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윤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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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금성 범씨
출생
1891년 4월 14일
전라도 광주목 우치면 생용리
(현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1]
사망
1958년 5월 10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범윤두는 1891년 4월 14일 전라도 광주목 우치면 생용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에서 태어났다.

대서소 직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19년 3월 10일 광주의 작은 장날을 이용하여 김강(金剛)·김철(金鐵)·최병준·최한영(崔漢泳)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 광주는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 도쿄 유학생인 정광호가 귀국하여 동경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 거사 사실을 청년들에게 알려, 2.8독립선언서를 최한영·김복수(金福洙)등이 등사하여 두는 등 일찍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한편,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에 참례하기 위하여 상경했다가 경성부의 만세시위를 목격했던 김철과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崔正斗)가 3월 5일 귀향하여 이날 밤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최병준·최한영·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奉)·한길상(韓吉祥)·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奎)·서정희·김태열(金泰烈)·홍승애(洪承愛)·손인식·송흥진 등과 만나 경성부의 독립만세시위 정황을 전하고,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 학교 학생 및 시민들의 시위참가 연락 등 사전준비를 분담하여 추진하였다. 범윤두는 이때 최한영·최정두·한길상·김용규 등과 함께 선언서와 태극기의 준비를 맡았다.

그러나 준비기일이 너무 짧아서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거사 계획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인쇄하였다.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 등 1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범윤두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며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만세시위를 계속할 때 일본헌병·경찰은 시위군중의 기세에 눌려 시위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시위군중이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에 이르자 많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출동하여 김철 등의 주동자를 연행해 가는 것을 보고 그는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일단 피신하였다가 2차 독립만세시위를 위하여 3월 17·18 이틀에 걸쳐 송정면 선암리(현 광산구 선암동)에 있는 박경주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경고문 각 1,500여매와 독립가(獨立歌) 500여매를 등사하여 목포 등 인근 지역에 배포하는 등 계속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수배를 받고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열려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장기간에 걸쳐 고통스런 피신생활을 하다가 1933년경에 붙잡혀 투옥된 기록이 보인다.수형인명부1-1933년 6월 6일수형인명부2-1933년 9월 15일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8년 5월 10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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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성 범씨 집성촌이다. 범택균 전 전라남도 광주시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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