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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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송우선.jpg

자 / 호
자수(子受) / 세한재(歲寒齋)
본관
야성 송씨[1]
출생
1894년 2월 5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
(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2]
사망
1942년 5월 2일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금연동마을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송규선은 그의 형이며, 1958 도쿄 아시안 게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이창훈은 그의 외손자이다.


2. 생애[편집]


송우선은 1894년 2월 5일 경상도 성주목 유곡방 고산리(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공서마을)에서 아버지 송춘익(宋春翼)과 어머니 김녕 김씨 김석교(金錫敎)[3]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송준필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그는 1919년 3.1 운동의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성주군내의 유력한 유림들인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송우근(宋祐根)·장석영·송훈익·김희규(金熙奎)·송준필·이봉희(李鳳熙)·송회근·송문근·송인집·송천흠 등과 성주면 장날인 4월 2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대가면 옥화동교회의 유진성 목사가 중심이 되어 기독교측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유림들과의 협의하에 공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2일 오후 1시경, 계획적으로 경산동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여 있던 기독교도들이 먼저 성주시장을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시장에서 대기중이던 그는 60여명의 유림들과 함께 3천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일본 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시 후퇴하였으나, 이날 밤 10시경까지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그해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곧 공소를 제기했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공소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옥고의 여독으로 1942년 5월 2일 별세하였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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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숙공파(고산리)-동지공파 31세 선(善) 항렬. 족보명은 송호선(宋祜善).[2] 야성 송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송규선·송문근·송수근·송인집·송준필·송천흠·송회근·송훈익도 이 마을 출신이다.[3] 1456년 단종 복위를 꾀하다 순절한 김문기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