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티프 구엘마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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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학살의 시작과 결과
4. 여파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1945년 프랑스가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알제리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벌인 학살.


2. 배경[편집]


19세기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았다. 프랑스 식민 정부에서 알제리 식민지를 경영하는 과정에서 상당수의 피에 누아르들이 이주하여 비옥한 해안 지대에 식민지를 세우고 정착하는 사이 알제리 현지 아랍인/베르베르인 농민들은 척박하고 건조한 내륙 지대로 밀려났다. 프랑스 식민 당국은 프랑스령 알제리 경영 과정에서 이른바 피에 누아르들만을 우대하고 알제리 현지인들을 기독교나 이슬람 불문하고 이등시민으로 차별하였다. 알제리 현지의 무슬림이나 기독교도들은 피에 누아르에 비해 더 열악한 환경에서 더 높은 비율의 세금을 내야 했으며 피에 누아르들이 거주하던 해안 대도시 지역으로는 거주와 이전 자유가 제한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프랑스 침공 과정에서 점령당했고 자유 프랑스의 5년간의 투쟁 끝에 나치 독일에 맞서 승리했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의 지도부는 연합국에게 항복했고 히틀러가 일으킨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자유 프랑스군에는 알제리 아랍인/베르베르인 출신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프랑스군 소속으로 나치 독일에 맞서 싸웠으며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1]

실제로 프랑스는 알제리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했지만 알제리인들이 약속을 믿었던 것과 다르게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이나 자치권 확대 관련 약속을 무시하였다.

3. 학살의 시작과 결과[편집]


1945년 5월 8일 알제리인들은 프랑스 망명정부가 나치 독일에 맞서 파리를 탈환하는 승리를 거둔 것을 계기로 프랑스 측 역시 약속대로 알제리를 독립시킬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지만 프랑스 당국은 알제리인들의 요구에 무차별 학살로 대응하였다. 5월 8일 대략 5,000명 정도의 무슬림 알제리인들이 세티프에서 전승을 기렸으며 독립을 요구했다.[2] 그러자 프랑스 식민 당국은 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당시 세티프에서 시위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키트비라는 인물의 인터뷰를 보자. 아래의 증언은 2006년 당시 KBS가 뉴스로 보도한 내용이다.[3]

당시 알제리인은 프랑스가 약속한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시위대가 이 지점에 왔을 때 여기 순교자인 이 사람 사이드 무지가 처음으로 알제리 국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부터 참사가 시작됐습니다.


세티프의 시위는 주변으로 확산되었으며 프랑스는 이에 대응하여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세티프 옆에 자리잡은 베냐지의 마을 한가운데에는 추모비가 있는데 그 추모비에는 시위를 벌이다가 프랑스 식민 당국의 발포로 학살당한 400명 이상의 주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심지어 프랑스군은 시위에 참가한 마을 주민들을 산 채로 20m 계곡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알제리인이 프랑스 만세를 외쳐도 가리지 않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프랑스가 먼저 발포하여 알제리인을 학살하자 흥분한 알제리인 시위대가 피에 누아르나 여타 프랑스인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대략 21구의 비알제리인(피에 누아르 혹은 본토 프랑스인) 시체가 프랑스측에 의해 발견되자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육해공군을 동원한 대규모 군사작전에 나섰으며 세티프 시위대 발포로 인한 학살 발발 2일 만인 5월 10일에 군대가 진압 작전에 투입됐다. 당시 프랑스군을 피해 도망쳤던 한 알제리인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그 때 우리는 산으로 달아나기도 했는데 프랑스군은 여기 적힌 많은 사람들, 80살 90살 노인까지 살해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고문하기도 했습니다.


투입된 프랑스군은 항공 공습과 함포 사격도 서슴치 않았다. 프랑스군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알제리인 마을을 초토화했다. 케라타(Kherrata)라는 해안 마을에는 해군 순양함 뒤게-트루앵 함이 함포사격을 하고 내륙의 40개 마을에서는 공군 급강하폭격기가 폭탄을 퍼붓는 대량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 당시 인구 4천 명이 넘었던 마을이 알제리 깃발을 내걸었다고 프랑스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겨우 3명만 살아남은 참사가 벌어졌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이 마을에서 살아남은 3명은 중년 여성 1명, 20대 남성 1명, 어린이 1명이었는데 그들 가운데 어린이는 커서 알제리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고 부모와 형제를 죄다 잃은 이 천인공노할 학살을 절대 잊지 못해 글로 당시 현장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고 한다.

아래는 알제리 전쟁 관련 서적을 집필한 노서경이 쓴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마을에서는 특히 유럽인 민병대가 치밀하게 행동했다. 현장에서 이뤄진 총격사살과 가혹행위는 주로 이들의 소행이었다. 산간과 농촌의 가옥이 불타고 협곡의 댐 17개가 부서지고 케라타의 마을에는 밤낮 포탄이 쏟아졌다. 외인부대는 산골에 흩어진 시체들을 매장하는 데 죄수들을 동원했다. 알제리 성인들은 산으로 도망쳐 없고 아이와 노인만 남은 집에 불을 질렀다. 다양한 폭격기가 날아와 보름간 주민을 상대로 작전을 벌였다. 주민들은 두 손을 들고 프랑스 만세!로 투항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한 외인부대 중령은 바보르, 마우이아, 데앙샤를 돌며 펠라, 마라부트, 카이드에게 일제히 프랑스 국기 앞에 무릎을 끓게 하고 이마를 땅에 처박은 뒤 큰 소리로 우리는 개자식이다! 페르하트 압바스도 개자식이다!를 복창하게 했다. 세티프와 겔마의 탄압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과거 1830년부터 1870년까지 자행된 프랑스의 알제리 침공 못지않게 무시무시한 폭력을 선보였다.

노서경, 『알제리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문학동네, 2017, 313~314쪽.


주로 세티프구엘마에서 프랑스군에 의한 학살이 자행됐다. 프랑스군의 학살 작전은 대략 1달 가까이 전개됐는데 최소 3,000명에서 많게는 4만 5,000명에 달하는 알제리인이 학살당했다. 특히 세티프 지역의 43개 마을에서 학살이 발생했다.

프랑스측 연구에서는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로 보고 있고 알제리 측은 4만 5,000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당시 프랑스측은 처음에는 군의 보고에 의거해 희생자가 1,500명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재에 와서는 6,000에서 8,000명 정도로 늘렸다. 그렇게 해서 최소 3,000명에서 많게는 4만 5,000명이라는 희생자 추정치가 나온 것이다.[4][5] 『냉전의 마녀들』을 집필한 김태우는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알제리여성조합은 1945년 알제리 세티프 지역의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알제리 민간인 대학살 사건 직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수립된 여성단체였다. 나치 독일이 항복했던 1945년 5월 8일, 프랑스군은 알제리 독립을 요구하던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수만 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포딜은 이 대규모 학살에 저항하기 위해 수립된 좌파적 여성단체의 핵심 리더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포딜은 1961년 프랑스 준군사조직인 OAS에 의해 암살될 때까지 오랑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성운동에서 매우 선명한 발자취를 남긴 여성으로 평가된다.”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창비, 2021, 90~91쪽.



4. 여파[편집]


프랑스 측의 기만 행위와 학살은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 맞서 더 가열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특히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찌민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독립운동 세력이 100년 동안 지속되었던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종식시키자 알제리도 이에 큰 영감을 받았다. 1954년에 알제리 전쟁이 시작됐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62년에 132년 동안 이어진 프랑스 식민지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자행한 이런 천인공노할 학살은 그 규모나 잔혹성에 비해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5. 참고 자료[편집]


김태우, 『냉전의 마녀들』, 창비, 2021.
노서경, 『알제리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문학동네, 2017.
https://en.wikipedia.org/wiki/Setif_and_Guelma_massacre
Le cas de Sétif-Kherrata-Guelma (Mai 1945)
'알제리판 과거사 청산'.. 프랑스의 세티프 대학살 사과 요구 <영문기사 + 오디오>
2006년 KBS 뉴스: 끝나지 않은 알제리 독립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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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9년에서 1940년까지 알제리 무슬림 징집자는 12만 3,000명이었고 알제리 유럽인 징집자는 9만 2,000명이었다. 1944년 3월부터 나치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프랑스인들은 마치 자신들만이 승리를 거둔 것마냥 모든 것을 희생한 알제리인들을 무시했다. 노서경, 『알제리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문학동네, 2017, 314~315쪽.[2] 알제나 오랑 대신 세티프에서 시위가 일어난 배경은 당시 알제리인들은 오늘날 알제리의 주요 대도시에 해당하는 알제오랑 등에 체류할 권리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당시 흑인들이 요하네스버그 등 주요 대도시에 체류/거주할 권리가 금지 혹은 제한되었던 사례와 유사했다.[3] 뉴스는 여기서 볼 수 있다.[4] 한국에서 최초로 알제리 전쟁 관련한 단행본을 쓴 노서경은 "연구자들은 대체로 양측의 중간치인 3,000명에서 8,000명으로 보고 있다."고 언급하며 독립 후 알제리 정부가 추산한 4만 명은 과장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영어 위키백과는 학살 수치를 최소 6,000명에서 최대 3만 명으로 표기했다. 또 아래 후술된 것과 같이 김태우는 수만 명이라고 언급했으며 2만 명이라고 서술했다. 관련 연구자 마틴 토머스의 경우 알제리 측 추산이 과장일지는 몰라도 끔찍한 폭력 구조의 결함을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노서경, 『알제리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문학동네, 2017, 315쪽[5] Jean-Pierre Peyroulou라는 프랑스쪽 학자는 여러 자료들을 교차검증해 대략 15,000명에서 2만 명 정도의 알제리인이 이 학살로 희생되었다고 결론지었다. 반면 세티프 구엘마 학살 당시 알제리인에 의해 희생된 유럽인은 102명 정도라고 한다. 관련 자료로는 2008년에 나온 프랑스측 기사도 있다.LE CAS DE SÉTIF-KHERRATA-GUELMA (MAI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