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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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도
1.1. 공동체의 수호자
1.2. 전문 군인
1.3. 용감한 군인
1.4. 무고한 살인자
1.5. 근대 지식인들의 편견
2. 행정
2.1. 전비
2.2. 군사 모집
2.3. 보급
3. 전략
3.1. 첩보
3.2. 전략 회의
3.3. 1기 (1337~1360)
3.4. 2기 (1360~1389)
3.5. 3기 (1415~1431)
3.6. 4기 (1432~1453)
4. 전술
4.1. 공성전
4.2. 습격전
4.3. 야전
5. 개인 전투
5.1. 기병
5.2. 보병
5.3. 궁병
6. 무장
6.1. 1기 (1337~1360)
6.2. 2기 (1360~1389)
6.3. 장기 휴전 (1389~1415)
6.4. 3기 (1415~1431)
6.5. 4기 (1432~1453)



1. 기사도[편집]



1.1. 공동체의 수호자[편집]


기사 신분은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고귀한 혈통을 가졌기에 기사가 된 것이 아님을 이해하라.

모든 사람은 한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질투와 탐욕이 자라나고,

무력이 정의를 억누르기 시작했을 때도,

모든 사람들의 집안과 신분은 동일했다.

하지만 약자들이 더 이상 강자들에게 저항할 수 없게 되자,

공동체는 약한 사람들과 온순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한 사람들의 범죄와 잔학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수호자 계급을 만들었고,

자신들 가운데 가장 평판이 좋은 사람들을 선출했다.

그들은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민첩하고, 충실하고, 용맹하며,

정신과 육체가 모두 우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기사 신분은 장난삼아 헛되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지워졌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가?

최초로 기사 신분이 만들어졌을 때,

기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선거에 의해 그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비열하고 잔혹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관대하고, 예의 바르고, 친절할 것을 맹세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우며,

강도와 살인자들을 무찌를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을 요구받았다.

작자미상, '랑슬로', (c.1200)


비록 현대에는 여러 신분들이 있지만,

태초에 모든 인간은 똑같은 자유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우리 모두가 한쌍의 남자와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지나친 자만심과 질투로 인해 원한과 전쟁이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한다면 평화롭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 가운데서 왕을 선출해서 군주로 삼았다. 그리고 법을 만들고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를 처벌할 권력을 주었다.

또한 왕이 공동체의 적들과 사악한 관료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자신들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강하고, 현명한 자들을 선출해서 봉신으로서 왕을 도우며 평화를 지키는 영주들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귀족이라고 불리는 신분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Beaumanoir, 'Coutumes de Beauvaisis', (1283), 45장 1453절


이러한 이유로 가장 훌륭하고 가장 고귀한 기사 신분이 형성되었다. 이는 전쟁의 위험으로 항상 가장 큰 피해를 입는 보통 사람들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키며, 방어하기 위함이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서문



1.2. 전문 군인[편집]


농사 기술을 익힌 농민과 상업 기술을 익힌 상인처럼, 기사는 전쟁 기술을 익힌 군사 전문가다.

전쟁 기술은 교묘함과 교활함의 예술이다. 따라서 초보자는 그 예술을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단계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전쟁 기술에서의 우수성과 명예는 행운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경력보다 더 확실하고 더 큰 성공을 약속한다.

물론 나는 다른 직업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기술은 잘 훈련된 사람에 의해 추구될 때 큰 성공을 제공한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서문


계략과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은 기사도와 완전히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심지어 칭찬 할만한 것으로도 간주되었다. 중요한 것은 중용이었다. 도를 넘게 비겁한 짓을 하고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망신을 당할 수 있었다.

매우 영리하고 교활한 사람인 크라토르의 대장은 공포에 질린 척하며 자신의 병사들을 급히 불렀고, 몇몇 기병들에게 마치 통제 불능인 것처럼 멀리 도망치도록 했다.

그것은 에스칼롱의 주둔군을 더욱 공격적으로 만들었고, 그들은 크라토르의 대장이 이미 전의를 잃었다고 여기며 공격하기 위해 나왔다. 그들은 그가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하며 그를 추격했고, 대장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치는 척 돌아서 달렸다.

그래서 에스칼롱의 병사들은 교활한 대장을 점점 더 급하게 추격했고, 대장은 복병을 부를 적절한 순간을 판단해 신호 나팔을 불었다. 그것은 주벵셀과 로케통 경과 합의된 신호였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2권 7장



1.3. 용감한 군인[편집]


강한 힘과 공격성보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다.

언젠가 이방 민족의 족장들은 전장에서 앞장서서 싸울 전사를 선발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석공, 목수, 대장장이 같은 수공업자들을 전장으로 보내자. 그들은 강하게 후려치는 일에 익숙하며, 거대한 바위를 부수고, 굵은 나무를 쪼개고, 단단한 쇠를 두드려서 부드럽게 만드는 자들이다. 그들을 전열 앞에 세워서 강하게 내지르고 후려치게 하면 우리의 적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수공업자들에게 좋은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채 싸움터로 보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행군 도중 지쳐 쓰러졌고, 또 일부는 겁에 질려 도망쳤고, 남은 이들 역시 두려움 때문에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수공업자들의 군대는 전투에서 패배했다.

족장들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번에는 도살업자들을 장수로 삼았다. 도살업자들은 강한 산짐승과 거대한 황소를 도축하며, 잔혹하고 무자비하고 피를 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족장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적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후려쳐서 지난 일의 복수를 완수할 것이다."

그들은 도살업자들에게 좋은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 채 전열 앞에 세웠다. 하지만 도살업자들 역시 용기를 잃고 도망가버렸고, 족장들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다음번 전투에서 족장들은 높은 곳에 하인들을 보내서 전장을 관찰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며 강하게 후려치는 용사들을 찾아오게 시켰다.

전투가 끝났을 때 족장들은 용사들을 불러모았고, 모두에게 전공에 걸맞은 칭찬과 명예를 주었다. 그리고 그들을 군대로 편성하면서, 무기와 갑옷을 정비하고 말을 돌보는 것 외에는 관심 갖지 말고, 군인으로서의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들을 위해 세금이 징수되기 시작했고, 이 제도가 아주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이 곧 입증되었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고, '의인(義人: good man)들'이라고 불렀다. 의인들은 자기 일에만 전념하며 그 일에 능숙해졌다.

의인들 중 한 명이 전장에서 싸우다 전사했을 때는 동료들이 다 함께 애도하고, 죽은 이의 자식들을 거두어서 훌륭하게 길렀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의 어머니에게 원래 그들의 아버지에게 속했던 특권과 다른 모든 것을 돌려주어 죽은 아버지와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게 했다.

훗날 그들은 '의인의 아들', 또는 '좋은 집안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반면에 불명예를 안거나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누구의 아들도 아닌 자'라고 불렸다.

의인으로 선택된 자들은 소수였고, 이들은 전장에 나갈 때면 각자 열 명의 병사를 맡았다. 이들은 부하들이 더 잘 싸울 수 있도록 이끌었고, 실제로 한 명의 의인의 용기와 지휘 덕에 전투에서 승리하거나 요충지를 방어하거나 점령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의인 열 명을 이끄는 대장도 있었고, 이들은 백 명의 대장이었기에 백인대장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백인대장 열 명의 대장으로 선출된 사람도 있었으며 밀레스 또는 기사라고 불렸다. 그리고 60명의 백인대장과 600명의 의인과 6,000명의 병사를 이끄는 자는 공작이라고 불렸다.

구티에레 디아즈 데 가메스, '페로 니뇨의 연대기' (c.1448)


대담함 없이는 어떠한 작전도 시작될 수 없다.

적이 요새처럼 좁은 지형에 배치돼 있다 해도 공격하고 싶어지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본능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격이 잘 계획되고 침착하게 진행될 경우 합리적인 판단이다.

전쟁에서는 대담함(필수적이다. 대담함 없이는 어떠한 작전도 시작될 수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위기 속에서의 냉정함, 그리고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전투 전에 미리 예측하는 능력이다. 전투의 열기 속에서는 생각을 정리할 여유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한 지휘관은 가능한 모든 문제들을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 그래야 위급할 때 열정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열정적인 대응의 기반에는, 전투 전 미리 생각한 정교한 전술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열정적인 대응은 차가운 성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2권 11장


귀족은 곧 '싸우는 자'이다.

하지만 진정한 용기는 전장에서의 행동으로 측정된다. 군인이 군인을 대면할 때, 누가 더 대담한지 즉시 명백해진다. 군인이 군인을 대면할 때, 그것은 이기거나 죽는 문제이다. 그것이 그러한 상황에서 용감하게 행동하고, 굳건하게 서 있는 결심을 칭찬할 수 있는 이유다. 그렇게 하는 자들은, 그들의 신분이 무엇이든, 그들이 비난받을 일이 없고 그들의 행적에 흠결없다면 항상 기사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은 당신 앞에 있는 능숙한 중장병을 보고, 당신과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서로에게 가할 타격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전투가 명예와 용기의 최고의 척도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며, 그곳에서 귀족의 혈통이 아닌 사람도 귀족으로서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2권 22장



1.4. 무고한 살인자[편집]


민간인 학살은 비극이지만, 그 살인의 책임은 부당하게 전쟁을 일으킨 위정자들에게 있다.

왕세자가 지나갈 때 주민들이 무릎꿇은 채 '자비를, 고귀하신 전하, 자비를' 이라고 외치며 울부짖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는 너무 분노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침략자들은 아무도 그들의 호소를 듣지 않으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람을 칼로 찔렀다. 이 사람들은 도시의 반역과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실제로 책임이 있었던 큰 인물들보다 더 큰 대가를 치렀다. 그날 리모주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의 이름을 기억했다면, 거기에서 일어난 비극에 대해 울지 않았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프루아사르, '프루아사르의 연대기', (c.1400)


전쟁과 살인은 나쁜 것이지만, 정당한 이유로 시작한 전쟁과 전쟁의 관습에 따른 살인은 무고하다.

세상이 시작되었을 때,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신 후, 자연의 질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쟁이 그 평화를 깨뜨렸다. 자연적인 동맹이자 형제인 카인과 아벨 사이에 말이다.

그리고 창세기의 두 번째 장에서 설명하듯이, 그 전쟁은 시기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창세기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의 탄생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나고 촉발되며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널리 퍼지고, 세대가 성장하고 번성함에 따라 배가되었다.

이에 따라 세상 모든 곳에 불화와 분쟁이 생겨났다. 어떤 곳에서는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동안 다른 곳에서 재발하며 장기화된 전쟁으로 균형을 맞춘다.

전쟁은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 물론, 부당하게 전쟁을 선포하는 사람은 악하다고 말해야 하지만, 정당한 이유로 전쟁을 시작하는 경우는 비난받을 수 없다.

장 드 뷔에이, '르 주벵셀', (c.1466). 서문



1.5. 근대 지식인들의 편견[편집]


1919년에 출간된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은 기사도를 소수 귀족들을 위한 퇴폐적인 가식, 잔인하고 짧은 삶에서 위안을 얻기 위한 공상과 허례 허식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했다.

중세 끝 무렵 문명은 이 시각으로 다가가야 하는 문화이다. 이상적으로 꾸며진 귀족계급의 삶, 그 삶을 비추는 기사도의 낭만적인 인공조명, '원탁의 기사' 이야기로 모습을 바꾼 세계까지, 삶에 있어서 양식과 현실 사이의 긴장감은 격렬하다. 빛은 모조품으로 번쩍거린다.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


역사학자들이 19세기의 편견에서 벗어나 중세 전쟁의 현실과 기사 계층과 기사도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80년대부터였다. 하위징아가 단정한 것과 달리 기사도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고, 소수 귀족뿐 아니라 사회 각층에서 진지하게 수용되었다. 당대의 많은 작가들이 기사도의 이상이 현실에 적용될 때의 모순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해결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리는 중세 세속 귀족 계층의 중심 이념인 기사도가 받은 조롱과 같은, 무지에 바탕을 둔 비판을 경계해야 한다.

한때 위선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이제 우리는 기사도적 이상이 당대인들 사이에서 순수하게 수용되었으며 전사들의 훈련과 동기부여, 그리고 사회적 응집력의 원천으로서 유용한 기능을 제공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비록 그러한 이해가 우리를 과거의 이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존경으로 이끌거나, 현대의 삶에 부활시키려는 운동으로 이끌어서는 안 되지만, 그것은 낯선 사고방식들을 무지에 근거해 배척하는 실수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Christopher Dyer, 'Standards of Living in the Later Middle Ages'



2. 행정[편집]



2.1. 전비[편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 잉글랜드의 대륙 원정군 (1340-1389)
맨앳암즈 3천과 승마궁수 3천의 6개월 군사작전의 전비는 6만 파운드(순은 16톤).
1346-7년 에드워드 3세의 크레시-칼레 전역은 약 20만 파운드(순은 58톤).
1356년 랭커스터 공작과 흑태자의 푸아티에 전역은 10만 파운드(순은 26톤).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프랑스 야전군과 요새 주둔군 (1340-1389)
1343년 300만 리브르(순은 61톤).
1355년 500만 리브르(순은 81톤).

  • 샤를 7세의 칙령군 (1445)
상비군 유지비 연 74만 리브르(순은 22톤).


2.2. 군사 모집[편집]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파일:잉글랜드 국장.svg 잉글랜드
일반적으로 중장병, 즉 "갑옷으로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승마전투가 가능하건 불가능하건 준마를 탔건 조랑말을 탔건 이동할 때는 말을 타는, 백병전 전문 전투원"을 지칭하는 용어. 백작이든 기사든 향사든 일반인이든 신분은 상관 없다. 징집병이나 민병대와 구분되는 잘 무장한 직업군인이라는 의미에서 근접전투원이 아닌 제노바 쇠뇌수 등도 맨앳암즈라고 칭할 때가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중무장 근접전투와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는 시대였으므로 어느 쪽이든 존중이 담긴 표현이다.
  • 왕실 가신단 기사
국왕에게 연금을 받고 봉사하는 왕실 기사들. 노르만 왕조와 앙주 왕조 시절부터 잉글랜드 국왕군의 핵심 전력이었다. 왕실 기사의 전성기였던 에드워드 1세의 폴커크 전역에서는 중기병 1400명 중 절반 이상인 800명이 왕실 가신단 소속이었다. 이들은 참전의 대가로 봉급을 받았지만 회계 기록에서 용병 기사들과 철저히 구분되었다. 그러나 1360년 전후로 가신단 기사라는 명칭은 갑작스럽게 궁내부 기사(chamber knight)로 대체되었으며 왕실 소속으로 참전한 기사들에 대한 회계 기록이 아래의 고용계약서(indenture)로 모집된 용병 맨앳암즈들과 통합되었다.
  • 기사의 의무에 호소
잉글랜드에서 연수입 40파운드 이상의 모든 지주들은 기사 작위를 받거나 국왕에게 벌금을 내야 했다. 대부분 그냥 벌금을 냈지만 그럼에도 14세기 잉글랜드에는 대략 900명이 조금 안 되는 기사들이 있었다. 당대 기사도의 이상에 따르면 기사는 국가 공동체의 수호자 계급이자 군인들의 지휘관이므로 국왕의 소집령에 응해야 한다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무시하기 어려운 사회적 기대가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은 기사들 각자에게 서신을 보내서 참전을 '요청'했다.
  • 벌금이나 채무를 면제하는 대가로 참전 요구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빚을 진 사람들 중에는 갑옷과 말을 살 정도로 부유하고 무예 실력으로 명성이 높은 이들도 있었다.
  • 고용계약 indenture
중무장 근접전투와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으며 전쟁은 돈이 되는 시대였다. 명예를 원하거나 단순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병한다. 원정군인 잉글랜드군은 1년에서 많으면 10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맺었지만 방어하는 입장이라 행정에 여유가 있었던 프랑스군은 한달마다 계약을 갱신했다.

  • 궁수 archer
    • 배치위임 징병 commission of array
알프레드 대왕 이후 잉글랜드의 모든 자유민들은 '잉글랜드인들의 왕'에게 충성하며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을 방어할 의무를 가졌다는, 역사적 사실과 신화가 뒤섞인 관념이 있었다. 그러한 관념은 에드워드 1세 시대부터 명시적인 제도가 되었다.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잉글랜드인 남성에게 병역 의무가 있었다. 농노 역시 자유민으로 취급되어 전쟁세를 내거나 국왕군에 징병되었다. 전쟁세 납부금액은 자유민과 비자유민 신분이 아닌 재산을 기준으로 평가되었다. 30에이커 소작지를 가진 농노는 15에이커를 가진 자유소작농보다 마을 공동체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땅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였다.
대부분은 전쟁 보조금을 내는 대신 의무를 면제받았지만, 징병관들은 어쨌든 할당된 숫자의 병력을 소집 장소로 데려와야 했다. 1296년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는 보병 6만 명이 소집되었고 1인당 약 5실링 가치의 무장을 지원받았다. 반대로 생사르도스 전쟁에서 에드워드 2세는 인당 1파운드 이상의 비용을 들여 사슬갑옷과 투구와 건틀릿으로 완전히 무장한 보병 5100명을 소집할 계획을 세웠다. 에드워드 3세는 갑옷 대신 1파운드 가치의 말을 지급하라고 지시했다. 1347년 칼레 전역은 기마약탈보다는 공성전이 중심이었지만 그럼에도 잉글랜드군의 승마궁수와 보병궁수의 비율은 1:3이었다.
  • 웨일즈의 군주의 자유민 소집
고대부터 모든 웨일즈인은 자유민이자 군인이므로 웨일즈의 군주를 위해 복무해야 했다는 전설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배치위임 소집령보다도 역사적 근거가 미약했지만 웨일즈는 가난한 지방이었으므로 봉급과 약탈의 기회에 대한 만족도가 잉글랜드 징집병보다 높았다.
  • 고용계약 indenture
군인 직업이 존경을 받으며 전쟁은 돈이 되는 시대였다. 명예를 원하거나 단순히 돈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병한다.

파일:프랑스 왕국 국기.svg 파일:800px-France_moderne.svg.png 프랑스
  • 신민소집령 arriere-ban
프랑스 국왕은 이론상 왕국의 주권자이자 '왕국 내 황제'였으며 프랑스에서 18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자들은 왕국의 방어를 위해 군복무를 해야 하는 법적인 의무가 있었다. 대부분은 병역 대신 돈을 냈지만, 그럼에도 많은 귀족들과 평민들이 명예를 원하거나 봉급을 받으려고 국왕군에 참전했고, 필리프 6세는 최대 2만에 달하는 맨앳암즈와 그 이상의 민병대를 소집할 수 있었다. 1337년 아키텐 공작위 몰수 이후부터 푸아티에 전투 이전까지 신민소집령은 최소 7번 이상 선포되었다.
하지만 신민소집은 넓은 전선에서 기습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 전역에서도 기마약탈을 벌이는 잉글랜드군을 추격하기 위해 항상 수많은 민병대 보병들이 해산되었다. 그래서 푸아티에 전투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신민소집령은 선포되지 않았고, 샤를 5세는 그 대신 화로세와 상품세를 걷어서 용병대를 고용하거나 전문적인 직업군인들을 모병해 상비군에 가까운 군대를 만들었다.


2.3. 보급[편집]


  • 군대에 필요한 식량
3만 명의 대군세는 이론상 일주일에 약 4500-5000쿼터의 곡식을 필요로 했다. 1쿼터는 8부셸이며 290리터다. 여기에 말 1만 마리가 추가된다면 일주일에 약 4000쿼터의 귀리나 다른 곡물이 더 필요했다.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계산된 군사 4000명의 4개월치 식량: 밀 5400쿼터, 보리 8250쿼터, 콩과 완두콩 2400쿼터, 에일 60통(tuns), 베이컨 12960개, 청어 45??, 생선 32400마리, 치즈 9072스톤.

  • 보관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왕실의 지시사항: 밀을 잘 갈아서 체에 거르고, 깨끗한 통의 바닥에 개암나무 가지 세 개와 소금을 넣고, 그 위에 밀가루를 빽빽하게 눌러 담아야 한다. 잘 마르도록 정기적으로 통을 뒤집어야 한다.


3. 전략[편집]



3.1. 첩보[편집]


  • 첩보 문서는 대부분 읽자마자 파기되었다. 명령이 지켜지지 않은 극소수의 문서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 1468년 에드워드 4세는 첩보 비용으로 2200파운드 이상을 썼다.

3.2. 전략 회의[편집]



3.3. 1기 (1337~1360)[편집]



3.4. 2기 (1360~1389)[편집]



3.5. 3기 (1415~1431)[편집]



3.6. 4기 (1432~1453)[편집]




4. 전술[편집]



4.1. 공성전[편집]



4.2. 습격전[편집]



4.3. 야전[편집]




5. 개인 전투[편집]



5.1. 기병[편집]



5.2. 보병[편집]



5.3. 궁병[편집]




6. 무장[편집]



6.1. 1기 (1337~1360)[편집]


그레이트헬름이 아직 현역이다. 브리간딘과 판금 팔보호대와 다리보호대 등 트랜지셔널 아머의 형태는 이미 완성되었지만 비싸기도 하고 기마약탈과 강행군에 불편해서 부유한 기사들도 사슬갑옷만 입는 경우가 더 많다. 반대로 신분이 낮은 맨앳암즈가 안전제일주의자라서 판금 보호대와 브리간딘으로 중무장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파일:Miroir_historia.jpg
프랑스 연대기 삽화. 1335년경



파일:Sir Hugh Hastyngs. 1347.jpg
휴 헤이스팅스 무덤 장식. 1347년경


6.2. 2기 (1360~1389)[편집]


그레이트헬름은 거의 토너먼트에서나 볼 수 있고, 배서닛이 가장 표준적인 투구로 자리잡는다.



파일:rvdmelee.jpg
연대기 삽화. 1370년경


연대기 삽화 / 흑태자 에드워드 무덤 장식. 1376년경


파일:yates-thompson-35-f51.jpg
베르트랑 뒤 게클랭. 1385년경


6.3. 장기 휴전 (1389~1415)[편집]


판금 보호대가 거의 표준으로 자리잡았고 부리처럼 튀어나온 면갑이 대중화되었다.

생드니 연대기 삽화 / 호크우드와 화이트컴퍼니. 1400년경


6.4. 3기 (1415~1431)[편집]


넓은 판금 목가리개를 붙여서 가동성을 희생하는 대신 치명적인 급소인 목을 보호하는 그레이트배서닛이 유행한다. 판금갑옷이 맨앳암즈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프랑스 대연대기의 크레시 전투 삽화 / Guiron le Courtois. 1420년경


6.5. 4기 (1432~1453)[편집]


진정한 판금 갑옷의 등장. 목가리개 등 관절부의 판금 보호장비를 인체공학적으로 정교하게 설계해서 방어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가동성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이전처럼 값싸고 튼튼하고 단순한 형태의 보호장비도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파일:italian men at arms c.1440.jpg
'산로마노 전투'. 1440년경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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