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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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비판
4. 동아일보의 해명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시절 소설가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분량은 민족개조론보다 조금 더 길지만, 여전히 문체는 쉬운 편이다.

민족 개조론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문화 통치'와 이광수의 변절을 상징하는 글이다. 또한 민족 개조론과 마찬가지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결국 이광수는 이 글로 인해 동아일보에서 쫒겨난다.


2. 내용[편집]



민족적 경륜(1)

민족 백년대계의 요체

1. 한 회사의 사업에 일종의 계획이 필요하다 하면 한 민족의 사업에도 계획이 필요할 것이다. 만일 상업이나 공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회사를 조직할 때에 분명하고 자세한 계획서를 작성하지 않고 한다면 누구나 이를 어리석은 사람의 일이라고 비웃을 것이니 이 비웃음은 가장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조선 민족은 지금 이 비웃음을 무계획 상태에 있는 것이다.

2. ……(중략)…… 아직까지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적 계획이 없다 할 것이다. 각각의 사람들 의식 속에 잠재한 목적과 계획은 있으나 그것이 아직 응집하지 못한 것이다. 산산이 흩어진 구름과 안개요 형체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3. 그러면 그것이 응집하여 형체를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어제 신년호에도 주장한 바와 같이 오직 단결의 한 길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가장 낡은 진리이고 진리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단결의 필요를 수십 년 이래로 논하였고 또 단결하자는 의사도 그만큼 많이 역설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도 추상적 이론이었고 실행, 즉 구체화의 시기에 이르지 못하였었다. 이 모양으로 가는 동안에 우리의 민심은 날로 뿔뿔이 흩어져 우리의 민력은 날로 쇠퇴하고 미약해져 갔다.

우리는 이러고 있을 수 없는 절박한 시기를 맞이하였다. 더욱이 신년을 맞아 과거를 회고하고 장래를 전망할 때에 위급을 느끼고 “시급히 무슨 운동을 해야겠다”는 전율할 만한 내적 요구가 치열함을 자각한다. 진실로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온 정력을 경주하여 이때에 민족 백년대계를 확립하고 그것이 확립되는 날부터 그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전 민족적 대분발을 하여야 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 민족의 처지는 한 민족의 일생에 한 번이나 만날 것이요 두 번도 만나지 못할 그러한 위기이다.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나 하는 것이 조선 민족의 민족적 일생이 결정될 최대 시련이라 할 것이다.

……(하략)……

『동아일보』, 1924년 1월 2일


민족적 경륜(2)

정치적 결사와 운동

……(전략)……

2. 그런데 조선 민족은 지금 정치적 생활이 없다. 아마 2천만에 이르는 민족으로 전혀 정치적 생활이 없는 민족은 현재 세계의 어느 구석을 찾아도 없을 것이요, 또 유사이래의 모든 역사 기록에도 없는 일이다. 실로 기괴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수십 년 이후로 조선 민족에게는 정치적 자유사상이 무서운 세력으로 스며들어 정치 생활의 욕망이 옛날 독립한 국가 생활을 하던 때보다 치열하게 되었다. 이것은 가장 당연한 일이다.

3. 그러면 왜 지금의 조선 민족에게는 정치적 생활이 없나. 그 대답은 가장 단순하다.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것이 첫째 원인이다. 병합 이래로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 하는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자치권의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적수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 의식이 있었던 것이 두 번째 원인이다.

이 두 가지 원인으로 지금까지 하여온 정치적 운동은 전혀 일본을 적국시하는 운동뿐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정치 운동은 해외에서나 만일 국내에서 한다 하면 비밀결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4. 그러나 우리는 무슨 방법으로나 조선 내에서 전 민족적인 정치 운동을 하도록 새로운 방면의 길을 열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그러면 그 이유는 어디 있는가. 우리는 두 가지를 들려고 한다.

(1) 우리 당면의 민족적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2) 조선인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단결하여 민족의 정치적 중심 세력을 만들어서 장래 영원하고 무궁한 정치 운동의 기초를 이루기 위하여

5. 그러면 그 정치적 결사의 최고 또는 최후의 목적이 무엇인가. 다만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그 정치적 결사가 만들어져 성장하기를 기다려 그 결사 자신으로 하여금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케 할 것이라고.

……(하략)……

『동아일보』, 1924년 1월 3일


민족적 경륜(3)

산업적 결사와 운동

……(전략)……

3. 한 경제적 단위를 이룬 지방이 산업이 미숙한 시대에 있을 때에는 보호 정책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이론과 사실이 같이 증명하는 바다. 그런데 요즈음 조선은 누구나 아는 것과 같이 산업이 미숙한 시대, 미숙한 시대라는 것보다도 싹을 틔우는 시대에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 강한 보호 정책을 써야 할 것은 자명의 이치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편 일본과 조선 간의 중요 관세가 이미 철폐되어 조선에서도 제조할 수 있는 조선인의 일용품이 제방이 터진 모양으로 조선으로 흘러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의 경제력이 날로 고갈하여 대규모 산업을 기획할 능력이 갈수록 쇠약하여 간다. 이러한 경우를 당하여 우리가 만일 적당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멀지 않아 우리가 경제적으로 파멸할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하다.

4. "그러나 이 제도 밑에서야 어찌 할 수가 있나?" 이러한 말은 도저히 허할 수 없는 말이다. 용서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제도 밑에서 가능한 무슨 방침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우리의 생존에 대한 의무이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은가. 우리는 물산 장려의 낡은 진리에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소극적으로 보호관세의 대용 효력을 얻기 위하여 조선 생산물 사용 동맹자를 얻을 것

(2) 적극적으로 조선인의 일용품이요 또 조선에서 제조가 가능한 산업 기관을 일으킬 자금의 출자자를 얻기 위하여 일대 산업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할 것이다.

5. 조선의 산업은 위에서 말한 산업적 대결사의 힘이 아니고는 결단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이것이 완만한 듯하더라도 그것이 유일한 길인 이상에는 그것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략)……

『동아일보』, 1924년 1월 4일


민족적 경륜(4)

교육적 결사와 운동

……(전략)……

2. 새들이 새끼에게 나는 법과 적을 피하는 법과 먹이를 잡는 법을 가르친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열심인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만한 정도라 한다. 짐승도 그러하다. 교육의 본의가 여기 있는 것이다. “적을 피하고 먹이를 잡는 법의 교육과 연습”에.

그런데 조선 고대의 교육은 첫째 전 민중도 아니었고 둘째 적을 피하고 먹이를 구하는 실용적인 것도 아니었고 대부분 장식적이었으며 근년의 교육도 아직 이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개 일반 민중이 아직도 옛 방식적 교육 목적의 잘못됨과 교육이 진의를 깨닫지 못한 까닭이다.

……(중략)……

6. 우리의 진로는 위에서 주장한 바로 이미 결정되었을 것이다. 즉 전 민중에게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는 대운동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이 운동은 민중의 읽을거리 간행과 민중(특히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강습소의 설치로 얻을 것이요 또 이 일을 하려면 거기 필요한 자금과 인물을 얻기 위한 민중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대결사를 조직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고 지금이 그때이다.

이러한 운동에 대한 자세한 계획은 여기서 말할 것도 아니고 이 결사를 전도 회사에 비교하면 가장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전도 회사가 많은 자금을 가지고 각지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모양으로 이 결사에서는 각 농촌에 어문과 과학의 선교사를 파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같을 것이다.

위에서도 이 세 종류의 결사와 운동이 조선 민족 구제의 삼위일체적 방책인 것을 말하였고 이 교육 운동은 어떤 의미로 보아 다른 두 종류의 운동의 기초가 될 것이다. 이제 그 관계를 다시 깊이 생각해보고 연구해 보자.

『동아일보』, 1924년 1월 5일


민족적 경륜(5)

교육 산업 정치의 관계

……(전략)……

2. 우리는 앞에서 4회에 걸쳐 정치적 결사와 산업적 결사와 교육적 결사가 조선 민족을 구제하는 삼위일체의 방책인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관계는 어떠한가. 다시 말하면 이 세 가지는 따로따로 시기를 떼어서 할 것인가, 또는 동시에 할 것인가. 각각 완전히 독립적으로 할 것인가, 또는 밀접한 관계가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것은 실제에는 너무 중대한 문제이다.

3. 정치적 결사는 전 조선 민족의 중심 세력이 되기를 약속해야 할 것이니 이 결사의 의견이 곧 조선 민족의 의견이요 이 결사의 행동이 곧 조선 민족의 행동이 되기를 약속해야 할 것이다. 그리 되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전 조선 각지에서 다수의 회원을 얻을 필요가 있고 다수의 회원을 얻으려면 부득이 농민에게로 가야 할 것이니 대개 조선에서 1400만이 농민인 까닭이다.

농민 중에서 많은 회원을 얻으려면 첫째 농민 중에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일을 하는 것이 교육적 결사의 사명이다. 교육적 결사에서는 한편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면서 다른 한편 농촌 자치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생활의 방식을 가르쳐 정치 생활의 준비를 줄 것이다. 이러므로 정치 운동과 농민 교육 운동과는 서로 배와 등이 되어 서로 돕고 어울릴 것이다.

4. 상업적 결사도 그 최후의 목적은 전 조선 내의 모든 산업의 통제에 있을 것이니 그리하려면 거액의 자본이 필요하고 거액의 자본을 얻으려면 수백만의 회원이 필요하고 수백만의 회원을 얻으려면 역시 농민에게로 가야 할 것이다. 아마 이 대산업조합의 기초는 도시의 주민에게보다도 농촌의 주민에게 있을 것이요 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적 결사를 위해서도 농민을 본위로 하는 교육적 결사는 중요한 보조기관이 되는 것이다.

교육적 결사는 농민에게 과학적 지식을 보급할 때에 경제학적 지식도 보급할 것이요 특히 농촌의 경제적 자치와 조선의 경제적 생활에 관하여 가르칠 바가 있을 것이니 각 농촌에는 반드시 대산업조합의 지점이 있어 그 농촌의 경제 생활의 중심이 될 것이다.

5. 이 세 가지 사업 중에 가장 곤란할 듯한 것이 교육적 결사이지만 이것도 결코 불가능은 아니다. 현재 지식계급의 청년 중에는 적당한 사업을 잡지 못하여 고민하는 이가 많으며 또 민중을 위한 헌신을 원하는 이가 많으니 상당한 방법과 경제적 능력만 얻으면 수백인의 민중 교육자를 얻기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요, 가령 200인의 민중 교사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매년 2만 원가량의 수입만 있으면 할 방법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어 못 한다 하면 너무도 민족적 수치가 아닌가.

6. 이 세 가지 사업은 동시에 일으킬 것이니 동일한 최고 간부의 지도 하에 분업적으로 하는 것도 좋거니와 사업 자체는 분명히 독립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특히 정치적 결사 이외의 것은 절대적 색채를 띠지 아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개 정치적 색채를 띠면 종종 위험이 따르는 까닭이다.

7. 조선인으로 누군들 조선인의 운명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있으랴. 또 조선인의 운명을 근심하는 이는 반드시 조선인의 살길을 깊이 연구할 것이다. 그러하거늘 지금까지에 조선의 민중적 경륜이 확립하지 못하여 전 민족이 거취를 찾지 못함은 너무 개탄할 일이다. 이에 우리는 우리의 확신하는 바를 피력하는 것이니 이것이 기회가 되어 민족적 경륜에 관한 열렬하고 절박한 궁리가 생기고 아울러 금년 내로 그 경륜에서 나오는 여러 사업이 비롯하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6일


출처

3. 비판[편집]


일단 각 소문단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조선인은 결집하지 못하며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뭔가 해야 한다.

2. 조선인이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 일제 하에서라도 정치 활동을 시작해야 한다.(정치적 결사)

3. 조선 산업이 고사할 위기이니 물산 장려 운동으로 해결하자.(상업적 결사)

4. 조선 대중을, 특히 농촌 중심으로 교육시키자.(교육적 결사)

5. 이 셋은 서로 선순환을 일으킬 것이므로 같이 진행되어야 한다. 다만 서로 독립적으로 시행되어야 하며, 정치적 결사 외에는 정치색을 띄면 안된다.


겉보기에는 조선 민족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글처럼 보이나, 민족개조론과 달리[1] 실천할 수 없거나, 사실과 다르거나, 교묘하게 독소 조항이 끼어있는 등 실제로 문제가 있는 내용이 아주 많다.

우선 1번 문단부터 문제가 많다. 조선 민족은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많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을 했음에도 고위층의 변절이나 일제의 탄압에 박살난 것이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조선인들이 무계획 상태이며 응집하지 못한다고 까는 것은 매우 기만적인 화술이다.

2번 문단은 특히 자치론의 논리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부분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 활동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독립을 포기하는 자치로 연결될 수 밖에 없는 구석이다. 일제가 독립 활동을 허가할 리 만무하며, 결국 일제의 통치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2]

여기에다가, '일본 정부를 적수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렬한 절개 의식이 있었던 것'이라는 말은 택도 없는 헛소리다. 당장 이 글이 쓰이기 약 5년 전에 3.1 운동 같은 것이 있었다.

또한 3번 문단은 물산장려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공급자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킨 방법이고, 이광수도 낡아빠진 수법임을 자인하고 있다. 게다가 여기서도 '이러한 제도 밑에서 가능한' 같이 일제의 부당한 대우에 한 수 접고 들어가는 듯한 표현을 사용한다.

5번 문단은 기승전농촌으로 논리를 이어가는데, 특히 상업적 결사에 대해 농촌에 가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발상이 매우 어색하다. 상업적 결사는 자금이 많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는데, 농촌에서 자금력이 매우 나쁜 소작농들을 계몽시켜봤자 큰 자본금을 모으기 어렵고, 지주들을 통해 자금을 축적하자니 이해관계가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자본금을 모으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차라리 도시에서 그나마 돈 잘 버는 상인 혹은 기업가 조선인을 찾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4. 동아일보의 해명[편집]


민족적 경륜 사건이 터진 직후에, 동아일보는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라는 해명글을 기고하여 사건 진화에 나섰다. 동아일보 측의 현대문 원고를 출처로 하여 원문을 작성한다.

정치적 결사와 운동에 대하여

1.

우리는 지난 1월 3일에 ‘민족적 경륜’이라는 제목으로 ‘정치적 결사와 운동’이라는 한 편의 논설을 게재했다. 그러나 이 논설의 취지가 현재 우리의 입지에 있어서 그 이론이 철저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며 또한 그 논설 자체의 결론을 음미하지 않으면 의외로 의문을 불러올 염려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다시 한 편의 글을 쓰니 독자들이 읽어주면 감사하겠다.

2.

물론 우리 민족의 정치적 최고 이상은 민족 자결로 해결될 것은 밝은 해와 별처럼 확실한 사실이다. 한 개인 또는 몇 개 단체의 행동으로 인해 좌우될 일도 아니고 또한 시세의 변화에 따라 동요될 일도 아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2000만 형제와 같이 공통으로 확인하는 바이다. 구차하게 군말할 필요가 없으며 또한 한 점의 의문을 끼워 넣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정치적 최고 이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무엇보다도 민족적 단결을 굳게 함으로써 지금부터 당면의 권리와 이익을 증진하게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3.

예를 들어 우리 민족의 생명의 원천이 될 만한 민립대학의 운동이라든지 또한 경제적 파멸의 위기에서 구하는 물산장려운동이라든지 우리 자체의 단결력으로써 완성하게 하며 발전하게 하는 것이 현재 조선 안에 있는 형제의 책무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운동을 통일적으로 또한 조직적으로 하려 하면 자연히 민족적으로 일대 단결이 요구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또한 일대 기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전부터 이러한 단결과 기관이 없었으므로 민립대학운동이나 물산장려운동이 계통적으로 철저하게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사회적 방면으로 보아도 일정한 통제력이 없음으로 시기심이 생기며 분열이 일어나 질서가 날로 쇠퇴해 가며 도덕이 날로 부패해 가는 것이 현재의 참상이 아닌가. 그 누가 이를 부인할까.

4.

그러면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점에서 민족적 단결을 외치는데 불과했다. 요약하면 문제는 ‘정치적 결사’라는 의미에 의문이 모아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권을 통일적으로 계통적으로 보장하며 확장한다고 하면 이것을 정치적 결사라고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것은 현대의 생활을 떠나서 정치가 없으며 또한 정치를 떠나서 생활을 향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이러한 모든 생활운동은 민족 자체의 단결력으로써 향상 발전하게 할 의도였다. 민족적으로 단결을 이루고 단체의 힘으로 우리의 경제와 교육문제를 발전 향상하게 하는 것이 곧 정치적 결사가 아닌가.

5.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적 결사와 운동’을 제창한데 불과했다. 그러므로 당초부터 정치적 방면의 주권조직은 언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만약 우리의 최고 정치적 이상이 있다고 해도 이것은 도저히 논의할 자유가 없다는 상황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문화적 방면으로 정치적 결사를 운운하는 것은 이러한 원인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제창한 ‘정치적 결사와 운동’이라는 논지를 한 사람이라도 다른 뜻으로 오해한다고 하면 그 책임은 표현이 서툴렀기 때문일지언정 결콘 논설의 주지가 아닌 것을 여기서 밝히며 그래도 그 논리가 불철저해 일반 사상계의 오해를 불러올 점이 있다면 우리는 결코 이에 대한 사과를 주저하지 않겠다. 따라서 그동안 직접 간접으로 비평과 질문을 해주신 여러분의 걱정과 개탄을 감사해 마지않는다.

『동아일보』, 1924년 1월 29일


현대의 동아일보는, 플래시백에서 민족적 경륜에 대한 비판이 사회주의 진영이 특정 구절[3]에 집중하여 비난한 공작이며 이 땨문에 연정회가 좌초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한 동아일보는 이후 내정독립론에 대해 반박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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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개조론도 깊게 파고들면 문제가 있지만, 단순하게 문제를 발견해내기는 어려운 편이다.[2] 특히 이 부분은 이광수가 변절해버렸다는 점이 매우 치명적이었다. 이 논리는 이후 그가 동조한 내선일체의 근거 중 하나로 변질시키기 용이하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되면 일본 참정권을 받을 수 있을테니까.[3] 특히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