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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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1년[1] 6월 28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호정리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2][3]
사망
1949년 3월 12일[4]
충청북도 청원군
자 / 호
사량(士良) / 구산(久山)
본관
고령 신씨[5]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흥구는 1881년 6월 28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이상면 호정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호정리)에서 아버지 신우모(申遇模)와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6]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원면의 만세시위를 같은 고령 신씨 문중인 신형식·신학구 등과 함께 주도하였다. 그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잠적하였다가 1920년 9월에 동지인 이종만(李鍾萬)의 집에서 신형식 등과 비밀리에 회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할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다.

그후 이종만에게 권총을 구입할 자금을 지원받은 그는 동지 포섭과 군자금을 징수할 부호를 선정하는 활동을 진행하였으나 이종만과 신형식이 일제경찰에 붙잡히자 은신했다. 1949년 3월 12일 청원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신흥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83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인근의 관정리·귀래리·추정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신형식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청주 상당산성 동쪽 낭성, 가덕, 미원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룬 고령 신씨 집안을 가리켜 '산동 신씨'라 불리기도 한다.[4]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950년 2월 11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5] 영성군파 22세 구(求) 항렬.[6] 아버지 신우모는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 풍양 조씨 조원하(趙元夏)의 딸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고, 둘째 부인 밀양 손씨에게서 아들을 하나 두었다. 그런데 족보상 1883년생인 신흥구보다 나이가 어린 1887년생 신병구(申秉求)가 신우모의 양자로 굳이 입적된 것을 보면, 신흥구는 서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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