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뱌토슬라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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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프 루스 제 4대 대공
스뱌토슬라프 이고레비치 | Sviatoslav Igorevich


파일:Sviatoslav.jpg

이름
스뱌토슬라프 이고레비치
Sviatoslav Igorevich
고대 동슬라브어 이름
Свѧтославъ Игорєвичь[1]

현대 러시아어 이름
Святослав Игоревич

현대 우크라이나어 이름
Святослав Ігорович[2]

별명
용감공[3]

전임자
이고리 류리코비치
키예프의 올가(섭정)
후임자
야로폴크 1세
생몰년도
942년?[4] ~ 972년
재위
키예프 루스 대공
945년[5]~972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하자르 전쟁
2.3. 불가리아 전쟁
2.4. 동로마 전쟁
2.5. 전쟁, 전쟁, 전쟁 끝에 전장에서 죽다
3. 가족
4. 여담




1. 개요[편집]


키예프 루스 제 4대 대공. 노브고로드 공국의 계보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과 키예프의 올가 사이의 아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너무 어려서 어머니 키예프의 올가에게 약 20년간 섭정을 받은 후 즉위했다. 키예프의 올가가 연 키예프 루스의 전성기를 이어가며 군사적으로 위용을 떨쳤다. 그러나 스뱌토슬라프 전쟁에서 요안니스 1세에게 패한 뒤 귀환하던 중 페체네그인들의 습격으로 전사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스뱌토슬라프 1세는 942년 또는 그보다 좀 전에 키이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과 키예프의 올가였다. 두 사람의 결혼 연도가 정확하게 특정되진 않지만 결혼한 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후 태어난 적자인 것은 확실하다. 특이하게도, 그는 키예프 루스 대공들 중 최초로 슬라브어 이름을 갖고 태어났다. 처음에 근대 역사가들은 그의 이름을 고대 노르드어 스벤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했으나 스뱌토슬라프와 그 파생 이름이 모두 슬라브인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확인되면서 슬라브어 유래라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는 노르드인 류리크 왕조가 어느 정도 슬라브와 동화되었다는 뜻이다. 물론 완전히 동화된 것은 아니다. 어린 그는 어머니 키예프의 올가와 장군 스베날드르[6], 아스문드르[7]에게 교육받았다.

945년, 아버지 이고리 류리코비치 대공이 드레블랴인[8]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하지만 너무 어렸고 어머니 키예프의 올가가 섭정에 올랐다. 그녀는 곧 드레블랴인들에게 대대적 복수극을 벌인 후 전면전을 벌이는데, 전통에 따라 아직 어린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함께 출정했다. 루스 군대가 드레블랴인들과 전장에서 처음 대치했을 때 말을 타고 루스군 앞에 나섰다. 그는 전쟁 개시의 의미로 창을 던졌다. 아직 어려 힘이 없어서 창은 탄 말의 귀를 스쳐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러자 스베날드르와 아스문드르가 군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루스군은 손쉽게 드레블랴인을 격파했고, 드레블랴인은 그들의 수도 이스코로스텐으로 도망쳤다. 그 뒤는 익히 알려진대로 비둘기 방화쇼.

드레블랴인 전쟁 이후 원초 연대기[9]에 의하면 그는 키이우에서 어머니 키예프의 올가와 함께 살았다. 957년에 올가가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할 때 함께 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방문을 기록한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는 스뱌토슬라프를 언급한다. 그는 이고리 류리코비치 생전에 노브고로드[10] 공작에 올랐다고 기록했다. 어머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 키이우로 돌아온 후 키예프의 올가는 끊임없이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했는데, 그녀를 비웃었다고 한다.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이는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 대부분이 북유럽 신화슬라브 신화를 신봉하는 군대가 충성심을 잃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1] 또 다른 설도 있는데 키예프의 올가가 콘스탄티노플에 갔을 때 동로마 제국 공주와 스뱌토슬라프를 결혼시키려고 협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알려져있다시피 포르피로게니토스는 국외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철칙이 깨지기 전이었고, 동로마 제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분노하여 기독교라면 짜증을 냈다는 것이다. 서유럽 쪽의 기록에 의하면 960년 키예프의 올가가 독일 왕국오토 1세교황에게 접근해 기독교 전도를 요구해 오토 1세가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를 보냈는데 아달베르트가 961년키이우에 도착했을 때 올가가 권좌에서 내려가고 이교도가 왕위에 올라 허탕만 치고 왔다고 한다. 이 즈음에 권력을 넘겨받았다는 것과 그가 개종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950년대부터 군사 행동을 맡았고 964년, 대공으로 공식 즉위했다.


2.2. 하자르 전쟁[편집]


그의 치세를 보면 그는 천성이 무골 체질이다.[12] 즉위했음에도 키이우에는 어머니를 내정 담당으로 맡겨 놓은 채 전쟁부터 시작했다. 그가 처음으로 전쟁 상대로 지정한 곳은 하자르 칸국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키예프 루스의 주요한 자금 수입원은 볼가 강 무역로의 관세였는데, 볼가 강 하류를 하자르 칸국이 장악해서 무역로가 통제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하자르 칸국의 수도 이틸[13]이 볼가 강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있었을 정도. 그래서 그는 즉위 직후에 볼가 강으로 가서 그 곳의 슬라브 부족인 브야티치인들을 정벌했다. 브야티치인들이 하자르 칸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이다. 브야티치인들의 땅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후 965년, 하자르 칸국과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했다. 아랍 쪽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에 먼저 볼가 강 중류에서 상인들을 위협하던 볼가 불가르부터 박살냈다고 한다. 볼가 불가르를 혼쭐낸 그대로 볼가 강을 타고 남하하며 하자르 칸국의 도시들을 휩쓸어 버렸다. 트무타라칸, 사만다르와 사르켈이 무너지고 969년에 하자란이 뚫린 뒤 수도 이틸이 무너졌다. 하자르 칸국은 이 전쟁 이후 더 이상 카간국을 칭하지 못 하고 소국으로 전락해 명맥만 간신히 잇게 되었다. 수많은 하자르인들이 죽거나 루스인들에게 사로잡혀 동로마나 아랍에 팔려갔다. 볼가 강 무역로와 강변은 완전한 키예프 루스의 것이 되었다. 사르켈이 있던 터에 신도시 벨라야 베자를 건설한 후 돌아가는 길에 브야티치인들을 다시 공격해 완전히 복종시켰다.


2.3. 불가리아 전쟁[편집]


키예프의 올가 대부터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루스는 이고리 류리코비치까지의 오랜 전쟁을 멈추고 하자르 칸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을 견제하는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967년, 니키포로스 2세는 귀족 칼로키로스를 스뱌토슬라프에게 사절로 보냈다. 금 1만 5천 파운드를 줄 테니 불가리아를 공격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968년 페체네그족을 불러모은 뒤 도합 6만 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가리아로 남하했다. 불가리아군은 두드려 맞다가 도로스톨론에서 루스에게 완패하고 완전히 국력을 상실했다. 노년에 루스군에게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은 불가리아 차르 페터르 1세는 뇌졸중으로 죽어버리고 보리스 2세가 즉위했으나 상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970년에 수도 프레슬라프가 함락당했다. 차르 보리스 2세는 붙잡혔고, 전리품마냥 보리스 2세를 자신 곁에 데리고 다녔다. 불가리아 전역이 루스에게 점령당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은 껍데기만 남아 키예프 루스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2.4. 동로마 전쟁[편집]


키예프 루스가 승기를 잡자 동로마 제국니키포로스 2세는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불가리아 땅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단숨에 이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는 동로마가 약속한 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불가리아 땅에 반해서 이 곳에 살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니키포로스 2세는 페체네그족에게 금을 보내 루스 본토와 키이우를 공격해 줄 것을 부탁했다. 968년, 키예프 전투가 일어나 페체네그족은 단숨에 키이우를 포위했다. 늙은 키예프의 올가가 직접 키이우 방어군의 지휘관으로 나섰다. 상황이 절망적일 때 한 소년이 마치 삼국지의 태사자처럼 꾀를 내어[14]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인근에 주둔 중이던 루스 장군 프리티히에게 올가의 편지를 전했고, 프리티히가 즉시 출병해 포위망의 한 축을 걷어내었다. 포위망이 걷힌 틈을 통해 올가는 스뱌토슬라프에게 급보를 보냈고, 깜짝 놀란 스뱌토슬라프는 최고 속도로 회군해 페체네그족을 무찔렀다. 키이우를 구원한 후 그는 불가리아 땅의 페레야슬라베츠[15]로 천도할 것을 발표했다. 천도 이유는 페레야슬라베츠와 불가리아 땅이 키이우보다 훨씬 풍요로우며 약탈할 대상들도 가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키예프의 올가는 자신이 쇠약한데 가기는 어딜 가냐며 자신이 죽은 뒤에나 천도할 것을 부탁했다. 이에 스뱌토슬라프가 천도를 미뤘는데 이 말을 한 3일 후 올가가 사망했다. 스뱌토슬라프는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본인은 기독교를 싫어했지만 어머니는 기독교식 장례를 치루어 드렸다. 어머니가 죽은 후 스뱌토슬라프는 루스 땅을 그의 아들들에게 분봉해주고 자신은 페레야슬라베츠로 천도했다.

아예 스뱌토슬라프 1세가 불가리아에 수도까지 세워 버리자 동로마 제국은 전쟁을 벌일 결심을 굳혔다. 이후 키이우를 구원하러 돌아갔을 즈음에 니키포로스 2세가 살해당하고 요안니스 1세가 즉위했다. 970년 봄에 불가리아 잔존 세력을 정리하고 일전에 사절로 왔었던 칼로키로스동로마 제국의 황제라고 선포한 후 불가리아인들과 마자르인들까지 동원해 동로마 제국 수도권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트라케가 삽시간에 박살나고 필리포폴리스가 공격당했다. 요안니스 1세는 아나톨리아에서 죽은 아내 마리아의 오빠인 바르다스 스클리로스와 환관 페트루스 포카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바르다스가 이끄는 제국군의 규모는 1만 2천 명 가량이었다.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한 후 적이 다가오자 천천히 퇴각하면서 마치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한편, 그는 요안니스 알라카스 파트리키우스에게 기병대를 맡겨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삼았다. 루스군이 기세를 올려 추격에 나서자, 기병대는 퇴각 속도를 높혔다. 루스군은그들을 추격하다가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제국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 아르카디오폴리스에서 제국군에 둘러싸이자 군대의 대형을 조직한 후 연설을 했다.

우리는 이제 갈 곳이 없고, 좋든 싫든 싸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루스 땅을 욕되게 하지 말고 우리의 뼈를 여기에 두자. 죽은 자는 부끄러움이 없느니라. 하지만 도망친 자는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망치지 않고 굳건히 버텨 싸울 것이다. 내가 너희들보다 앞에 서겠노라. 만약 내가 쓰러져 내 머리가 누워 있다면 나는 신경쓰지 말고 너희 자신부터 신경써라.

루스군과 제국군은 그야말로 대혈투를 펼쳤다. 전투가 어찌나 치열했는지 동로마 제국 측 역사서는 동로마 제국의 승리로, 루스 측 역사서는 루스의 승리로 이 전투의 결과를 기록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동로마 제국이 이 전투에서 이긴 것으로 생각한다. 스뱌토슬라프는 이 전투 이후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포기하고 불가리아로 후퇴했다. 하지만 전쟁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동로마를 위협했다.

이 때 동로마에서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이 일어나서 바르다스 스클리로스는 포카스를 상대하러 아나톨리아로 넘어갔고, 그 대신 요안니스 1세가 친정을 준비했다. 971년, 요안니스 1세는 환관 바실리오스 레카피노스와 함께 5,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엄청난 속도로 산악 지대를 돌파해 4월 13일에 페레야슬라베츠를 기습했다. 루스 수비대 8천 명이 있었으나 깜짝 놀라 성문을 닫지도 못 했다. 바람처럼 페레야슬라베츠 성벽을 돌파한 제국군은 루스인들이 도망친 궁전에다 불을 질러 루스인들을 몰살했다. 보리스 2세도 여기서 제국군에게 잡혔다. 요안니스 1세는 자신을 불가리아의 해방자로 선전했다. 이에 깜짝 놀란 스뱌토슬라프는 페레야슬라베츠로 진군하려 했으나 요안니스 1세가 먼저 움직여 루스군을 몰았다. 이에 인근 도시 도로스톨론으로 들어갔으나 그 곳에서 포위당했다. 4월 23일에 시작된 도로스톨론 포위전은 몇 번의 포위망 돌파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결국 항복하였고 끝이 났다. 양국은 971년 7월 23일, 평화 협상을 맺었다. 평화조약 전문은 내용은 같다.

1. 키예프 루스동로마 제국은 다시 우호 관계를 맺는다.

2. 키예프 루스는 다시는 동로마 제국을 침범하지 않는다.[16]

3. 키예프 루스는 불가리아 지역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4. 키예프 루스는 사로잡은 모든 로마인과 불가리아인 포로들을 송환한다.

5. 키예프 루스는 다시 동로마와의 무역통상을 허가받는다.

사실상 스뱌토슬라프 1세의 패배였다. 스뱌토슬라프와 루스 군대는 불가리아와 루스 국경 즈음에 있는 베레쟌 섬으로 안전하게 퇴각하도록 약속받았다. 스뱌토슬라프의 꿈이었던 불가리아 땅을 잃은 채, 스뱌토슬라프와 루스 군대는 회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5. 전쟁, 전쟁, 전쟁 끝에 전장에서 죽다[편집]


하지만 요안니스 1세는 스뱌토슬라프가 보통 걸물이 아니라고 느꼈다. 야망이 넘치는 대단한 장군인 스뱌토슬라프가 언젠가 다시 동로마를 위협할 것이라 판단한 요안니스 1세는 계략을 꾸몄다. 페체네그족에게 다시 뇌물을 먹여 루스 군대를 기습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페체네그족 카간 쿠랴는 이를 수락했다.

한편, 스뱌토슬라프가 베레쟌 섬으로부터 키이우로 돌아가는 데는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째는 배로 드네프르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고 둘째는 육로로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었다. 오랜 시간을 스뱌토슬라프와 함께 해 온 스베날드르 공작은 대공의 안전을 위해 미리 첩보를 보냈고, 그 결과 수상한 페체네그족들이 드네프르 강 주변에 엄청나게 모여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스베날드르는 이를 대공에게 보고하며 육로로 가자고 제안했으나, 스뱌토슬라프는 드네프르 강으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참을 설득해도 대공이 듣지를 않자, 스베날드르는 스뱌토슬라프에게 허락을 받고 군대를 나누어 육로로 먼저 출발했다. 그 후 스뱌토슬라프는 함대를 꾸려 972년 봄에 드네프르 강에 들어섰다. 하지만 정말로 스베날드르가 말한 것처럼 함대의 양옆 강변에서 페체네그족이 출몰했다. 대공과 루스 군대는 분투했으나 숫자로 보나 지형으로 보나 이길 수가 없는 전투였고, 결국 스뱌토슬라프 1세는 드네프르 강에서 활을 맞아 전사했다. 그를 따르던 루스 군대도 거의 몰살당했다. 쿠랴 카간은 전투 후에 스뱌토슬라프의 시신을 찾아 목을 베고 두개골을 발라내 술잔으로 만들었다고 한다.[17] 다행히 스베날드르가 인솔한 군대는 페체네그족을 만나지 않고 키이우에 도착했다.


3. 가족[편집]


요아킴 연대기에 의하면 아내는 마자르 공주 프레드슬라바였다고 한다. 그리고 노예 출신 첩인 말루샤도 있었다. 말루샤는 첩일 뿐인데도 그녀의 아들이 그 유명한 성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라 그녀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말루샤는 원래 키예프의 올가의 하녀였다. 말루샤의 아버지는 류베치의 말라크라는 사람이다. 저 류베치라는 지명 때문에 말라크에 대한 설이 갈리는데, 독일의 뤼베크 시도 러시아어로 류베치고 드레블랴인 땅의 대도시 중 하나도 류베치이기 때문이다. 류베치가 뤼베크라면 키예프의 올가 시절에 독일 선교단으로 왔던 아달베르트의 수행원으로 추정되고 류베치가 드레블랴인 도시라면 키예프의 올가에게 까불다 죽은 드레블랴인 공작 몰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이 설에 따르면 드레블랴인을 쳐부순 후 공주를 취해서 노예로 삼은 것이다. 현대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는 후자가 더 드라마틱해서 인기 있는 가설이다. 올가의 노예가 된 말루샤는 당대 풍습 상 올가가 기독교로 개종할 때 자의 혹은 올가의 강요로 기독교로 개종했을 것이다. 아버지가 서유럽 사람이라는 설을 채용한다면 원래 기독교도였을 수도 있다. 그런데 스뱌토슬라프가 그녀를 보고 반해서 취해버렸고, 올가는 자기 아들이야 이교도니까 뭐라 못 해도 기독교로 개종한 말루샤가 유부남인 스뱌토슬라프와 간음했다고 생각해 대노했다. 결국 올가 생전에는 스뱌토슬라프가 시골에 숨겨두며 만나다 올가가 죽은 후에 궁정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스뱌토슬라프는 프레드슬라바 혹은 다른 아내나 첩과의 사이에서 야로폴크 1세올레그 스뱌토슬라비치를 낳았고, 말루샤와의 사이에서 블라디미르 1세를 낳았다. 그는 일전에 키예프의 올가 사망 직후 이 세 아들한테 루스 본토를 삼등분해 분봉했다. 야로폴크 1세는 키이우와 루스 남부를, 올레그는 브루치와 옛 드레블랴인의 땅을, 블라디미르는 노브고로드와 루스 북부를 받았다. 스뱌토슬라프 사후에 대공위는 장남 야로폴크 1세에게 돌아갔는데, 대공위에 욕심을 낸 블라디미르가 내전을 일으켜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대공위를 찬탈했다.


4. 여담[편집]


재밌게도 대다수가 생몰년도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는 키예프 루스의 대공들인데 스뱌토슬라프는 외모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다. 해당 기록은 971년 평화협상을 하러 나온 스뱌토슬라프를 본 황궁 집사 레오가 기록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처음 나타날 때 배 위에 앉아 마치 일반 전사 마냥 노를 저었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눈썹은 짙었고 눈동자는 연한 파란색이었으며 코가 뭉툭한 편이었고 콧수염만 있고 턱수염은 없고 윗입술이 두꺼웠다고 한다. 또 머리카락은 거의 빡빡 밀었으나 길다랗게 땋은 굵은 가닥 하나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이것이 귀족의 헤어스타일이었다고 한다. 목덜미가 두껍고 가슴도 넓으며 신체가 전반적으로 탄탄했지만, 그 인상은 음산하고 야성적으로 보였다고 한다. 한쪽 귀에 작은 루비들로 둘러싼 진주가 달린 금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옷은 흰색이었고 모양새는 다른 평범한 전사들과 같았으나 훨씬 깨끗했다고 한다. 상단에 있는 스뱌토슬라프를 표현한 그림이 이 기록에 따라 그린 그림이다. 종합해 보면 중간 키의 음산한 느낌을 주는 미남인데, 현대인들이 북유럽 남자들에 대해 느끼는 인상과 거의 같다. 또 미녀였다는 어머니 키예프의 올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머리와 수염 스타일은 후대에 우크라이나 땅에 나타나는 코사크와 거의 같은 모양이라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현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루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 불리며 존경받는다. 러시아의 팽창주의 정책을 처음으로 내세워 루스의 적 하자르를 쳐부수고 불가리아로 확장한 최초의 대공이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과 발칸 반도에서 전쟁을 벌일 때, 러시아 땅에서 불가리아 일대로 내려가 전쟁을 벌인 선구자로써 많은 연구 대상이 되었으며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과 연극이 쏟아졌다. 1910년엔 러시아 제국이 드네프르 강 입구 콜티치야 섬[18]에 스뱌토슬라프 기념비를 세웠고 소련 때도 키이우, 마리우폴, 자포리자 등 우크라이나 일대에 스뱌토슬라프 기념비를 세웠다. 2005년에 러시아 벨고로드에 세운 하자르 칸국 멸망 1040주년 기념 동상은 논란이 됐는데, 동상이 묘사한 것이 스뱌토슬라프의 하자르 원정이기 때문. 스뱌토슬라프가 하자르인과 다윗의 별을 짓밟고 있는 모양새라 유대인들이 엄청나게 항의했다.[19] 심지어 조각가가 반유대주의자라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한바탕 동상을 부수네 마네 진통을 겪다 유대교 상징을 다 지우고 벨고로드 인근 시골에 세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우크라이나의 축구클럽 디나모 키예프의 팬클럽 엠블럼에 스뱌토슬라프의 초상화가 들어가며 강성 팬들은 스스로를 스뱌토슬라프라 부른다고 한다.

2011년에 우크라이나 어부가 콜티치야 섬 인근 강바닥에서 키예프 루스 시대의 고급 검을 건져냈는데, 이 검이 스뱌토슬라프 본인의 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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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vętoslavŭ Igorevičǐ (스벤토슬라부 이고레비치)[2] 스뱌토슬라우 이호레비치[3] 러시아어로는 Храбрый, 발음은 흐라브릐-[4] 942년 출생이라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나 최근에 다양한 기록이 발굴되며 942년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942년이 아니라고 쳤을 때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받는건 927년.[5] 실질적 통치 시작 시점은 964[6] 당대 키예프 루스의 대귀족으로 바랑인 출신이며 연대기에서 보이보드 칭호로 불린다. 올레그-이고리-올가-스뱌토슬라프-야로폴크 4대 5명의 대공을 모셨다. 드레블랴인과 울리치인 지역의 공작으로 많은 부와 사병을 쌓았고, 올가와 스뱌토슬라프의 오른팔이 되어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결과로 야로폴크 1세 치세에 대공국 최고의 권신에 올랐다.[7] 바랑인 출신 장군, 슬라브어로는 아스무드로 불린다. 스베날드르와 달리 기록으로는 스뱌토슬라프의 공동 교육자였으며 드레블랴인 원정에 동참했다는 것밖에 남아있지 않다.[8] 동슬라브계 민족들 중 하나. 연대기 작가 네스토르는 명성이 높지 않는 슬라브 부족들을 묶어 평지에 사는 이들을 폴랴인, 숲에 사는 인들을 드레블랴인들로 불렀다. 키예프 루스처럼 느슨한 부족 연맹 국가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이며 유물과 유적도 꽤나 남아있다. 민족 자체는 11세기 쯤에 완전히 사라진다.[9] 러시아 고대-중세 역사를 다룬 거의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완벽한 기록. 연대기 작가이자 키예프의 수도자였던 네스토르(1056~1114)가 1113년경에 완성한 연대기이다. 키예프 루스 영토 전역에서 막대한 양의 자료를 수집하여 쓴 연대기로 많은 역사적 사실은 물론 슬라브 전설, 게르만 전설도 많이 담겨 있어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다만 역사와 전설을 섞어 써서 중요한 데서 정확도가 떨어지는 시대적 한계도 있다.[10] 발음 기록이 네모가르드로 되어있다. 노브고로드라는 이름의 원형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11] 훗날 동로마 제국과의 조약문을 봤을 때, 스뱌토슬라프 1세 본인은 슬라브 신화 신도였던 것으로 보인다.[12]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스뱌토슬라프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을 때, 배개 대신 말 안장을 머리에 배고 잤으며, 음식도 소나 말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는 간단한 형태로 해결했고,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도 어떤 전술이나 작전을 짜지 않았고 대신 적들한테 사절단을 보내어 "내가 너희들 앞에 왔다."라고 미리 알렸다고 한다.[13] 오늘날의 러시아 아스트라한.[14] 평소에 페체네그족 언어에 능통한 소년이었는데, 페체네그족으로 변장하고 몰래 나갔다. 페체네그족이 그를 발견하고 누군데 혼자 돌아다니냐고 묻자 말이 도망가서 찾고 있다며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페체네그족은 그냥 그런 줄 알고 신경쓰지 않았는데, 소년은 두리번거리다 별안간 드네프르 강에 뛰어들어 단숨에 강을 건넜다. 이를 발견한 페체네그족이 속은 것을 알고 활을 쏴댔으나 한 대도 맞지 않았다고 한다.[15] 어딘지 정확히 비정이 안 되나 불가리아 수도 프레슬라프가 유력하다.[16] 여기엔 동로마 본토 뿐만 아니라 루스가 일상적으로 약탈하던 크림 반도의 케르손 일대도 포함되었다.[17] 다만 스뱌토슬라프의 용맹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지, 페체네그족들은 잔치를 벌일 때마다 스뱌토슬라프의 두개골로 만든 술잔을 가지고 "앞으로 이렇게 용감한 아들을 갖게 해달라."는 기원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렀다고 전해진다.[18] 마지막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19] 다만, 하자르 칸국은 유대교를 믿었기에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