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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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신영안(申瑛桉)
이명
신영안(申英安)
본관
평산 신씨
생몰
1899년 1월 14일 ~ 1944년 7월 15일
학력
진주공립농업학교 (現 경상국립대학교)
출생지
경상남도 사천군 중남면 온정리
(현 경상남도 사천시 용현면 온정리)[1]
사망지
경상남도 사천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영안은 1899년 1월 14일 경상남도 사천군 중남면(현 사천시 용현면) 온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진주공립농업학교(현 경상국립대학교)에 재학하던 중 3.1 운동 이후 재차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다이쇼 덴노의 생일을 이용해 진주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뜻을 같이 하는 문위동, 김익조(金益祚) 등과 함께 회의를 거듭하면서 구체적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8월 31일 오후 7시경에 진주 시내의 각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진주공원과 농업학교 앞, 재판소 앞 등 세 곳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신영안 등은 진주 내의 제1, 제2보통학교·광림학교(光林學校)·기독청년회·청년친목회 등 청년·학생들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거사를 준비하는 한편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선언서 3백 매를 학교 기숙사에서 몰래 인쇄하였다. 거사 전날인 8월 30일 모든 준비가 끝났고, 거사의 결행만이 남았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탐지한 일제 경찰의 추격을 받고 8월 30일 오후 11시에 모든 것이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체포된 그는 학교에서 퇴학처분을 당하였으며, 1920년 10월 1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천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4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신영안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금문리·선진리·송지리와 함께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