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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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민경우(閔庚宇)
출생
1965년
서울특별시[1]
본관
여흥 민씨[2]
현직
대안연대 공동대표
학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 중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 / 학사)
경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
통일연대 사무처장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 (1995-2005)
링크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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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NL 주사파 활동가, 수학 강사. 현재는 보수성향으로 전향했다.


2. 생애[편집]


1965년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민복기(閔福基)와 어머니 삼척 김씨(三陟 金氏) 사이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가정은 매우 부유한 편이었다고 한다.

1983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했으나 입학 후 학생운동을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다음 해 같은 학교 국사학과에 다시 입학했다. 1987년에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생회장을 지냈다.

이후 1995년부터 10년 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 남측본부의 사무처장을 지냈고, 이 때 북한에 보낼 서신을 일본을 거쳐 북으로 보내는 게 주로 하던 일이었다. 민경우는 다른 운동권과 달리 '제도권에 발을 들이면 기득권이 되는 것'이라며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1997년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지정되면서 도피 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안기부에 붙잡혀 두 번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도합 4년 2개월 간 수감 생활을 했다. 출소 후,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지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민경우는 수많은 그룹들로 나뉘어서 서로 물어 뜯던[3] NL 운동권에서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로 평가되면서, 수많은 NL계 조직들이 참여한 범민련과 통일연대에서 오랜 기간 활동할 수 있었다.

NL계열들이 조직적으로 민주노동당에 합류하던 흐름을 따라서 민경우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이미 자주파(NL)가 당을 완전장악한 상태에서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팀장'을 맡았다. 하지만 이때 한미FTA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NL운동권 바깥의 인사들을 만나고, 주류언론과 학계의 서적과 보고서들을 접하면서 그동안 굳게 신봉하던 주체사상과 민족의식에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4]

20년간 NL운동에 종사해온 활동가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9년 출판한 <진보의 재구성>에서 NL 운동의 한계 및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과연 NLPDR 이념이 현시대에 맞느냐는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서문에서 “NL노선은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현실과 많은 괴리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명확하게 못을 박고 시작하는 이 책은 “마치 성경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 같은 풍토가 NL 진영에 만연해 있으며, “토론하고 학습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등 NL운동권 전반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일국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가?’ 등등 NLPDR론을 뿌리부터 뒤집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이책은 NL운동 전반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으며, 민경우는 이때를 기점으로 NL계열에서 완전히 이탈한다.

민경우의 <진보의 재구성>에 대해서 (NL을 제외한) 진보진영 전반의 평가는 '남들은 20년전에 깨달은 것을 이제야 알았느냐ㅋㅋ'는 조롱이 절반, '문제제기는 맞는데 결론이 결국은 재벌 찬양이냐'는 비판이 절반 정도였다. 실제 민경우가 지적한 것들은 이미 90년대에 (NL을 제외한) 운동권 내부에서 다 나온 비판들로 2009년 기준으로 보면 너무 식상해서 한물간 내용들이다. 심지어 NL내부에서도 1990년대 내내 관악자주파, 새벽 그룹 등 여러 분파가 똑같은 문제제기를 하면서 계속 NL운동에서 이탈해나갔다. 1998년 출간된 <오래된 습관, 복잡한 반성>1,2[5]를 보면 민경우가 지적한 운동권의 모든 문제와 폐혜와 악습에 대해서 훨씬 더 정교한 논리로 훨씬 더 통렬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렇게 남들이 20년 전에 문제제기 할때는 "미제에 투항한 배신자" 운운하던 사람이 이제와서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척 하니 조롱거리가 될 수 밖에. 거기다가 세계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하고 양극화 문제가 심각한 사회현안으로 대두되면서 다들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이야기하면서 재벌개혁 논의가 급부상하는 시점에 갑자기 삼성, LG찬양으로 책후반부를 도배해놨으니, 엇박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6]

안철수 열풍이 불자 2012년 <대한민국은 안철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안철수를 지지하는 내용의 책을 출판했다. 이후 정계에서 영입 제의까지 받았지만 운동가로 살아왔던 30년의 삶을 완전히 접고, 2012년부터 서울 금천구와 분당 등에서 수학 학원을 운영하며 '수학 공부의 재구성' 등 여러 수학교육에 관한 책을 썼다.

그러다 2019년 조국 사태가 논란이 되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대 집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 뒤로는 주로 자신과 같은 386 운동권과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했다. 유재일과 함께 미래대안행동에 주로 출연했다. 이후 사실상 보수우익 성향으로 기울어진 것으로 보인다.

정치활동을 다시시작한 2021년 시점에도 수학선생이란 직업을 가지고 겸임을 하는것에 가까우며 본인 유튜브채널도 수학채널로 운영한다. 정치활동은 유재일 채널이나 미래대안행동채널에서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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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장령공파 32세 경(庚) 항렬.[3] 바깥에서 보기엔 다 똑같은 주사파 빨갱이들 아니냐고 하겠지만, NL은 이미 1980년대말부터 수많은 그룹들이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 자기들끼리 개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그룹들이 이합집산 끝에 대형화해서 대중들앞에 모습을 드러낸게 2000년대의 인천연합 - 경기동부연합 - 울산연합의 소위 3대 정파이다.[4] NL운동권은 안에서 자기들끼리만 만나면서 자신들의 논리만을 서로 주입하고 계속 강화하는 폐쇄성을 보인다. 사이비종교가 흔히 보이는 집단사고의 폐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다. 민경우는 이런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다가 처음으로 철저하게 숫자로 무장된 주류경제학의 논리를 접하자 대단히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5] 당시 운동권에선 '오습복반'이란 약자로 주로 불렀다.[6] 보면 알겠지만 민경우는 모든 사안에 대해서 10년, 20년씩 시대의 흐름에 계속 뒤쳐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