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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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립 배경
2. 설립 당시 교육 이념
3. 연혁
4. 관리


1. 설립 배경[편집]


서울여자대학교는 일제강점기, 6.25 전쟁등의 역사적 배경, 1920년대 기독교 전파 등의 종교적 배경, 여성들의 사회의식 각성 등의 사회적 배경 속에 1961년 4월에 개교하였다.

19세기 기독교가 진취적인 개회파 지식인과 여성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3.1 운동기독교인들이 참여하면서 여성들의 사회의식 각성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다.

이에 3·1운동 직후인 1923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절감한 대한예수교장로회가 12차 총회에서 대학설립을 결의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식민통치의 억압된 상황에서 그 설립이 좌절되었다.

해방과 전쟁 이후 국가와 민족은 해결해야 할 사회, 정치, 문화적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격동의 시기 속에서 특히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여성 고등교육 기관 설립은 절실한 과제 중 하나로 제기되었기에 서울여자대학교 개교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해방 이후 1958년 7월에 재단법인 정의학원이 인가됨에 따라 1960년 12월 서울여자대학이 설립인가를 받게 되어 마침내 1961년 4월에 개교하게 되었다. 민족의 수난기를 거쳐, 설립결의를 한 후 38년이 경과되어서야 개교하게 된 것이다.


2. 설립 당시 교육 이념[편집]


본 대학을 설립할 당시의 직접적인 시대적, 사회적 요구와 초대학장 고황경 박사의 기독교적 교육철학, 지도자적 개척정신이 만나 본 대학 교육이념의 4가지 근간이 되었다.

1. 여성의 사회참여에 대한 시대적 요구
여성에게 개인적 인격도야, 가정에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선도하는 지도자로서의 훈련도 함께 시행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했다.

2. 가치관 혼란과 이에 대한 대처의 필요성
가치관이 전도되고 개인의 출세와 성공만을 위한 이기주의물질주의가 만연한 그 당시 사회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학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갖춘 청년들을 배출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의 역할과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기독교정신을 반영한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이 필요했다.

3. 학문의 실천과 봉사의 필요성
{{{#black 대학에서 학문적 연구는 실천, 응용 그리고 사회적 봉사로 이어질 때 그 결실이 더욱 커진다. 따라서 대학에서도 실천과 봉사의 능력을 배양하는 훈련 과정을 개설할 필요가 있었다.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업사회에서 공동목표를 향해 협동할 수 있는 인재양성이 대학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된 것이다.
다른 대학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생활교육 체제(바롬합숙교육)를 갖추고 개교이래 현재까지 시행하고 있는 것은 배움과 봉사를 실천하는 사회인의 역할을 강조하고 교육적 사명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농촌 발전에 기여할 필요성
{{{#black 설립 당시 한국 전체인구의 약 70%가 농촌인구였기에 농촌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은 한국 국민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전환은 공업과 상업발달을 촉진시켰으나 상대적으로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이에 문화•정신적으로 국민생활의 근본이 되는 농촌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고 농민의 자각과 의욕을 고취시켜 줄 지도자를 배출하는 일이 시급했다.
본 대학 설립초기에 ‘농촌과학과’를 설치하여 학문적 실천을 도모한 것과 4학년 전 학생들에게 방학 중에 1주일 이상 농촌 실습을 의무적으로 매년 시행하여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게 한 것 등은 바로 농촌 사회발전이 곧 국가발전의 요체 라는 기본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본 대학의 이념과 설립자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1]}}}

3. 연혁[편집]


서울여자대학교 역사
1920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2회 총회에서 여자대학설립을 결의, 함태영,김우현, 서상현을 위원으로 임명
1924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3회 총회 여자대학 규칙을 제정하고, 설립인가를 신청했으나 당시 식민지 통치상황에서 그 설립이 좌절
1926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5회 총회 여자대학 설립 재논의
1956
기성회 조직 (회장: 전필순)
1958
재단법인 정의학원(貞義學園) 인가 (초대 이사장 전필순, 초대 학장 고황경)
1960
서울여자대학 설립 인가 (3개 학과[2])
본 대학만의 독특한 교육[3]을 위한 제1생활관 신축

1961
서울여자대학 개교
5월 20일을 개교기념일로 정하고, 교기·교가 및 교표를 제정
공예학과가 인가

1962
한경직 목사가 제2대 이사장에 취임
1963
식품가공학과의 신설 인가
본교의 생활 교육을 위한 수련장인 가정 실습 주택 10동이 준공

1964
재단법인 정의학원을 학교법인으로 조직 변경하여 인가
제2생활관 471평이 준공
농촌발전연구소의 설립 인가를 받음으로써 낙후한 농촌 사회발전에 일익을 담당

1967
대강당 부속건물 준공
영어영문학과 신설 인가, 부설 화랑국민학교[4]의 설립 인가

1968
식품영양학과 인가, 사회학과를 사회사업학과로 학과명 변경 인가
1969
부설 한샘여자중학교의 설립 인가, 교육심리학과 신설 인가
1971
국어국문학과.경영학과가 신설 인가, 제 3 생활관 815평의 준공
1975
김금련씨 제 3 대 이사장에 취임
대강당 준공

1977
여성연구소를 설립[5]
김성섭씨 제 4 대 이사장에 취임

1977
새마을연구소 설립[6]
2부대학(경영학과.공예학과.식품과학과.영어영문학과)의 설립인가를 받음으로써 전일제 수업

1979
대학원(영어영문학과, 교육학과, 가정학과)의 신설 인가를 받음으로써 대학원 중심제 대학이 됨.
국어국문학과, 식품과학과, 농촌과학과, 사회사업학과, 공예학과, 경영학과 등이 석사 과정을 신설
국어국문학과, 농촌과학과, 가정학과, 식품과학과, 교육학과에는 박사 과정도 개설되어 대학원이 계속적으로 확충 발전

1980
불어불문학과, 도서관학과, 산업미술학과가 신설 인가
독어독문학과, 사학과, 경제학과. 아동학과, 영양학과, 화학과, 서양학과, 체육학과 등이 신설 인가
가정학과는 의류학과로 학과명이 변경.
양성담씨 제 5 대 이사장에 취임

1981
체육관, 과학관이 준공. 학생생활연구소를 설립하여 생활교육의 과학화
대학원(임시 도서관) 준공, 제 2 생활관이 교수회관으로 개조

1984
제 2 대 학장 정구영 박사 취임
초대 학장이던 고황경 박사 명예학장으로 추대

1985
이세웅 박사 제 6 대 이사장에 취임}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자연과학연구소 설립
종합교육관 준공

1987
부설 한샘여자중학교를 폐교
생물학과, 수학과의 신설과 석사과정으로 아동학과, 화학과가 개설
취업정보실을 별도로 운영, 학생들의 취업 기회를 확대

1988
제 2 생활관을 기숙사로 변경
대학 법인 제 7 대 이사장으로 안경운 목사가 취임
과학관을 증축하여 자연계열 과학관으로 활용
종합대학교로 개편인가, 초대총장으로 정구영 박사가 취임


4. 관리[편집]


관련한 내용은 서울여자대학교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고, 서울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도 상설전시를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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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농촌 실습은 학교가 주도해서 진행하지 않으며 농촌과학과는 원예생명조경학과로 개편•변경되었다.[2] 사회학과·가정학과·농촌과학과·기독교교육과[3] 바롬인성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여성 교육을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살면서 대학공부를 하는 것이 메리트였다고 한다.[4] 지금의 화랑초등학교이다.[5] 지도적 여성의 배출을 목표로 하는 본교의 창학 이념을 더욱 잘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6] ,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새마을 운동에 발맞추어 연구와 실천에 힘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