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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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손학익.jpg
성명
손학익(孫鶴翼)
이명
손무석(孫武釋)

일파
본관
경주 손씨#
생몰
1908년 6월 13일[1] ~ 1983년 1월 25일
출생지
경상북도 경주군 강동면 오금리[2]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손학익은 1908년 6월 13일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 강동면 오금리의 평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일찍이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927년 가을 유명술(柳命述)과 함께 방어진에서 생선장수를 가장하고 활동하던 중 신주극(申周極)의 지령을 받아 항일격문을 살포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며칠간 구금되었다. 이후 1928년에는 대구에서 대협(大協)이라는 단체에 가담·활동하던 중 또다시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30년에는 박재기(朴在基)·변기학(卞奇學)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가 그곳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핀 후 흥사단 계열의 반제동맹(反帝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다.

1932년 서울로 돌아온 그는 김중만(金重晩) 등 3명의 동지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자 경남 양산으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던 중 1935년 변기학과 적색노동조합 조직을 함께 협의했다며 경기도경찰부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며칠간 구금되었다.#

파일:손학익.png
1935년 9월 16일, 경기도경찰부 고등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이후 여운형, 김창숙의 지시를 받고 조선건국동맹의 지하조직 결성에 힘쓰는 한편 항일 학생운동에도 관여하다가 체포되어 1945년 2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광복 후 고향인 경주군 강동면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일민구락부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16명의 후보가 난립한 끝에 대한청년당 이협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고향 경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1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손학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3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6월 14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1935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의하면, 경주군 강동면 오금리가 출생지이고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는 본적/주소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