성직자에 의해 지배되는 고드프루아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는 성십자가의 유물을 앞세워 아스칼론 전투에서 고드프루아와 함께했다. 총대주교는 십자군들 사이에서 굉장히 보수적인 라틴어 의식을 집행하며, 다른 모든 종교를 금지 시켰으며, 심지어 정교회마론파처럼 같은 그리스도인 조차 소외시켰다. 그러나 그의 집권은 아직 공식적으로 교황의 재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곧 그의 정통성에 대한 의문의 부각되었다. 그는 성임되기 전에 1099년 12월 우르바노 2세의 후임 교황 파스칼 2세가 임명한 다임베르트 다 피사(Dagoberto da Pisa)로 교체 되었다. 아르눌은 대신에 예루살렘의 부제장(archdeacon)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 1112년에 그는 공식적으로 7대 총대주교가 되었지만 다른 많은 성직자들이 그를 불신하고 가혹할 정도로 핀셋 검증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지에서 비 가톨릭 대중들을 금지했을 때부터 정교회와 마론파, 시리아 기독교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는 각종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를테면 무슬림 여자와 성관계, 성물 매매에 의한 이득,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보두앵 1세의 아델라이드 델 바스토와의 중혼 결혼[7] 용서였다. 그는 1115년 교황의 사절단에 의해 잠시 체포되었지만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했다. 결국가 보두앵 1세와 애들레이드의 결혼을 무효화를 전제조건으로 1116년에 복직되었다. 그는 1118년 죽을 때까지 총대주교로서의 임무를 다했다.

아르눌의 조카, 에멜로타(Emelota)라고도 불리는 엠마(Emma)는 시돈(Sidon)과 카이사레아 (Caesarea)의 백작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섭정, 외스타슈 그레니에(Eustace Garnier)와 결혼했다. 엠마는 외스타슈가 죽자 야파 (Jaffa)의 백작 위그 2세 드 르 퓌세(Hugh II de Le Puiset)와 재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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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23년 제 1차 라테란 공의회 이후로 성직자 독신이 확립. 유부남도 안됨. 안 지키면 파문.[2] 그의 후임이 스콜라 신학을 창시한 안셀무스이다.[3] 윌리엄 1세의 어머니 헤르레바가 재혼함.[4] 윌리엄 1세 시절 영국의 2인자[5] 피에르 바르톨로메오(Pierre Barthélemy)[6] 아데마르 주교는 그 전에 병사했다.[7]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아르메니아의 아르는 아직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