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르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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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일대의 항공 사진. 좌측 하단이 주시가지, 중앙 하단의 카르파초 산, 우측 하단의 카트파나 사막과 국제공항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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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성채 (카르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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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서북쪽의 휴양지인 샹그릴라 (카추라) 호수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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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토카 폭포

1. 개요
2. 역사
2.1. 막폰 왕국의 수도
2.1.1. 알리 셰르 칸
2.2. 근현대
2.2.1. 막폰-도그라 전쟁
3. 볼거리
3.1. 스카르두 성채
4. 기타


1. 개요[편집]


우르두어 سکردو
발티어 སྐར་དོ་་
영어 Skardu

파키스탄 길기트 발티스탄 지방의 도시. 주도 길기트에서 동남쪽으로 100km 가량 떨어진 인더스 강 상류 협곡에 위치한다. 길기트 발티스탄 지역의 최대 도시로, 인구는 약 3만명이다. 지명은 발티어로 '협곡 분지'란 뜻이다. 인더스와 쉬가르 강의 합류지에 형성된 도시로, 16-19세기 막폰 왕국의 수도였다. 19-20세기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의 지배 하에는 라다크 주의 동계 주도였고, 1948년 카슈미르 전쟁 당시 파키스탄 령이 되었다.

해발 2500m의 고산 지대에 위치하여 여름에도 30도를 잘 넘지 않는 등 쾌적한 기후를 지니고 있고, 까마득한 설산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풍경 덕에 파키스탄의 주요 휴양지이다. 도시 내외에는 카르파초, 카트파나 사막, 카추라 호수, 만토카 폭포 등 관광 자원이 많다. 길기트 발티스탄 중에서도 치안이 안정적이라 관광객이 꽤 왕래한다. 험준한 산중에 위치하여 외부와의 교류는 주로 시가지 서북쪽에 위치한 스카르두 국제공항을 통해 이루어진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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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에 각인된 만탈 부조

일대는 7세기 무렵 송첸감포의 정복으로 토번 제국령이 되었고, 티베트 불교가 전래되었다. 9-10세기 토번 제국이 붕괴하자 발티스탄 지역은 현지 호족들이 다스리다, 12세기 무렵 카슈미르 출신의 튀르크인 이브라힘 샤가 현지 공주와 결혼한 후 막폰 왕국 (དམག་པོན་རྒྱལ་པོ)을 세우며 이슬람이 전래되었다. 14세기에는 카슈미르에 진출해 있던 누르박쉬아 수피 종단이 선교에 나서 발티스탄 주민들은 점차 그와 연관된 쉬아파 이슬람을 수용하였고, 18세기에 이르면 쉬아 이슬람이 주류 종교가 되었다. 다만 길기트와 달리 발티스탄 지역은 인근 라다크와 꾸준히 교류하며 티베트 정체성을 이어나갔다.

2.1. 막폰 왕국의 수도[편집]


1500년 무렵, 막폰 왕국의 11대 군주인 보 카가 새로운 수도로 스카르두를 세웠다. 그는 카슈미르 등지에서 장인들을 들여와 스카르두를 개발하였고, 라다크 왕국과 종종 충돌하였다. 시크교 전승에 따르면 그 창시자인 구루 나나크가 2차 전도 여정 (1510-15년) 중 스카르두를 방문했다고 한다.[1] 1531-32년 카라코람 산맥을 넘어 카슈미르 & 티베트 원정에 나선 야르칸드 칸국의 술탄 사이드 칸이 발티스탄에 당도하자 현지인들은 같은 무슬림인 그를 환영했으나, 독실한 수니파였던 사이드 칸은 주민들이 이단인 쉬아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이후 라다크와 카슈미르 북부를 약탈한 사이드 칸은 1533년 야르칸드로 회군하던 도중 시아첸 빙하 인근에서 고산병으로 사망하였다.[2]

2.1.1. 알리 셰르 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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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후반 막폰 왕국의 왕성으로 세워진 스카르두 성채 (카르포초)

막폰 왕국의 쇠퇴를 틈타 라다크 왕국 (남걀 왕조)은 스카르두에서 동남쪽으로 불과 30km 떨어진 세르미크까지 진출했는데, 1570년대 막폰 국왕 가지 미르는 일대를 수복하였다. 가지 미르의 아들인 알리 셰르 칸은 10대의 나이에도 군대를 이끌고 인더스-수루 강을 따라 반격에 나서 라다크 서부인 카르길까지 점령하였다. 하지만 1580년경 가지 미르는 쉬가르의 번왕인 동생에게 암살되었고, 가지 미르와 왕비와 아들 알리 셰르 칸은 쉬가르에 유폐되었다. 당시 18세였던 알리 셰르 칸은 부왕의 열두 심복과 함께 탈출하여 델리의 무굴 궁정으로 망명하였다. 악바르 대제의 환대를 받은 그는 어느날 사냥 도중 괴력을 발휘하여 사자를 죽였고, 이를 본 악바르는 알리 셰르 칸에게 사촌 귈 하툰을 결혼시켜 인척으로 삼고 군대를 내어주어 왕국을 회복하게 하였다. 1586년 악바르 대제는 카슈미르를 정복하였고, 그를 대동한 알리 셰르 칸은 막폰의 왕으로 등극하였다.[3]

1594년 라다크 국왕 잠양 남걀은 카르길을 공격, (일전에 알리 셰르 칸이 남겨둔) 카르부 성채의 막폰 수비대를 학살하고 일대의 무슬림 영주들을 살해하였다. 잠양 남걀은 기세를 몰아 스카르두로 진격했으나, 도중 눈폭풍을 맞아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다. 이에 알리 셰르 칸은 발티스탄의 영주들을 모아 게릴라 전을 펼치며 라다크 군대를 고립시켰고, 곧 눈으로 협곡의 출구가 모두 막히자 잠양 남걀은 항복하였다. 잠양 남걀을 스카르두로 압송한 알리 셰르 칸은 여세를 몰아 라다크의 수도 를 점령하여 약탈하였다. 다만 라다크 병합은 무리라 여겼기에 곧 스카르두로 회군한 알리 셰르 칸은 잠양 남걀에게 인더스 유역의 가노크 등지를 할양하고 연공을 바치며, 자신의 딸 걀 하툰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그를 석방하였다.[4]

뒤이어 알리 셰르 칸은 라다크 원정을 틈타 후방을 약탈한 길기트 인들에 대한 보복에 나서 (인더스 상류 방면의) 아스토르, 칠라스와 길기트, 훈자를 정복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길기트 강을 따라 서진하여 치트랄과 (현 아프가니스탄 령인) 카피리스탄까지 정복하였다.[5] 카르길도 재차 점령되어 발티 문화가 일대에 전파되었다. 이로써 막폰 왕국은 동서 600km, 남북 300km가 넘는 영토를 지니게 되었고, 구게와 네팔 사이의 푸랑에서도 조공을 받을 정도로 위세를 자랑하였다.[6] 알리 셰르 칸은 1624년 사망할 때까지 막폰 왕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요새의 왕'이란 의미인 카르포초를 대규모로 확장하였고, 인근 사트파르 호수의 보와 카추라 호수 일대의 수로를 축조하여 관개 농업에 활용하였다.[7] 또한 그의 치세에 발티스탄의 전통 축제 중 하나인 슌두르 폴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알리 셰르 칸은 지금도 발티인들의 자긍심으로 남아있다.

2.2. 근현대[편집]


알리 셰르 칸의 사후 막폰 왕국은 라다크의 '사자왕' 셍게 남걀에 밀려 일대의 패권을 잃었고, 무굴 제국의 봉신으로 유지되었다. 1634-36년 아담 칸과 압둘 칸 형제가 왕위를 두고 다투자, 자파르 칸의 무굴 군대가 개입하여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무굴 제국의 쇠퇴기인 1703년, 남쪽의 잠무스리나가르에는 라지푸트계 도그라 왕조가 들어섰다. 도그라 왕조는 1787년 시크 왕국에 복속하였고, 1808년에는 란지트 싱이 카슈미르를 병합하며[8] 일시적으로 멸망했지만 1820년 시크 왕국의 제후로 복구되었다. 1834년 도그라 왕국의 장군 조르와르 싱 카흐루리아[9]은 라다크의 번국인 팀부스가 반란을 일으키며 도움을 청해오자 5천 병력과 나아가 이듬해 봄 라다크 대군을 격파하고 레로 진격하였다.[10]

놀란 라다크 국왕 쩨팔 남걀은 5만 루피의 배상금과 2만 루피의 연공을 조건으로 하는 휴전을 맺었다. 이로써 도그라 왕국이 강성해지자, 그를 경계하게 된 시크측 카슈미르 총독 메한 싱은 라다크 부족들의 반란을 선동했으나 조르와르 싱은 빠른 기동력으로 진압해버렸고 잔스카르마저 복속시켰다. 1836년 메한 싱은 재차 쩨팔 남걀의 반란을 사주했으나, 이번에도 조르와르 싱은 10일만에 행군하여 라다크 군을 격파하고 재차 복속시켰다.[11] 그러던 1839년 막폰 왕국의 라자 아흐마드 샤[12]의 아들 무함마드 샤가 레로 망명하여 라다크-도그라 측에 부친에 대한 반란에 있어 지원을 청하였다. 다만 라다크 귀족들은 그를 체포하여 도그라에 대한 반란에 대한 군사 지원을 대가로 아흐마드 샤에게 넘겼다. 무함마드 샤는 감금되었다.

2.2.1. 막폰-도그라 전쟁[편집]


막폰 군대의 지원에도 라다크의 반란을 진압해낸 조르와르 싱은 1839-40년 겨울, 라다크 출신 보조병과 함께 발티스탄을 침공하였다. 초반에는 나딘 싱의 5천 선발대가 추위와 눈 속에서 길을 잃고 막폰 군에게 포위되어 다수의 동사자가 나오는 등 원정은 실패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조르와르 싱의 부관 메흐타 바스티 람이 선발대와 본대 간의 연락을 회복한 후, 조르와르 싱이 포위 중이던 막폰 군을 습격해 격파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도그라-라다크 군대는 패주하는 막폰 군을 쫓아 스카르두로 나아갔고, 카르파초를 포위하였다. 험준한 성채를 공격할 방법을 궁리하던 조르와르 싱은 산악 전투에 능한 특공대를 조직, 성채 뒤편 절벽을 오르게 하여 그 위의 작은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 다음날부터 요새의 병사들이 성채를 내려다보며 발포하자, 아흐마드 샤는 7천 루피의 연공을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조르와르 싱은 수비대 대부분을 학살한 후 인더스 강변에 요새를 건설하여 주둔군을 배치하였다.[13] 한편 와지르 라크파트의 도그라 별동대가 서진하여 아스토르 성채를 점령, 발티스탄을 평정하였다.[14] 이로써 발티스탄은 라다크와 함께 시크 왕국의 번국인 도그라 왕조의 번국이 되었다. 이후 조르와르 싱은 여세를 몰아 1841년, 불과 4천 병력과 티베트를 침공하여 느가리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이듬해 민사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다만 티베트의 라다크 공격 역시 실패하여 양측은 서로의 영토를 인정하는 화의를 맺었고, 당시 확정된 국경은 이후로도 (조금의 변화 외에는) 인도-중국간 국경으로 굳어졌다.

전후 라다크가 반란을 일으켰고, 발티인들 역시 아흐마드 샤의 주도로 봉기하였다. 도그라 군주 굴랍 싱은 우선 라다크를 진압, 완전 병합한 후 와지르 라크파트를 스카르두로 파견했다. 와지르 라크파트는 카르파초의 문지기를 배반시켜 성채를 기습 점령하였고, 수비대를 학살하였다. 아흐마드 샤는 폐위되었고, 그를 배신한 아들 무함마드 샤가 옹립되었다. 막폰 왕국은 잠무에 연공을 바치고, 성채에 배치된 도그라 수비대의 유지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한편 1842년 라다크를 완전 병합한 도그라 왕국은 1845년 영국-시크 전쟁이 터지자 영국의 편에 서며 시크 왕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같은해 발티스탄을 완전 병합하였다. 이로써 막폰 왕국은 65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멸망하였다.

2.2.2. 잠무 카슈미르령 라다크[편집]


이후 군정이 이어지던 발티스탄은 1851년 민정 총독이 부임하며 안정을 되찾았고, 19세기 후반 라다크 주에 편성되어 그 동계 주도가 되었다.[15] 1880년경 총독 메흐타 만갈은 스카르두에 군사 기지인 랑비르가를 세워 행정 치소이자 거처로 삼았다. 1947년까지 한세기간 이어진 도그라 지배 하에 시크교도 상인들의 이주가 장려되었고, 그들은 주로 쉬가르나 칼푸 등에 정착하였다.

2.2.3. 카슈미르 전쟁[편집]


1947년 인도 분할 후 파키스탄은 파슈툰 민병대를 투입하여 카슈미르에 대한 무력 점령에 나섰다. 그해 11월 길기트 부대가 잠무 카슈미르 번왕국에 반란을 일으켜 파키스탄에 장악하였고, 이들은 곧 스카르두로 남하하였다. 1948년 2월, 6백의 길기트 부대는 카르파초를 포위하였다. 성채 내에는 셰르 중 따파 휘하의 3백여 도그라 수비대가 있었고, 그들은 5월 카르길이 점령되며 완전히 고립된 후로도 계속해서 버텼다. 다만 그해 8월, 식량과 탄약이 모두 바닥난 수비대는 항복하였다. 포위군은 한세기 전의 살육에 대한 복수로 장교들을 제외한 250여 수비대를 학살하였다. 이후 길기트 부대는 라다크로 진격했으나 격퇴되었고, 인도군도 반격에 나서 스카르두 수복을 시도하나 카르길 점령 후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3. 볼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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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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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와 인더스 강 상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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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북쪽에서 넓어지는 인더스 강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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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남쪽의 사트파라 호수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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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파나 사막
스카르두 성채에서 본 카라코룸 산맥

3.1. 스카르두 성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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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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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성채의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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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파나 사막 (일명 차가운 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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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파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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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세워진 쉬가르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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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세워진 스카르두 성채 (카르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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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불교 파키스탄 1.jpg
시가지 남쪽의 만탈 불교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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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가르 강 풍경

4.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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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르두 공항의 활주로

스카르두 공항은 가장 아름다운 공항 중 하나로 평가된다.

비정상회담의 패널 자히드 후세인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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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구루드와라 초타 나나키아나 (아스탄 나나크 피르)가 시크 성지 중 하나이다[2] 한편 티베트 정복에 나섰던 그의 사촌 하이다르는 시가체 인근까지 진출했으나 사이드 칸의 후계자 압둘라쉬드 칸의 명으로 회군했다가 추방된 후 1540년 무굴 황제 후마윤을 도운 대가로 카슈미르의 군주가 되었다[3] 무굴 제국의 사료에서 막폰은 '소 티베트'로 묘사된다.[4] 연공은 라마 유루 곰파 (사원)을 통해 납부되었고, 19세기까지 이어졌다 한다.[5]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그는 치트랄 인근의 브론셸에 치나르 나무 (브로쇼 싱기알)를 심었다 한다[6] 발티인들은 당시의 막폰 '제국'을 레 푸랑 나 브루샬 슁겔 (레의 푸랑에서 브루샬의 치나르 나무까지)라 표현한다[7] 사트파르 호수의 보는 겨울에는 수문을 닫고, 봄에 개방한다. 해당 보는 보수를 거쳐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한다. 카추라의 수로는 스리나가르의 것과 같은 양식으로, 수로에 소형 선박을 띄워 왕래하였다. 또한 카추라 호수는 왕실 여인들의 별장이었다. 수로의 잔해는 기아율 마을에 남아있다 한다.[8] 란지트 싱은 아들 카라크 싱을 봉하였지만, 통치가 불안하자 결국 도그라 왕조를 일시적으로 멸망했지만 곧 라자 지트 싱의 친척 키쇼르 싱을 복위시켰고, 1822년 그 아들인 굴랍 싱이 즉위한다[9] 별명은 무려 인도의 나폴레옹[10] 라다크 장수 반코 카흘론이 도그라 군대 포위하려 하자 우선 카르쩨로 철수해 월동, 1835년 재침하여 카흘론 격파하고 레로 진격한 것[11] 레 외곽에 요새 건설, 델랄 싱 휘하 300인 주둔군 배치. 이때 쩨팔 남걀은 폐위되고 라다크 장수 느고룹 스타진이 국왕에 봉해졌으나 그가 자립을 시도하자 1838년 제거되고 영지로 은퇴했던 쩨팔 남걀이 복위한다[12] 1811년 집권[13] 또한 조르와르 싱은 자신에게 맞선 칭탄의 카를론 라힘 칸을 군중 앞에서 공개 고문하였다.[14] 이때 아스포르 영주 다라드 라자가 생포된다. 다만 그는 카슈미르 총독 메한 싱의 제후였고, 도그라가 라호르 조정 (두르바르)에 이익이 되지 않는 영토 확장을 계속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시크 왕국은 명목상 속국인 도그라 왕조를 압박하여 다라드 라자의 석방을 이끌어낸다[15] 하계 주도는 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