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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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門關
1. 개요
2. 내용
3. 관련 고사
4. 여담



1. 개요[편집]


선종의 옛스님들의 화두를 모아놓은 책. 남송 무문혜개(無門慧開)가 지었다. 총 48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에는 설명을 덧붙였는데, 평론하여 길게 해설해 놓은 것을 평창(評唱)이라 하고, 간단하게 외우기 쉽도록 시 형식으로 표현한 것을 송(頌)이라 한다. 《종용록》, 《벽암록》과 함께 선종을 대표하는 주요 3대 책자라고 볼 수 있다. 간화선을 하는 스님들이 화두를 얻기 위해 많이 읽혀진다.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길에는 문이 없어서

천차유로(千差有路): 천 개의 다른 길이 있으니,

투득차관(透得此關): 이 관문을 꿰뚫을 수 있다면

건곤독보(乾坤獨步): 하늘과 땅을 홀로 걸으리.

《무문관》 첫문장

여기서 나온 대도무문에서, 《무문관》의 이름이 나왔다.[1]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문이 없는 관문'이라는 뜻. 따라서 통과하려는 문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관문이 되는 셈이다.


2. 내용[편집]


내용의 형식은 크게 3단계이다.

1. 물건, 권위, 진리에 대한 집착으로 발생한 생각임을 인식.[2]
2. 그 집착에 충격을 줘서 없애버림.[3]
3. 집착이 없어진 그 자리에, 자신만의 자유로운 생각을 온전히 펼침.[4]

대략적인 구조는 1 - 2 - 3 의 차례로 이루어진다.[5] [6] 물론, 이 형식 자체도 하나의 집착이니 여기에 얽메이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화두들은 말장난이며 무한 사고를 유도하고, 결론이 없고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무의미한 생각들 자체가 공(空)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화두의 역할이라고 기존의 해설서들은 말한다. 특히, 일본 쪽 선불교에서 간화선을 말한 때 그런 말들을 많이 한다. 우리나라도 그 영향을 받아서 이 얘기를 하는 스님들이 많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사실이 아니다.[7] [8]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론없는 사고(思考)'가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이 될 순 없을 것이다.

무문관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집착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결단을 내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집착을 한순간에 끊어버리는 결단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고, 집착이 사라진 그 자리에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을 마음대로 펼쳐라는 것.

결단을 유도하기 위해서, 화두에 나오는 스님들은 제자들을 위해서 충격요법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구지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 보든지 오직 손가락 하나만을 들어 보였다. 어느 날 외부 사람이 와서 선사의 제자인 한 동자에게 물었다.

“스승께서 어떤 법을 중요시하여 설하던가?”

동자 역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후에 구지 선사가 이 말을 듣고 급기야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가 아파 통곡하며 달아나는데 구지 선사가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머리를 돌린 순간 구지 선사가 말없이 손가락을 번쩍 들어 보이니 동자가 곧 깨우쳤다.

구지 선사가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천룡의 한 손가락 끝 선(禪)을 배워 일평생 쓰고도 남았느니라.” 그리고는 열반하였다.

《무문관》 구지수지 [9]

여기서 구지선사를 따라한 동자의 손가락은 1 '깨달음이 없는 단순 흉내내기이자, 모르는데도 스승의 권위를 이용해서 가르쳐 주고자하는 헛된 명예에 대한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 2 구지선사는 동자에게 그런 집착을 단칼에 끊어버리는 결단을 내리라고 충격을 준다. 동자의 손가락을 자르는 것이다. 3 집착이 사라진 그 자리에, 구지선사는 다시 손가락을 세운다. 이 의미는 자신의 손가락(생각)을 세우라는 것. 아무생각없이 따라하지 말고, 자신만의 온전한 생각을 자유자재로 펼쳐라는 뜻이다. 1 - 2 - 3 의 구조. 동자는 그제서야 구지선사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운문 선사에게 한 선승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하였다.

“마른 똥막대기니라.”

《무문관》 운문시궐 [10]

1. 부처에 대한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집착이다. 자신이 스스로 부처가 될 생각을 하지않고, 부처가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닥달하고 있는 셈. '스스로가' 깨닫는 것[11]이 부처가 되는 길인데, 부처가 무엇인지 '남에게' 묻고 있다. 2+3. 마른 똥막대기라는 충격을 줘서 그런 생각이 집착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줌과 동시에, 스스로 진리를 구하지 않고 남에게 물어보는 행위 자체는 '똥막대기'일 따름이라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부처의 이론을 배운다고, 삶의 괴로움이 사라질까? 아니다. 자신의 집착과 습관을 끊어버리고자 하는 결단력에, 그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다.

결단하지 않으면, 불교이론을 백날 배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당장 자기자신의 주인은 자신이라고 선언하고 결단을 내려라.

이것이 교종과 선종의 차이점이다. 불교이론을 단순히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이 교종이고, 충격을 통해서 단박에 결단을 내려서 깨닫게 하는 것이 선종인 셈. 이를 돈오(頓悟: 갑자기 깨달음)라고 한다.


3. 관련 고사[편집]


  • 대도무문
  • 백척간두 진일보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12]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4. 여담[편집]


  • 김영삼 대통령이 이 책에 나온 대도무문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 무문관은 남송 시대에 사용하던 백화문으로 집필되어 고전 한문과는 어투가 상당히 다르며, 현대 표준중국어와도 또 다르다. 이러한 언어 차이로 인해, 무문관뿐 아니라 선불교 관련 서적 중에서는 오역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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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자의 이름인 무문혜개도 여기서 나온듯. 아니면 자신의 앞글자 무문을 사용해서 책을 만든 것일 수도..[2] 판단 기준은 자신의 생각인가? 아닌가? 이다. 어떤 질문과 아이디어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이나 남의 권위에서 나온 것이라면, 거기에 문제 의식을 느껴야 된다는 것.[3] 또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서 기존의 습관(習)을 끊어버림.[4] 자기 생각의 주인은, 자기자신이다.[5] 다만, 2와 3은 말로 보여줄 때, 합쳐지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1. 집착을 인식. 2. 충격을 주는 말+자신의 자유로운 생각 으로 구성된다.[6] 1-2-3 구조와 1-2 구조 이외의 화두들은, 비교적 솔직하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경우이다.[7] 벽암록에서는 뜻을 명확하게 하지 말고, 애매하고 모호한 곳에 놓아서, 간택(선택)하지 말라고 한다. 그럼 '선택하지 말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이다.(不識) 즉, 벽암록은 반야를 안다면, 자신의 언어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그 궁구에 동원된 의식 전체가 어떠한 실체도 없는 언어적 환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상대적인 것이라 나뉘어 질 수 없어서, 더 큰 범주에서 하나로 보는 것인데, 이걸 언어적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단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지, 그것을 탐구하는 의식자체는 의미없는 환상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8] 쉽게 말하면, 언어는 정수를 말하고, 현실은 실수를 말한다. 언어는 수많은 점들이 모인 것이고, 현실은 하나의 연결된 선이다. 언어는 하나하나가 끊어진 디지털이고, 현실은 모든 것이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는 아날로그이다. 따라서 언어로 현실을 표현할 수 없을 따름이지, 그것을 궁구하는 의식 전체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9] 원문 俱胝和尙, 凡有詰問, 唯擧一指. 後有童子, 因外人問, 和尙說何法要. 童子亦豎指頭. 胝聞, 遂以刃斷其指. 童子負痛號哭而去. 胝復召之. 童子迴首. 胝卻豎起指. 童子忽然領悟. 胝將順世, 謂衆曰, 吾得天龍一指頭禪, 一生受用不盡. 言訖示滅.[10] 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橛.[11] 자신의 문제는 자신만이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대답을 세상에 당당히 내놓을 줄 아는 것. 이럴 줄 아는 사람이 곧 부처이다.[12] 달마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