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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扶餘絲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참조문헌


1. 개요[편집]


부여풍의 아들. 정가왕 전승이 기록된 일본 마키도 신사[1] 측 문헌인 비목대명신본록기(比木大明神本縁起)에서만 등장한다.


2. 생애[편집]


18세기 중반 작성된 비목대명신본록기에 의하면, 백촌강 전투부여풍고구려로 도망가자 부여사는 일본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그는 '세상의 원수'가 되어 핍박받고 영락(零落)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서기에는 기록되지 않았고 본록기(本縁起)에만 기록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3. 기타[편집]


王子豐璋及妻子 與其叔父忠勝等 其正發遣之時 見于七年 或本云 天皇 立豐璋爲王 立塞上爲輔 而以禮發遣焉

왕자 豐璋 및 처자와 그 숙부 충승(忠勝) 등을 보냈다. 그들이 떠난 때는 7년조에 보인다. 어떤 책에는 “천황이 풍장(豐璋)을 세워 왕을 삼았으며 새상(塞上)을 세워 보(輔)로 삼고, 예를 갖추어 떠나보냈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권 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 660년 10월 기사의 주석


  • 일본서기 주석에서 부여풍의 처자가 언급된 걸 보면 부여풍도 자손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해당 인물이 부여사인지는 알 수 없다.
  • 해당 문헌에서 부여풍의 아들로 전해진 부여사가 정가왕, 복지왕 전승에 뒤이어 언급되는 점 때문에 부여풍이 이들과 연관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2]


4. 참조문헌[편집]


日本 宮崎縣 南鄕村 神門神社의 百濟王傳說과 緋緞墨書, 박찬규, 고구려발해연구 3, 1997.6, 20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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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슈 미야자키현 남향촌에 위치한 신사다.[2] 실제로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 이전까지 일본에서 장기간 체류했었고, 형제인 부여용(扶餘勇)은 일본에 남아서 고구려에 망명했던 풍왕과 내응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