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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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결혼
2.3. 스페인의 왕비
2.5. 안타까운 죽음
3. 가족관계
3.1. 자녀




1. 개요[편집]


스페인 보르본 왕조 초대 국왕인 펠리페 5세의 첫 번째 왕비.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이었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1]루이 14세의 조카딸인 안 마리 도를레앙의 차녀이다. 루이스 1세페르난도 6세의 어머니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688년 9월 17일, 사보이아 공국 토리노 토리노 왕궁에서 사보이아 공작이었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3녀로 태어나 훗날 프랑스로 가 도핀이 되는 마리아 아델라이데[2]과 사이와 매우 각별했다고 한다. 그녀의 풀네임은 마리아 루이사 가브리엘라이며, 마리아 루이사나 마리아 루이사 가브리엘라라고 불렸다.


2.2. 결혼[편집]


1701년 11월 2일, 펠리페 5세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 결혼은 펠리페 5세의 할아버지인 루이 14세와 마리아 루이사의 아버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동맹 서약이었다. 피로연을 했는데 절반은 스페인 식에 따라, 절반은 프랑스 식에 따라 준비되었다고 한다.


2.3. 스페인의 왕비[편집]


스페인의 왕비가 된 마리아 루이사는 펠리페 5세와 금슬이 좋았으며, 펠리페 5세는 아내에게 의존을 해서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결혼 직후 프랑스 대사 그라몽 공작은 루이 14세에게 펠리페 5세가 배우자가 있는 한 배우자의 정치개입이 있을 수 있다고 루이 14세에게 보고했고, 루이 14세는 이에 대해 배우자에게 정치를 일임을 하면 안된다고 경고를 날렸다.[3]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어린 나이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성숙했으며 정치적으로 현명하고 근면했다고 전해진다. 마리아 루이사가 남편 대신 섭정을 한적 있었는데 얼마나 뛰어났는지 스페인 국민들에게 인망을 얻었다. 평소 수동적인 성격인 펠리페 5세에게 전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2.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편집]


1702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펠리페 5세는 나폴리에서 싸우기 위해 스페인의 궁정을 떠나야만 했다. 남편이 없는 동안, 14세의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마드리드에서 섭정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모든 불만 사항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그녀에게 직접 보내도록 명령하고, 장관들과 몇 시간 동안 정무를 봤다. 그녀는 대사들에게 알현을 하고 사보이아가 적에 가담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곧 실패했다. 그러나 마리아 루이사는 성공적으로 군사정권의 재편과 전쟁 노력에 대한 몇몇 귀족들과 도시들의 상당한 금전적 기부를 장려했다고 한다. 1715년 남편 펠리페 5세는 결국 스페인의 왕으로 인정받고 식민지 소유의 대부분을 유지했지만 이탈리아의 영토를 할양하고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 했다.


2.5. 안타까운 죽음[편집]


마리아 루이사 왕비는 1703년 장남 루이스 1세를 출산 할 당시 결핵에 걸렸는데, 결국 만성으로 고생해 땀샘이 부풀어 올라 피부 밑에 덩어리가 생겼다고 한다. 또한 두통이 있었는데 의사들은 머리카락을 깎아야 두통이 사라진다고 판단해 그녀도 머리카락을 잘랐으나 더이상 자라지 않아 가발을 착용해야 했다. 1714년 2월 14일, 림프절 결핵으로 향년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루이사의 유해는 엘 에스코리알에 안장되어 있다. 남편 펠리페 5세는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하며, 사후에 파르마 공국의 공녀인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와 재혼한다.


3. 가족관계[편집]



3.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루이스 1세
(Louis I)
1707년 8월 25일
1724년 8월 31일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
2남
펠리페 페드로 왕자
(Infante Philip Peter)
1712년 6월 7일
1719년 12월 29일

3남
페르난도 6세
(Ferdinand VI)
1713년 9월 23일
1759년 8월 10일
포르투갈의 바르바라

남편 펠리페 5세 사이의 슬하 3남을 두었지만 애석하게도 차남 펠리페 페드로는 어려서 요절, 루이스 1세와 페르난도 6세의 경우 각각 배우자가 있지만 루이스 1세는 천연두로 사망, 페르난도 6세는 슬하 사산된 아들이후 평생 자녀가 없어서 즉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후손들은 끊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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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훗날 마리아 루이사의 사후 사르데냐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된다.[2] 루이 15세의 어머니이다.[3] 이를 걱정한 루이 14세의 선견지명이 옳았는데,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사후 계비로 들여진 엘리사베타 파르네세는 당시 부적절한 정치개입을 했으며 펠리페 5세의 전처이자 본인인 마리아 루이사의 자녀들인 루이스 1세와 페르난도 6세에게 핍박을 해 스페인 사람들에게 욕을 거하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