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구

덤프버전 : r20210301


성명
신경구(申敬求)
자 / 호
현여(賢汝) / 송암(松岩)
본관
고령 신씨[1]
생몰
1887년[2] 9월 4일 ~ 1948년 6월 2일[3]
출생지
충청도 청주목 산내일면 용곡리
(현재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용곡리)[4]
사망지
중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신경구는 1887년 9월 4일 충청도 청주목 산내일면(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용곡리에서 아버지 신혜모(申惠模)와 어머니 경주 김씨 김상희(金相喜)의 딸 사이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미원면에서 이용실(李龍實)·이수란(李水蘭)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여 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시위를 전개했다. 그러던 중 경찰이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그를 체포해 주재소로 끌고 가자, 군중은 격분해 주재소로 몰려들어 "신경구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유리창과 장지문을 부수고, 정문 기둥을 쓰러뜨리고 담을 헐어버렸다. 이에 미원 주재소는 청주경찰서에 구원을 요청했고, 청주경찰서 소속 경관들이 출동해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신경구는 1919년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치 못하고 그곳에서 1948년 6월 2일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한동안 봉환되지 못하다가 차남 신병휴(申丙休)와 대한적십자사의 꾸준한 노력으로 1986년 12월 17일 봉환에 성공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신경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영성군파 22세 구(求) 항렬. 족보명 신경구(申庚求).[2]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1891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고령 신씨 대동보에는 4월 16일 별세했다고 기재되어 있다.[4] 인근의 기암리·운교리·운용리·종암리와 함께 고령 신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