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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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조의 황족. 고조 명황제 석륵의 조카. 석홍이 즉위하고 승상인 석호가 정권을 잡는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다.
초기에 사주(司州)자사에 임명되어, 관중에서 서진의 잔당을 이끌며 할거하던 군벌 이구의 세력과 주로 교전하였다. 이구가 조카 곽송을 보내 양적(陽翟)에 주둔시키자, 석생은 군대를 이끌고 곽송을 여러 번 쳤지만 이길 수 없었다.
광초 3년(320년) 2월, 낙양(洛陽)을 지키던 전조의 홍농(弘農)태수 윤안(尹安), 진위장군 송시(宋始) 등이 후조에 투항하였다. 이에 석생이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낙양을 접수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윤안 등은 후조군이 이르기도 전에 배반하여 이구에게 투항하였다. 하지만 석생의 기병이 먼저 도착해 윤안 등은 석생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곽묵과 함께 낙양으로 향하던 이구는 이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안 등이 또 배반하여 이구에게 다시 항복하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석생은 낙양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송시를 겁박해 황하 이북으로 돌아갔다. 이 틈을 타 하남(河南)의 백성들이 짐을 싸들고 이구에게로 귀순하면서 낙양성이 텅 비고 말았다.
광초 7년(324년) 정월, 석생은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 하남군을 침략했지만 번번이 곽송에게 막혀 얻은 것이 없었다. 분노한 석생은 몸소 4,000여 기병을 거느리고 여러 현들에 약탈을 시도하면서 곽송이 저수에 세워둔 보루를 공격했다. 곽송이 군사를 이끌고 후조군을 요격하자 석생은 패배해 악판(堮阪)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곽송은 용맹한 자 500명을 선발하여 석생을 추격했고 반지고정(磐脂故亭)에서 석생의 군대를 또 대파했다. 겨우 살아남은 석생은 강성(康城)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이때 석륵의 아들 급군내사 석총(石悤)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준 덕에 겨우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광초 8년(325년) 6월, 석생이 주인 없는 낙양을 접수하고, 낙양 거점으로 하남군을 서서히 공략해나가기 시작했다. 이구와 곽묵은 석생의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대부분 패하고 군량도 다하여 결국 전조에 사신을 보내 항복하면서 구원을 청했다. 전조의 황제 유요는 이구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중산왕 유악(劉岳)에게 군사 15,000명을 주어 맹진(孟津)으로 진격케 하고, 진동장군 호연모(呼延謨)로 하여금 형주병과 사주병을 거느려 효산(崤山)에서 이구의 무리와 합류해 낙양을 치게 하였다. 석생은 맹진에서 유악을 요격하였다가 역으로 패하였고, 석량수(石樑戍)로 물러나 다시 맞섰으나 또 패하여 도합 5,000명이 전사하였다.
석생은 전조군에게 쫓겨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으로 들어갔고, 유악은 낙양에 이르러 금용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후조의 중산공 석호가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성고관(成皋關)으로 들어가 금용성을 구원하러 갔다. 석호는 낙양 서쪽에서 유악의 군대와 치열하게 싸웠고, 전조군의 지휘관인 유악이 전투 중 유시에 맞아 부상 입으면서 전조군은 격파당해 석량수로 물러났다.
광초 9년(326년) 4월, 동진의 여남(汝南)을 침공해 여남내사 조제(祖濟)를 사로잡았다.
태화 원년(328년) 8월, 전조의 황제 유요가 친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고후(高候)에서 석호를 공격해 대파하였다. 유요는 승세를 타고 석생이 지키고 있던 금용성을 치는 동시에, 금용성 인근에 위치한 천금알(千金堨)이라는 제방을 무너뜨리고 수군을 나누어 파견해 금군(汲郡)과 하내군(河內郡)을 공략하게 했다. 이때 형양(滎陽)태수 윤구(尹矩)와 야왕(野王)태수 장진(張進) 등이 전조에 투항하면서 후조의 도읍인 양국(襄國)도 크게 동요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2월, 석생이 금용성에서 버티는 동안, 석륵은 수도 안팎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성고(成皋)에서 보•기 87,000명을 모아 쉬지 않고 낙양으로 달려갔다. 한편, 승리에 취해있던 유요는 금용성을 포위하기만 한 채 총신들과 술을 마시고 놀이를 즐기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다가, 석륵이 친정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금용성의 포위를 풀고 후조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지만, 석륵, 석호, 석감의 협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대패하여 사로잡혔다.
태화 2년(329년) 정월, 유요가 사로잡혔다는 보고를 듣고 놀란 전조의 태자 유화와 남양왕 유윤은 수도인 장안을 버리고 상규(上邽)로 도망쳤다. 장안에 남아 수비를 맡은 장수 장영(張英)과 신서(辛恕)가 사자를 보내 후조에 항복하자, 낙양에 있던 석생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장안을 점거하였다.
태화 2년(329년) 8월, 남양왕 유윤이 무리 수만을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하니, 농동(隴東) 예하 여러 군의 이민족과 한족들이 거병하여 유윤에게 호응했다. 유윤은 중교(仲橋)에 주둔해 장안에서 농성하는 석생을 압박하자, 석호는 기병 20,000기를 이끌고 의거(義渠)에서 유윤을 격파하여 장안을 구원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2월, 석륵이 군신들의 권유에 따라 대조천왕(大趙天王), 행 황제사(行皇帝事)를 자칭하였다. 이때 석생은 하동왕(河東王)에 봉해지고, 명을 받들어 관중(關中)을 진수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9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 석강(石羌)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석생에게 격파당해 전량으로 망명했다.
건평 4년(333년) 9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정권을 잡은 승상 석호가 태후 유씨와 팽성왕 석감을 살해하자, 위협을 느낀 장안의 하동왕 석생은 낙양의 무위대장군 석랑(石朗)과 손잡고 석호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였다. 석생은 진주(秦州)자사를 자칭하면서 동진에 사자를 보내 항복하였는데, 석호는 그 사이에 보•기 70,000명을 휘몰아 낙양을 공격하였다. 낙양의 금용성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석생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무위대장군 석랑은 석호에게 붙잡혀 다리가 잘린 뒤에 참수당했다.
반란의 주모자 중 하나인 석랑을 제거한 석호는 곧바로 아들인 양왕 석정(石挺)을 전봉대도독으로 삼아, 심복인 좌장사 유외와 더불어 장안을 치게끔 하였다. 낙양성이 함락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석생은 장수 곽권(郭權)과 선비족 군사 20,000명을 선봉으로 삼아 이를 막게 하고, 대군을 일으켜 포판(蒲阪)에 진을 쳤다. 곽권은 동관(潼關)에서 토벌군을 공격해 석정과 유외를 모두 패사시켰고, 석호는 군대를 민지(澠池)로 물렸다.
선비족이 석호와 몰래 결탁하고 석생을 배반해 포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석생은 곽권이 석정을 무찌른 사실도 모르고 있었기에, 겁에 질려 혼자 장안으로 도망쳤고, 곽권은 남은 병력을 수습해 위예(渭汭)로 퇴각하였다. 이윽고 석생은 장안성까지 버린 채 계두산(雞頭山)에 들어가 숨어버렸고, 석생의 장수 장영만이 장안을 지키다 석호에게 패하여 참수당했다. 장안이 함락되고 오래지 않아 석생은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당해 그 수급이 석호에게 진상되었고, 곽권은 잔당을 인솔해 상규(上邽)로 도망쳐 동진에 투항하였다.
후조의 반역자 石生 | 석생 | |
시호 | 없음 |
작위 | 하동왕(河東王) |
성 | 석(石) |
휘 | 생(生) |
자 | 불명 |
생몰 | ? ~ 333년 9월 |
출신 | 상당군(上黨郡) 무향현(武鄉縣) |
1. 개요[편집]
후조의 황족. 고조 명황제 석륵의 조카. 석홍이 즉위하고 승상인 석호가 정권을 잡는 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했다.
2. 생애[편집]
초기에 사주(司州)자사에 임명되어, 관중에서 서진의 잔당을 이끌며 할거하던 군벌 이구의 세력과 주로 교전하였다. 이구가 조카 곽송을 보내 양적(陽翟)에 주둔시키자, 석생은 군대를 이끌고 곽송을 여러 번 쳤지만 이길 수 없었다.
광초 3년(320년) 2월, 낙양(洛陽)을 지키던 전조의 홍농(弘農)태수 윤안(尹安), 진위장군 송시(宋始) 등이 후조에 투항하였다. 이에 석생이 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낙양을 접수하기 위해 달려갔는데, 윤안 등은 후조군이 이르기도 전에 배반하여 이구에게 투항하였다. 하지만 석생의 기병이 먼저 도착해 윤안 등은 석생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곽묵과 함께 낙양으로 향하던 이구는 이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안 등이 또 배반하여 이구에게 다시 항복하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석생은 낙양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송시를 겁박해 황하 이북으로 돌아갔다. 이 틈을 타 하남(河南)의 백성들이 짐을 싸들고 이구에게로 귀순하면서 낙양성이 텅 비고 말았다.
광초 7년(324년) 정월, 석생은 여러 차례 군대를 보내 하남군을 침략했지만 번번이 곽송에게 막혀 얻은 것이 없었다. 분노한 석생은 몸소 4,000여 기병을 거느리고 여러 현들에 약탈을 시도하면서 곽송이 저수에 세워둔 보루를 공격했다. 곽송이 군사를 이끌고 후조군을 요격하자 석생은 패배해 악판(堮阪)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곽송은 용맹한 자 500명을 선발하여 석생을 추격했고 반지고정(磐脂故亭)에서 석생의 군대를 또 대파했다. 겨우 살아남은 석생은 강성(康城)으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이때 석륵의 아들 급군내사 석총(石悤)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준 덕에 겨우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광초 8년(325년) 6월, 석생이 주인 없는 낙양을 접수하고, 낙양 거점으로 하남군을 서서히 공략해나가기 시작했다. 이구와 곽묵은 석생의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대부분 패하고 군량도 다하여 결국 전조에 사신을 보내 항복하면서 구원을 청했다. 전조의 황제 유요는 이구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중산왕 유악(劉岳)에게 군사 15,000명을 주어 맹진(孟津)으로 진격케 하고, 진동장군 호연모(呼延謨)로 하여금 형주병과 사주병을 거느려 효산(崤山)에서 이구의 무리와 합류해 낙양을 치게 하였다. 석생은 맹진에서 유악을 요격하였다가 역으로 패하였고, 석량수(石樑戍)로 물러나 다시 맞섰으나 또 패하여 도합 5,000명이 전사하였다.
석생은 전조군에게 쫓겨 낙양의 금용성(金墉城)으로 들어갔고, 유악은 낙양에 이르러 금용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후조의 중산공 석호가 보•기 40,000명을 이끌고 성고관(成皋關)으로 들어가 금용성을 구원하러 갔다. 석호는 낙양 서쪽에서 유악의 군대와 치열하게 싸웠고, 전조군의 지휘관인 유악이 전투 중 유시에 맞아 부상 입으면서 전조군은 격파당해 석량수로 물러났다.
광초 9년(326년) 4월, 동진의 여남(汝南)을 침공해 여남내사 조제(祖濟)를 사로잡았다.
태화 원년(328년) 8월, 전조의 황제 유요가 친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고후(高候)에서 석호를 공격해 대파하였다. 유요는 승세를 타고 석생이 지키고 있던 금용성을 치는 동시에, 금용성 인근에 위치한 천금알(千金堨)이라는 제방을 무너뜨리고 수군을 나누어 파견해 금군(汲郡)과 하내군(河內郡)을 공략하게 했다. 이때 형양(滎陽)태수 윤구(尹矩)와 야왕(野王)태수 장진(張進) 등이 전조에 투항하면서 후조의 도읍인 양국(襄國)도 크게 동요하였다.
태화 원년(328년) 12월, 석생이 금용성에서 버티는 동안, 석륵은 수도 안팎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성고(成皋)에서 보•기 87,000명을 모아 쉬지 않고 낙양으로 달려갔다. 한편, 승리에 취해있던 유요는 금용성을 포위하기만 한 채 총신들과 술을 마시고 놀이를 즐기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다가, 석륵이 친정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금용성의 포위를 풀고 후조군과 싸울 준비를 하였지만, 석륵, 석호, 석감의 협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대패하여 사로잡혔다.
태화 2년(329년) 정월, 유요가 사로잡혔다는 보고를 듣고 놀란 전조의 태자 유화와 남양왕 유윤은 수도인 장안을 버리고 상규(上邽)로 도망쳤다. 장안에 남아 수비를 맡은 장수 장영(張英)과 신서(辛恕)가 사자를 보내 후조에 항복하자, 낙양에 있던 석생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장안을 점거하였다.
태화 2년(329년) 8월, 남양왕 유윤이 무리 수만을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하니, 농동(隴東) 예하 여러 군의 이민족과 한족들이 거병하여 유윤에게 호응했다. 유윤은 중교(仲橋)에 주둔해 장안에서 농성하는 석생을 압박하자, 석호는 기병 20,000기를 이끌고 의거(義渠)에서 유윤을 격파하여 장안을 구원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2월, 석륵이 군신들의 권유에 따라 대조천왕(大趙天王), 행 황제사(行皇帝事)를 자칭하였다. 이때 석생은 하동왕(河東王)에 봉해지고, 명을 받들어 관중(關中)을 진수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9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 석강(石羌)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석생에게 격파당해 전량으로 망명했다.
건평 4년(333년) 9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정권을 잡은 승상 석호가 태후 유씨와 팽성왕 석감을 살해하자, 위협을 느낀 장안의 하동왕 석생은 낙양의 무위대장군 석랑(石朗)과 손잡고 석호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거병하였다. 석생은 진주(秦州)자사를 자칭하면서 동진에 사자를 보내 항복하였는데, 석호는 그 사이에 보•기 70,000명을 휘몰아 낙양을 공격하였다. 낙양의 금용성은 순식간에 함락되었고, 석생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던 무위대장군 석랑은 석호에게 붙잡혀 다리가 잘린 뒤에 참수당했다.
반란의 주모자 중 하나인 석랑을 제거한 석호는 곧바로 아들인 양왕 석정(石挺)을 전봉대도독으로 삼아, 심복인 좌장사 유외와 더불어 장안을 치게끔 하였다. 낙양성이 함락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석생은 장수 곽권(郭權)과 선비족 군사 20,000명을 선봉으로 삼아 이를 막게 하고, 대군을 일으켜 포판(蒲阪)에 진을 쳤다. 곽권은 동관(潼關)에서 토벌군을 공격해 석정과 유외를 모두 패사시켰고, 석호는 군대를 민지(澠池)로 물렸다.
선비족이 석호와 몰래 결탁하고 석생을 배반해 포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석생은 곽권이 석정을 무찌른 사실도 모르고 있었기에, 겁에 질려 혼자 장안으로 도망쳤고, 곽권은 남은 병력을 수습해 위예(渭汭)로 퇴각하였다. 이윽고 석생은 장안성까지 버린 채 계두산(雞頭山)에 들어가 숨어버렸고, 석생의 장수 장영만이 장안을 지키다 석호에게 패하여 참수당했다. 장안이 함락되고 오래지 않아 석생은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당해 그 수급이 석호에게 진상되었고, 곽권은 잔당을 인솔해 상규(上邽)로 도망쳐 동진에 투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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