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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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쿠지의 수상 이력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명예의 전당 밥 쿠지.jpg
밥 쿠지
헌액 연도
1971년



파일:밥쿠지.jpg

보스턴 셀틱스 No. 14
로버트 조셉 쿠지
Robert Joseph Cousy

출생
1928년 8월 9일 (95세)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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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홀리 크로스 대학교
신장
185cm (6' 1")
체중
79kg (175 lbs)
포지션
포인트 가드
드래프트
1950 NBA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트라이시티스 블랙호크스 지명

소속 팀
보스턴 셀틱스 (1950~1963)
신시내티 로열스 (1969~1970)
지도자
보스턴 칼리지 (1963~1969 / 감독)
신시내티-캔자스시티-오마하 킹스 (1969~1973 / 감독)
등번호
14번 - 보스턴
19번 - 신시내티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홀리 크로스 대학교
2.3. 은퇴 후
3. 플레이 스타일



1. 개요[편집]


미국의 전 NBA 농구 선수. 보스턴 셀틱스에서만 13시즌을 활약하며 과거 60년대 보스턴 왕조를 건립한 선수들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쿠지의 가장 기념비적인 면은 포인트가드 포지션의 가치를 확립한 점이다. NBA MVP는 1955-56년에 생겨났는데, 초대 MVP는 빅맨인 밥 페팃이었으며, 그 전에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는 센터 조지 마이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농구는 10피트 위에 있는 골대에 득점하는 그 특성상 장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스포츠였다. 그런데 185cm란, (농구선수로서) 단신이었던 포인트가드 쿠지가 경기를 지배하는 것은 당시로선 상상도 못하던 것이었다.[1] 한 마디로 NBA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선수.[2]


2. 선수 경력[편집]



2.1. 홀리 크로스 대학교[편집]


밥 쿠지는 가난했던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농구를 연습했다. 그렇게 농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결국 홀리 크로스 대학에 입학한다.

하지만 밥 쿠지의 플레이 스타일은 그 당시엔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이었다. 빠른 공격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밥 쿠지의 모습을 당시 대학시절 감독은 이에 거부감을 표했다. 하지만 팬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밥 쿠지의 플레이 스타일에 매료되었고, 더욱더 그를 원했다. 밥 쿠지는 이런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듯 대학 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결국 이 활약에 힘입어 1948, 1949, 1950년 3시즌 동안 차례로 올 아메리칸 서드 팀, 세컨드 팀,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2.2. 보스턴 셀틱스[편집]


밥 쿠지는 1950년 NBA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트라이시티 블랙호크스에 지명이 되었으나 결국엔 보스턴 셀틱스로 가게 된다.

1949-50시즌 22승 46패의 졸전을 펼쳤던 보스턴은 밥 쿠지가 온 50-51시즌 39승 30패의 승률을 기록하게 되었다.

밥 쿠지의 대표적인 경기 중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52-53시즌 NBA 플레이오프 1라운드 2차전 시라큐스 네셔널스와의 경기인데, 이 경기는 4번의 연장까지 가게 된다. 보통 4번의 연장까지 가게 되면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기 마련인데, 그에게 있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32번의 자유투 시도 중 30번의 성공은 이 경기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이 30번의 자유투 성공은 아직까지도 플레이오프 역사상 한 경기 최다 자유투 성공 갯수로 기록되고있다. 이런 엄청난 활약으로 밥 쿠지는 총 50득점을 기록하였고, 팀을 111-105 승리로 이끌었으며, 2-0 승리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데 기여를 하였다.[3]

1956-57시즌 보스턴은 역대 최고의 센터인 빌 러셀을 영입하면서 보스턴 왕조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그 시즌 보스턴 셀틱스는 플레이오프에서 차례로 시라큐스 네셔널스세인트루이스 호크스 상대로 승리하며, 팀 최초로 NBA 챔피언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 시즌은 밥 쿠지가 MVP를 수상했던 시즌이기도 한데, 그에게 있어 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모든 것을 이뤘던 완벽한 시즌임에 틀림없었다.

보스턴 셀틱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58-59시즌에서부터 65-66시즌까지 8시즌 연속 NBA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보스턴 왕조가 탄생하게 된다.

보스턴에서 최고의 나날만을 보내고 있던 그는 1962-63시즌 돌연 은퇴를 선언하였고, 그의 고별식은 The Boston Tear Party 라고 불린다. 그는 마지막 경기에서 헌신을 다해 팀을 도왔고, 보스턴 셀틱스LA 레이커스를 상대로 112-109로 승리하여 우승을 하면서, 밥 쿠지에게 최고의 은퇴 선물을 선사했다. 고별식에서 밥 쿠지를 향해 조 딜런이라는 보스턴 셀틱스 광팬이 'We love ya, Cooz'라고 외쳤는데, 이는 경기장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보스턴 셀틱스에서만 헌신했던 그에게 걸맞는 최고의 고별식이었다.

밥 쿠지는 보스턴 셀틱스에서만 13시즌 활약하며 16955득점, 6945 어시스트를 기록했다.[4] 이는 보스턴 셀틱스 역사상 최다 어시스트 기록이다. 그 뿐만 아니라 1952-53시즌부터 59-60시즌까지 8번의 어시스트 왕을 달성하였으며, 13번의 올스타 팀 선정, 그 중 2번을 올스타 MVP를 거머쥐었다. 그러면서 밥 쿠지의 14번은 보스턴 셀틱스의 영구 결번이 되었다.


2.3. 은퇴 후[편집]


1963년 은퇴한 밥 쿠지는 6시즌 동안 보스턴 칼리지 감독으로 지냈다. 그러다 1969년 신시내티 로열즈로 감독직을 옮겼는데, 밥 쿠지는 이 때 로열즈에서 다시 선수 복귀를 하게 된다. 비록 신시내티 로열즈에서 5득점 10어시밖에 기록하지 못하였으나, 밥 쿠지의 선수 복귀 소식에 팬들은 열광하였고, 수 많은 팬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들이는 효과를 얻기도 했었다. 그러나 밥 쿠지는 감독직으로서 5시즌 동안 신시내티 로열즈에서[5] 141승 207패를 기록하였는데, 밥 쿠지가 감독직으로 있었던 69-70시즌에서부터 72-73시즌까지 4차례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는 등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고, 결국 73-74시즌 도중 사임하게 되면서 본인의 감독 생활을 마무리짓게 되었다.[6]


여담으로 닉 놀테가 대학 농구부 감독 역으로 주연을 맡은 1994년 농구 영화 'NBA 챔프'[7]에서 놀테의 상관인 대학 체육부장 역을 맡았는데, 저 장면에서 10개의 자유투를 연속으로(마지막은 심지어 왼손으로 던진다) 넣는 쿠지의 모습은 연출되지 않은 실제 상황이었다고 한다. 저 당시 쿠지의 나이는 65세.

그 후에도 밥 쿠지는 여러 방면에서 농구 부흥에 힘을 보탰으며, 지금까지의 공로들을 인정받아 2019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도날드 트럼프 前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직접 수여받았다. 이에 밥 쿠지는 매우 감격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지금의 NBA에서야 화려한 패스, 드리블 등은 수 많은 선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흔한 모습들이지만, 그 당시의 NBA는 그런 화려한 모습들을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시대를 한 세대 반 즉 40년이상을 앞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로 타의 주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밥 쿠지는 그 시절엔 드물었던 노 룩 패스 등으로 상대를 속이고 같은 편 선수에게 빠르게 패스하거나 하프라인에서 바로 패스하는 플레이메이커 같은 역할이었다. 당시 초창기에는 24초 룰이 없어 공격 진행이 느렸던 그 당시의 NBA에 이런 빠른 속공에 어울릴 법한 밥 쿠지의 플레이는 엄청난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고, 이는 54-55시즌 24초 룰이 생기면서 더욱더 두드러지게 된다. 그 덕분에 당시 보스턴 셀틱스는 최고의 속공 팀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패스 뿐만이 아니라 드리블도 화려한 선수였는데, 과거 나무에 올라타다가 오른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는 왼팔과 볼이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왼팔만 사용하여 농구를 하였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컨트롤링이 가능하게 되어, 여러 화려한 드리블들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50~60년대에 빠른 전개 능력과 화려하고 날카로운 패스, 드리블들을 구사했다는 점에서, 밥 쿠지는 포인트 가드, 더 나아가 NBA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그런 선수가 1950~60년대에 활약하고 그 선수가 패스하는 공을 받는 같은 팀 선수가 빌 러셀 같은 역대 최고의 선수들이니, 보스턴 왕조는 어쩌면 만들어지는 게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 쿠지는 데뷔 7년차이던 57시즌에 빌 러셀이 합류하고 나서야 우승할 수 있었지만 이때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 MVP는 바로 쿠지였다.[2] 여담이지만 60년대 보스턴 왕조가 위대한 것이 이런 식으로 농구의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킨 선수들과 시도가 많았다는 것이다. 큰 선수에게 공을 줘서 경기를 풀어가는 단조로운 방식이 대부분이던 당시에 기량이 뛰어난 단신 선수가 온갖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경기를 이끌어나가는 것을 선보인 것, 할렘 글로브트로터스같은 "묘기농구단"에만 보이던 정신없이 빠른 속공농구를 도입한 것, 당시는 통계조차 수집하지 않던 "블럭슛"을 상대팀에 대한 정신적 압박 등 수비 전술적으로 사용한 것, 이를 속공에 연계한 것, 후보지만 주전 못지 않게 중요한 "식스맨"이라는 존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다름아닌 보스턴 셀틱스였다. 상징적인 의미긴 하지만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선수인 척 쿠퍼를 지명한 것도 보스턴이었다.[3] 이 경기는 윌트 체임벌린의 100득점 경기와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정규시즌에서 초고득점을 하는 것보다 플레이오프에서 강팀들을 상대로 고득점하는게 훨씬 어렵고, 더 높이 평가를 받는다. 윌트의 100점 경기는 당시 꼴찌급이던 닉스를, 승부가 갈린 상황에서 계속 쳐바르며 세운 기록이라 그리 어려운 업적은 아니었다. 다만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자리수 득점이란 상징성 때문에 위대한 기록으로 꼽히는 것이다. 반대로 마이클 조던의 플레이오프 역대 최다인 63점 기록은 수치상으론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지만, 역사상 가장 강한 팀 중 하나인 셀틱스를 상대로 수비가 빡세지는 플레이오프에서 낸 기록이란 점 때문에 역대 최고의 활약상을 꼽을 때 꼭 들어간다.[4] 추후 신시내티 로열즈에서 5득점과 10어시를 더 추가한다.[5] 1972-73시즌에 캔자스시티 킹스로 구단명이 달라진다. 지금의 새크라멘토 킹스.[6] 여담으로 신시내티 로열즈는 밥 쿠지가 사임하고 난 다음 시즌인 74-75시즌엔 다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다.[7] 원제는 Blue Chips. 카메오가 매우 화려하다. 현역 농구 스타 샤킬 오닐앤퍼니 하더웨이래리 버드와 쿠지 같은 은퇴한 농구선수, NCAA의 명감독인 밥 나이트, 릭 피티노 등등이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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