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하네만

덤프버전 :

파일:Wilhelm Hahnemann.jpg
이름
빌헬름 하네만
(Wilhelm Hahnemann)
생년월일
1914년 4월 14일
사망년월일
1991년 8월 23일 (향년 77세)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출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포지션
포워드
신체조건
172cm | 71kg
소속팀
SK 아드미라 빈 (1931-1941)
SC 바커 빈 (1945-1952)
국가대표
9경기 2골 (오스트리아 / 1935-1937)
23경기 16골 (독일 / 1938-1941)
14경기 2골 (오스트리아 / 1946-1948)
감독
피르스트 비에나 FC (1952-1953)
SpVgg 그로이터 퓌르트 (1953-1955)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55-1958)
FC 빌비엔 (1958-1959)
SC 바커 빈 (1959-1960)
FC 빌비엔 (1961)
FC 바커 인스브루크 (1962)
빈 AC (1968-1970)
FV 비베라흐 (1970-1971)



1. 개요
2. 생애[1]
2.1. 선수 생활
2.2. 감독
2.3.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선수
5.1.1. 클럽
5.1.2. 개인
5.2. 감독



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2][편집]



2.1. 선수 생활[편집]



2.1.1. 클럽[편집]


도나우펠트(Donaufeld) 클럽에서 유스 시절을 보낸 하네만은 1931년부터 아드미라 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하네만은 데뷔하면서부터 토니 샬 등과 호흡을 맞추며 아드미라 빈의 공격진에 녹아들어갔다.

1934년 ÖFB컵 결승전에서 아드미라는 SK 라피트 빈을 8대0으로 대파하며 우승컵을 들었는데 하네만은 이 경기에서 토니 샬과 더불어 해트 트릭을 기록했다. 아드미라는 하네만의 입단 시즌에 이어 두 번째 더블의 업적을 달성했고 이 해의 미트로파 컵에서도 하네만은 좋은 활약을 펼치며 아드미라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1935-36 시즌에 23골을 넣은 하네만은 오스트리아 1부 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이는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한 리그 득점왕 기록이다.

하지만 하네만의 커리어 역시 안슐루스제2차 세계 대전으로 부침을 겪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야 다시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다. 1945년, 하네만은 SC 바커 빈으로 팀을 옮겼고 1946-47 시즌에 바커 빈은 더블을 기록했다. 이는 하네만의 클럽 커리어에서 세번째 더블이다.

하네만은 바커빈에서 7년간 선수 생활을 더 했다.


2.1.2. 국가대표[편집]



2.1.2.1. 오스트리아[편집]

1933-34년에 아드미라 빈이 거둔 성공은 아드미라의 주축 선수 중 하나인 하네만의 분더팀의 데뷔로 이어졌다.

그러나 하네만이 실제 오스트리아 대표팀 데뷔 경기를 치르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고 1935년 5월 12일에 있었던 폴란드전에서 하네만은 3대0으로 달아나는 득점을 기록했다.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5대2로 꺾었다.

하네만은 이후 오스트리아 대표팀에서 자리를 잡았고 주축 선수 중 하나가 되었다. 비록 하네만이 직접 라트비아와의 1938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 출전하진 않았지만 오스트리아는 2대1로 역전승을 거두며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2.1.2.2. 독일[편집]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오스트리아는 사라져버렸다. 이에 FIFA는 오스트리아에 밀려 떨어졌던 라트비아를 오스트리아 대신 본선에 초청하려 했지만 라트비아가 참가를 거부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와 맞붙을 예정이었던 스웨덴부전승으로 8강에 진출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뛰려면 독일 대표팀 소속으로 참가하는 방법밖에 없었고 하네만은 독일 대표팀의 일원으로 월드컵에 참가했다.

독일의 감독 헤르베르거는 하네만을 중용해서 개막전재경기에 모두 하네만을 기용했다. 하네만은 재경기에서 선제골을 기록했지만 독일은 결국 스위스에 패배, 탈락했다.

월드컵 이후에도 하네만은 독일의 주요 선수 중 하나로 남았고 1940년 9월 1일에 있었던 핀란드전에서 그는 6골을 집어넣었다. 하네만의 6골은 1912년 올림픽 제정 러시아전에서 나온 고트프리트 푹스(Gottfried Fuchs)의 10골에 이은 독일 대표팀 단일경기 최다 득점 2위 기록이고 이 경기에서 독일은 핀란드를 13대0으로 대파했다.

1941년까지 하네만은 독일 대표팀 소속으로 23경기에 출전, 16골을 넣었다.


2.1.2.3. 오스트리아[편집]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오스트리아연합군의 군정 체제이긴 하지만 독립하게 되었다.

비록 하네만은 독립 후 바로 대표팀 1946년 4월 14일에 있었던 헝가리전을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에 3대2로 승리를 거뒀다.

하네만은 1948년 올림픽에 오스트리아 대표팀으로 출전했지만 오스트리아는 1라운드에서 이 대회의 우승팀이 될 스웨덴에 0대3으로 셧아웃당했다. 이 경기가 하네만의 대표팀 은퇴 경기가 되었다.


2.2. 감독[편집]


1952년에 SC 바커 빈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하네만은 바로 피르스트 비에나 FC의 감독이 되었고 이 해의 피르스트는 오스트리아 1부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쳤다.

한스 크라우스(Hans Krauß)를 대신해 SpVgg 그로이터 퓌르트에서 2년을 보낸 하네만은 1955년, 스위스의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로 건너갔고 재임 3년 중 첫 시즌에 그라스호퍼의 더블을 이끌었다.

1958년, FC 빌비엔(FC Biel-Bienne)에서의 1년은 간발의 차로 나티오날리가 A 승격에 실패한 아쉬운 한 해였다. 이 때 위기에 빠진 친정팀 SC 바커 빈이 하네만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하네만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잠시 선수 부족으로 45세의 하네만이 선수로 뛴 경기도 있었는데 그는 결승골을 넣어 바커 빈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에 하네만은 FC 바커 인스브루크, 비너 AC (1968-1970), FV 비베라흐 등에서 감독직을 역임했다.


2.3. 이후[편집]


하네만은 축구계에서 물러난 후에도 테니스 코치로 재직하면서 스포츠를 즐겼다. 1991년, 하네만은 테니스 코트에서 쓰러져 영면에 들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하네만은 좋은 기술과 헤더 능력을 갖춘 지능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공격수로 평가받았다.


4. 뒷이야기[편집]


  • 하네만의 피부색으로 인해 그의 별명은 집시였다.
  • 1943년에 하네만은 SK 슬라비아 프라하의 초청 선수로 한 경기를 뛴 적이 있었다. SK 우호니체(SK Uhonice)를 상대로 슬라비하 프라하는 하네만이 9골, 비찬이 8골을 넣어 20대1로 우호니체를 압살했다.


5. 수상[편집]



5.1. 선수[편집]



5.1.1. 클럽[편집]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6회: 1931-32, 1933-34, 1935-36, 1936-37, 1938-39(이상 아드미라 빈), 1946-47(SC 바커 빈)
  • ÖFB컵 우승 3회: 1931-32, 1933-34(이상 아드미라 빈), 1946-47(SC 바커 빈)
  • 가우리가 오스트마르크 우승 1회: 1938-39(아드미라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3회: 1934-35(아드미라 빈), 1947-48, 1950-51(이상 SC 바커 빈)
  • 독일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9(아드미라 빈)
  • 미트로파 컵 준우승 2회: 1934(아드미라 빈), 1951(SC 바커 빈)


5.1.2. 개인[편집]




5.2. 감독[편집]


  • 나티오날리가 A 우승 1회: 1955-56(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컵 우승 1회: 1955-56(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나티오날리가 A 준우승 2회: 1956-57, 1957-58(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 스위스 컵 준우승 1회: 1957-58(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 1960-61(FC 빌비엔)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0-16 21:45:41에 나무위키 빌헬름 하네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