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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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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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본명
3. 생전 호칭
4. 명성황후
5. 일본 문서의 민비 호칭 등장
6. 명성황후 사후 등장한 국내의 민비 호칭 기록
7.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호칭 명성황후
8. 엄비와 영친왕비
9. 고종과의 호칭 표기의 형평성
10. 흥선대원군과의 호칭 표기의 형평성
11. 책봉에 따른 호칭



1. 개요[편집]


명성황후의 호칭에 관한 문서


2. 본명[편집]


본명을 두고 여러 설이 있다. 조선시대의 평민, 특히 여성들은 아명만 있고 정식 이름이 따로 없는 경우가 흔했으며, 근본있는 사대부가 여인들은 이름이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출가외인으로 족보에 딸이 있다는 정보만 남고 이름은 올라가지 않는 일이 많아지면서[1]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사대부 호칭문화 자체가 어릴 땐 아명을, 문서 등에는 관직명이나 호를, 친한 사이엔 서로 자를 주로 부르며 본명은 관례를 치르면서 호적에 올리는 용도로서, 실제 일상에선 별로 쓰지를 않는 편이며 함부로 남의 본명을 부르는 걸 무례하고 흉한 일로 여겼다. [2] 더구나 엄격한 남녀구분으로 사대부가의 여식 이름이 함부로 바깥 남자들 입에 오르내릴 경우를 매우 꺼렸기 때문에 친족 외에는 거의 알려주지를 않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여성들의 본명확인이 어렵다.

널리 알려진 이름은 민자영이다. '자영'은 소설이 출처라는데 줄리에트 모리오의 《운현궁》, 정비석이 쓴 《소설 민비》 등에서 나온 작명이라는 것이다. 다만 정비석은 창작이 아니고 어느 연구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적었다고 했다.

다른 이름으로 유력한 것은 아영이다. 학술 자료의 기본으로 쓰이는 《열성왕비세보 열성황후왕비세보》(列聖王妃世譜列聖皇后王妃世譜)에는 '아영'으로 적혀 있다. 그러나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다보니 바뀌었다"며 '아영' 대신 '자영'을 밀고 있다. 그 외에 아명은 항렬을 따른 '정호'(貞鎬)였다는 말도 있으나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다른 항렬자를 사용한 예도 있어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아영"이란 이름이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물론, 지금 태어나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널리 사용되는 것을 봤을 때 이 설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세련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3][4]

본명이 '자영'이라고 사전에 등록된 경우가 많지만 정식 사료가 '아영'인 것으로 봐서는 별도의 학술적 근거보다는 《여흥 민씨 족보》에 따른 것으로 추정 중인데 왕비가 되고 나서 이름을 만들어 족보에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3. 생전 호칭[편집]


고종실록의 원문에서는 왕후(王后) 191번, 중궁(中宮) 174번 , 왕비(王妃) 32번, 중전(中殿) 0번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승정원일기에서는 중궁 5575번, 왕후 1433번, 왕비 43번, 중전 2번의 빈도 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종실록에서는 드물게 왕후민씨(王后閔氏)라 4번, 왕비민씨(王妃閔氏)라 1번 나타나며, 승정원일기에서는 각각 1차례씩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보아 황후 책봉 이전에는 주로 중궁이나 왕후로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명성황후[편집]


1897년 11월 6일 고종황제가 시호를 명성황후로 책봉하였다.

휘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齊徽烈穆明成太皇后)이며,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제휘열목'[5]은 존호(尊號)이다. '명성'은 시호(諡號)이고 '태'는 황제의 정실 황후[6]인 정후(正后)만이 받을 수 있는 황제/황후 신분임을 나타내며, 황제와 황후는 같은 글자를 받는 후호(后號)이다.

'이 해 음력 10월 11일에 시호(諡號)를 명성 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以本年陰曆十月十一日, 冊諡爲明成皇后。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6일 양력


본년(本年) 음력 10월 11일에 명성황후(明成皇后)라는 시호를 책봉하였다. 以本年陰曆十月十一日, 冊諡爲明成皇后。승정원일기 고종 34년 10월 12일 양력


2000년 이후로 대한제국기에 황후로 추존된 조선의 왕비들의 황후로서의 명칭은 네 글자보다는 다섯 글자로 된 경우가 주로 쓰이는데, 책봉된 명성황후만은 '명성황후'로 부르는 경우가 적다. 5글자 중 앞의 2글자는 생애를 상징 및 대표하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한 시호(諡號)이고, 가운데 한 글자는 후호(后號)로서 황제와 정비 황후(계비 황후에게는 후호를 부여할 수 없다)에게만 특별하게 붙이는 존호(存號)이며, 뒤의 두글자는 황제와 황후라는 신분명이다. 명성태황후는 시호가 명성이고 황후로서의 존호인 후호는 태(太)이며 신분명은 황후인 것이다.

황후로 책봉한 이후에는 고종실록에 명성황후(明成皇后)[7] 또는 황후(皇后)로 기록되어 있으며, 사용 사례는 승정원일기가 고종실록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나타난다.


5. 일본 문서의 민비 호칭 등장[편집]


문제가 되는 명칭이 '성+비'로 된 '민비'인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종실록 및 순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는 명성황후를 가리켜 민비라 지칭하는 경우는 단 한차례도 없다.

그러나 일본의 문서에서는 일찍이 민비라는 호칭이 쓰이기 시작하였다. 일설에는 1868년에 일어난 서계거부사건(혹은 국서거부사건) 이후 일본에선 조선 왕실을 가리킬 때 '이왕'과 '민비'라는 단어가 등장했다고 한다.[8]

일본 문서에서 확인되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 1890년 小田切万寿之助 纂著 [小田切万寿之助], [1890] 朝鮮

67쪽 우측에서 3번째 줄에

待ヲ追想シ〓ニ面シテ其水廢シ閔妃ノ一門ヲ排除シ自國黨ナ原政ニ露

~ 국왕급인 민비(閔妃), 집안을 배제시 자국당 ~ 이라 기록#


• 日清戦争 訂2版, 鹿島長次郎 編 興文社, 明27.11

일청전쟁, 정2판, (메이지 27년, 1894년 11월 )

ケ條を發したり一王妃閔妃を廢す二関泳駿関泳渙沈舜澤申正〓其他數名に待罪

34쪽 좌측 4번째 줄에 왕비 민비(閔妃)를 폐한다라 기록#


• 진나카시편 도서 고스기 미코 著 (하쿠야마보, 1904)

PDF 6쪽 목차에 민비릉(閔妃陵)이라 기록#


• 한일합방소사 (요미우리 신문사 이케다 죠타로, 1910)

PDF 55쪽 우측 2번째 줄에 민비라 기록#


또한 일본인들이 집필한 정부 문건, 외교 문서, 책, 소설 등에서 민비 호칭은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

일본인들이 생산한 당대 기록물에서는 우리와 달리 ‘민비’ 호칭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의 朝鮮近世史,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의 近代日鮮關係の硏究 등 정통 역사가들이 집필한 책에서는 주로 ‘왕비’, ‘명성왕후 민씨’, ‘왕비 민씨’ 등으로 기술되었다. 정부 관료 가운데 대표적으로 당대 회상기를 출판한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蹇蹇錄에서는 ‘왕비’ 또는 ‘민비’로 기록하였다. 외교관, 언론인들이 남긴 기록물 가운데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의 在韓苦心錄,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의 漢城之殘夢 등에서는 ‘왕비’로 일관되게 기록되었다. 정통 역사가는 아니지만 여러 권의 역사서를 집필한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와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의 저작물에서는 시종일관 ‘민비’로 기록되었다. 이외에 일본 외무성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문건으로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구한국외교문서에서는 ‘민비’, ‘민왕후’, ‘왕후’, ‘왕후 민씨’ 등으로 호칭되었다. 이처럼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민비’ 호칭이 매우 자연스럽고 폭넓게 통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왕비의 성씨에 왕비 비자를 붙여 호칭하는 사례가 있긴 있었지만 일반적인 용례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고종실록에도 명성황후를 지칭하는 ‘민비’ 호칭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이 남긴 저작물에 ‘민비’ 호칭을 주로 사용한 것은 특정한 의도가 있음을 배제하기 어렵다

여기에는 황후를 폄훼하기 위한 의도가 있음은 물론,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과 자긍심을 깎아내리고 민족감정에 불을 지피려는 악의적 의도가 있다고 판단된다. 앞에서 거론한 일본인들의 저작물에서는 명성황후에 대해 부패 탐학한 민씨일족과 함께 대원군과 정쟁을 일삼으며 국가를 망친 존재로 보고, 의도적으로 ‘민비’라 격하시키는 호칭을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임오유월일기』를 통해 본 명성황후의 피난 생활과 황후 호칭 再考 장영숙 PDF21~23쪽

이와 같이 조선과 대한제국 정부에서 명성황후를 민비로 지칭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으며, 일본의 기록에서 먼저 등장하여 일제강점기에 국내에서 확산된 용어가 민비인 것이다.


6. 명성황후 사후 등장한 국내의 민비 호칭 기록[편집]


민비의 용례가 처음 확인되는 것은 1910년 9월 24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의 기사이다. 이 기사의 내용은 돌아가신 민비전하(閔妃殿下)의 육순을 맞아 이왕전하(李王殿下)께서 경효전(景孝殿)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순종 황제가 1910년 병합 이후 이왕(李王)이 되었으므로 민비(閔妃)라는 말은 이 무렵 붙여진 호칭인 셈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10년 뒤에 민비는 다시 명성황후가 되었다. 1920년 7월 10일자 『매일신보』는 돌아가신 이태왕 전하의 존호를 고종태황제로 올리면서 민비전하의 호칭도 명성황후로 승격시키기로 일본 궁내성이 내정했다고 보도하였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제는 명칭을 민비로 격하하였다가 명성황후로 원위치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후로도 격하시킨 명칭만이 그대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민비는 별로 기분 좋은 호칭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30년대 중반 이후인 민족말살통치기에 들어 다시 민비로 통용했으며 이 호칭은 현대 일본에서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일본의 일부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을 민비로 비유하는 기사를 내는 등 부정적으로 썼으며 이에 한국의 정치권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비판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관련 기사 삭제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

그리고 1920~30년대 황현의 후손이 제작한 매천야록 필사본에서 민비 용어가 1차례 나오고, 1935년에 사망한 윤희순 의사 말년에 재작성한 해평 윤씨 일성록의 기록 중 '왜놈 대장 보거라'의 격문에서 등장한다.

조선의 왕비 중에서 '성+비'로 만들어진 명칭이 유명한 경우로는 명성황후와 순정효황후와 순헌황귀비가 있는데, 명성황후는 민비로 순정효황후는 윤비 또는 윤대비로 순헌황귀비는 엄비라는 명칭이 있었고 그것도 대부분 일제강점기 이후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신문들은 명성황후를 주로 사용하였고, 일본기관지를 비롯한 친일신문은 민비를 주로 사용하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자 기사에서 명성황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1919년에 고종 황제가 훙서했음에도 불구하고 1935년까지 명성황후라는 호칭만을 사용하였다.

고종 황제의 경우에는 1932년까지 자유롭게 등장하는데, 이는 1910년에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 황실의 산하 왕공족으로 편입이 되고 대한제국 황실 인물과 재산을 관리하는 이왕직라는 조선총독부 산하 관청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고, 대한제국 황실 가족들을 이왕가(李王家)라고 호칭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반 한국인들의 인식은 "민비"가 아니라 "명성황후"로 인식하고 호칭하였음이 명백하다는 증거이다.

다만, 이 동아일보 기사에서 1936년부터 명성황후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1940년 8월 11일에 강제 폐간이 될 때까지 다시는 등장하지를 않는데, 이는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내선일체"를 조선인들에게 강제하면서 대한제국 당시의 직첩와 시호 사용을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대한매일신보를 강제적으로 흡수합병하여 1910년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재탄생한 매일신보 1920년 5월 11일자 기사 "殿臺無主 野草班, 永成門大闕의 운명"[9]이란 기사에서 매일신보기사 "의효전의 (중략) 홍대비전하와 민비 엄비 전하의 삼년상을 받을었던 역사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1935년도부터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내선일체가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1937년 미나미 총독이 부임한 후 본격적으로 내선일체라는 용어가 보급되기는 하였지만 이 내선일체는 이미 1927년도부터 친일파 선우선에 의해 만들어진 신조어로서 종종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을 보면, 윤희순 의병장이 <왜놈 대장 보거라>를 작성했을 당시에 친일 언론에 의해 일본식 왕공족 표현인 "민비"라는 용어는 조선 거주 일본인들과 이들을 상대하는 조선인들에게 꾸준히 보급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대표적인 예가 위에 기술했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이다. 다만 위의 기술대로 민족 언론들은 "명성황후"를 1935년까지 자유롭게 사용하였던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조선의 여성들은 통칭으로 통상적인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왕실 여성들도 존호나 지위명이 통칭으로 쓰였고, 후궁은 대부분 직첩명+성씨(또는 성+직첩명)이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호칭 체계는 조선과 다르다. 일본에선 여성에게도 통상적인 '이름'이 있지만, 일본 황실은 성씨가 없다. 그 때문에 황족과 결혼한 여성을 통칭할 때 주로 '이름+비', '이름+황후'가 쓰인다. 호칭 체계에서 두 나라가 같았던 건 군주의 정실 부인에게만 시호를 올렸고 이를 통칭으로 사용했다는 것 정도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한 후에 왕공족이라는 신분을 만들어 조선의 황족들을 집어넣었다.

조선 초기 이후로 왕비는 대비가 되기 전까지는 존호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말은 틀린 말이다. 조선초기 당시의 "존호+비(妃)" 또는 "성씨+비(妃)" 방식으로 불리우지 않았을 뿐 대비가 아닌 중전일 때에도 존호를 받았으나[10][11] 사용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비는 중궁전, 중전, 곤전, 내전 등으로 불렀을 뿐이다. 명성황후도 중궁전 시절에 존호를 받았다.[12][13]

명성황후 국장이 마무리 되기 전에 명성황후에겐 고종이 준 '명성'이라는시호가 있었지만, 조선을 병합하고 대한제국의 황족들의 신분을 이왕가로 격하시킨 일제강점기 상황에서 그 시호를 '호칭'으로 쓴다는 건 조선총독부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통칭으로 사용될 호칭으로 일본 황실 표기법인 '성+비'로 만든 명칭이 생겼고, 그 후로 이 호칭이 일본인들이나 조선인들 사이에서 통칭으로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조 링크[14] 참조 링크2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일본의 방식에 맞게 바뀐 것으로 봐야 하는데 이는 일제의 잔재의 하나이므로 부적절한 용어인 것이다.

매천아록에 민비라는 원문이 기록은 단 한 차례인데 매천야록 하권 8장 대왕대비 조씨 승하에 관련된 것으로 다음과 같다.

"庚寅四月十七日丙辰, 大王大妃趙氏昇遐, 壽八十三, 諡曰神貞, 祔葬綏陵, 上于君人之德, 無一允蹈, 而惟事大妃以孝謹聞, 然自閔妃預政以來, 大妃畏其氣㷔, 常斂避之, 又趙成夏·寧夏等死, 私宗凋瘁, 益悲傷无聊, 國家禍變因仍, 其艱險萬狀, 皆備甞之, 甞對宮人流涕, 歎不死"

이를 국역하면 아래와 같다.
"경인년(1890) 4월 17일에 대왕대비 조씨가 승하하였다. 나이는 83세이며 시호는 神貞으로 綏陵에 附葬하였다. 고종은 임금의 덕을 한 번도 실천하지 못했지만 조대비를 섬기는 데 있어서는 효성을 다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민비가 정사에 참여한 이후에는 조대비가 그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늘 그를 피하였고,"

그런데 이 매천야록의 기록에서 두 가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첫째, 신정왕후도 명성황후도 둘 다 왕비인데 이 한자 원문을 보면 누가봐도 양반이자 유학자인 황현이 신정황후는 대왕대비 조씨(= 직첩+성씨)라고 하면서 유독 명성황후만 민비(= 성씨+직첩)라고 두 왕비의 호칭 표기법을 다르게 기록한 것은 분명히 이상한 것이다.

둘째. 신정왕후가 며느리인 명성황후를 두려워하고 기피하였다고 서술한 점이다.
명성황후를 간택하는 간택식에 분명히 신정왕후도 참여하여 명성황후를 간택하였다. 또한 명성황후의 남편인 고종황제를 임금으로 지명한 사람이 신정왕후 임으로 고종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 조차 고종의 왕통 승계의 적통성을 무너트리는 행위인 신정왕후를 업신여기는 행동을 할 수 없고, 성리학적 지배이념에서 아주 벗어나는 패륜으로 치부되어 신하들의 주청으로 폐서인될 명목을 삼도록 명성황후가 행동했겠느냐?는 점에서 위 문장의 신빙성은 더 낮아진다.

비록 내명부의 수장이 대왕대비가 아니라 왕비인 명성황후이고 신분법적으로는 대왕대비 조씨가 명성황후의 신하관계이기는 하나 그것은 성리학적 개념인 충(忠)에 입각한 이론적인 신분법상 관계이고, 충과 함께 성리학의 상호보완적 개념인 효(孝)에 입각하여 매천야록의 기록을 본다면 이미 폐서인되고도 남았을 행동을 명성황후가 했다는 폄훼의 의미라는 것은 금방 알 수가 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서 며느리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인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는 성종 시대의 폐비 윤씨 사례 외에는 없었다[15]. 붕당정치가 극심했던 조선 후기에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출신 붕당이 달랐어도 며느리인 왕비가 시어머니를 핍박하거나 두려워하게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가 며느리인 왕비를 폐하라는 전교를 내리면 임금은 그 전교를 따라야 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 있는 자리에 있었던 신정왕후가, 정치에 참여한 시기 이후의 명성황후를 두려워했다고 기록한 점은 1884년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의 개화파에 의해서 신정왕후의 조카 조영하가 참살된 것을 명성황후의 책임으로 돌리려는 의도 또는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여인은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소위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속설)[16]"는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명성황후를 폄훼하여 나라가 망한 책임을 명성황후에게 돌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매천야록의 필사자가 삽입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제 의도설론자들의 반론이다. 실제로 위의 원문 기록 뒤에 조영하의 죽음이 언급된다.

비록 연표에 민비라는 표현이 또 등장하기는 하나,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1910년의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자살을 하였기에 저자가 직접 연표를 작성했을리는 만무하고, 그 후손들의 필사본으로 매천야록을 비밀리 보관하던 중에 연표를 붙여서 완성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황현이 살아있던 당시에 민비라는 표현이 널리 보급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한 점이 너무 많다. 매천야록의 모든 기록에 중전 민씨라고 표기한 것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민비 호칭이 등장하였다고해서 그 당시의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호칭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7.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호칭 명성황후[편집]


1983년 대한민국 문교부는 그동안 교과서에 표기되었던 민비 호칭을 명성황후로 표기하도록 바꾼 이래로# 교육부가 검정하는 국검정 교과서는 줄곧 명성황후로 표기하였고, 현행 고등학교 교과서들 전부 명성황후로 표기하며 정부의 공식문서에서도 명성황후로 표기하고 있다.

1983년 이후 유일하게 민비로 표현한 경우는 2013년 교학사에서 출판한 검정교과서에서 '알렌은 고종과 민비의 시의로 임명되었으며(217쪽)' 부분 등이 있었으나 국회에서 지적 및 언론에 보도되었고 # 이후 교육부의 수정 지시에 따라 '민비'라는 호칭을 '명성황후'로 교체하거나 삭제하였다.# 그리고 교학사가 집필한 한국사 교과서의 문제점이 연달아 터지며 2020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사 교과서를 집필하지 않고 있다.#


8. 엄비와 영친왕비[편집]


순헌황귀비 엄씨의 경우 엄귀비(嚴淳嬪) 또는 엄비(嚴妃)라고도 불리는데 엄귀비는 계비 중 으뜸가는 지위를 뜻하는 귀비에 성을 붙인 호칭으로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11월 27일 국역의 주석에서 1차례 등장하고# 승정원일기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엄비는 순종실록부록 2권, 순종 부록 4년 9월 1일 기사에서 1차례 등장하고# 승정원일기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고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엄귀비라고 부르는 것을 제시한 신하도 파면을 고려할 만큼 무례하다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계비를 성+씨로 호칭한 전례가 있기에 순헌황귀비 엄씨가 궁녀 출신으로 고종의 후궁인 것을 고려하면 적절한 것으로 볼 수 도 있으나 당시 조선왕조 또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엄귀비라고 부르는 것을 무례하게 여겼고, 엄귀비 또는 엄비는 한번도 쓰이지 않은 호칭이라면 부적절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작성한 순종실록부록에서 엄비가 등장하고 엄귀비 또는 엄비는 자연스럽게 통용된 것을 보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통용된 호칭이라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는 당시의 언론이나 이왕직 관련 문서에 반드시 '영(친)왕비 전하'라는 명칭을 병행했다는 점을 보면, 영친왕비보다 낮은 직첩으로 명성황후를 격하시키기 위해서 민비라는 호칭어를 보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명성황후의 며느리인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가 일본인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비(李妃)라고 불리운 적은 단 한번도 없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민비'호칭의 창조 및 보급에 대한 의도 즉 격하의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친왕비 사례를 볼때 볼 때 명성황후와 순헌황귀비 엄씨라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책봉된 직첩보다 민비, 엄비라는 호칭이 일제감정기 시절에 통용된 것은 일제의 의도로 볼 수 있다.


9. 고종과의 호칭 표기의 형평성[편집]


일부 민비 긍정론자들 사이에서 '민비를 명성황후라고 부른다면 고종도 광무제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명성황후 호칭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내인 민비는 황후 취급하는 주제에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은 황제가 아닌 조선 왕 취급하여 고종이라 비하해서 부르며 남녀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고종은 왕의 호칭이니 그렇게 부른다면 고종의 아내인 민씨도 황후가 아니라 왕비로 취급하여 민비로 불러야만 부부 간 호칭의 형평성이 성립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고종' 같이 '~조', '~종'으로 붙이는 묘호는 본래 황제의 나라에서 황제 사후 종묘에 오를 때 붙여지는 명칭으로 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주장이다[17]

고종 황제는 칭제를 했고, 그 이전의 조선의 왕은 묘호가 본래 중국 황제의 호칭이든 뭐든 간에 황제가 아닌 왕이었음이 분명하므로 양자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면 '광무제'는 부적절하다 할 지라도 '고종'이 아닌 '고종 황제'라고 표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고려한 건지, 1983년부터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종'을 '고종 황제'로 고쳐 표기하기로 결정되었다.

인조실록에 만력제를 그냥 신종(神宗)이고 표기한 기록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된 태조 장조(사도세자) 정조 순조를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에서 장조의황제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라고 호칭하기도 하지만 묘호로만 호칭하기도 했으므로, 고종황제를 그냥 고종이라고만 호칭한다고 해서 명성황후의 호칭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건 아니다.

일례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부르는 영조, 정조, 순조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의 표지부분의 표제를 보면 첫 묘호인 영종, 정종,순종으로 표기되어 있고, 추후에 추존한 명칭인 영조, 정조, 순조로 표제를 바꾸지 않았다는 것만 봐도 고종이라 부르는 것이 잘못된 호칭이 아닌 것이다.


10. 흥선대원군과의 호칭 표기의 형평성[편집]


이하응의 호칭으로 흔히 쓰이는 흥선 '대원군'은 명백히 조선 왕조의 호칭이고 대한제국에서 지어올린 호칭은 '흥선헌의대원왕'이었다. 이럼에도, 심지어 교과서에서 마저도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이라 쓰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의식해서인지, 경기도와 문화재청은 흥선대원군묘라는 명칭을 1907년에 추존한 명칭인 흥선대원왕 흥원으로 복원하기로 2018년 10월 20일에 결정하였다.[18]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은 흥선대원왕으로 묘는 흥원(興園)으로 공식표기하기로 결정하였다.문화재청 공식홈페이지 설명문 관련기사

다만 흥선대원군 호칭은 민비 호칭과는 다르게 일제가 폄하하기 위해 붙인 것도 아니고, 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었고 생전에 그렇게 불린 조선 정부의 공식호칭이었던 만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 편이다.


11. 책봉에 따른 호칭[편집]


명성태황후가 소위 '추존황후'라서 절대로 명성황후라고 부르면 안되고, 명성왕후라고 불러야 한다 또는 더나아가서 민비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순종효황제의 첫째 부인인 순명효황후 민씨는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라고 물으면 모두들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위에서 서술한 순정효황후 윤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거기에 더 나아가서 영친왕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아니면 황태자 또는 의민황태자로 불러야 하느냐를 물어보면 더더욱 말이 없다.

왜냐하면 순명효황후 민씨는 생존 당시에 황후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며 순정효황후 윤씨의 시호(諡號, 순정)와 후호(后號, 효)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국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국가기관인 문화재관리국에서 내린 사시[19]이기 때문인데, 순명효황후 민씨의 경우 일제에 의해 고종황제가 강제퇴위된 후 순종황제가 등극한 후에 황태자빈 신분으로 사망한 민씨를 추존황후론을 주창하는 사람들 말 그대로 순종황제가 직접 황후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추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따르면 순명효황후 민씨는 '황태자빈 민씨'로 불러야 함에도, 우리나라 국민 중에서 "순명효황후 민씨"라고 모두들 불렀으면 불렀지, 절대로 "황태자빈 민씨"로 호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영친왕의 경우에 지금은 영친왕으로 널리 알려져서 그렇게 불리우고 있으나, 영친왕은 순종효황제 시절에 공식적으로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광복후 박정희 정권때 귀국한 후 사망하면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사시로 "의민"을 올렸다. 추촌황후론 또는 민비 사용론 주장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순종효황제에 의해서 황태자로 정식 책봉됨과 동시에 친왕인 영친왕부는 폐지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영친왕이라고 부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조차도 영친왕이라고 호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성왕후"로 호칭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논리도 무논리인 것은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만 보아도 알 수가 있는데, 명성이라는 시호가 정해진 것은 1897년 양력 3월 2일이다. 하지만 이 날에 시호가 법적으로는 반포되지를 않아서 사용할 수가 없고 그저 조선정부 내부에서 논의하고 결정한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1897년 양력 10월 12일에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고 명성황후를 황후로 정식 책봉하고 이를 대례의궤와 승정원일기와 선원보략수정의궤(1902년)에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나서 1897년 양력 11월 5일에 명성황후의 빈전에 시호를 책봉하여 올리고, 다음날인 1897년 양력 11월 6일에서야 시호가 정식으로 반포함으로서 법적인 절차가 마무리된 것인데, 시호가 반포될 때에는 왕후가 아닌 황후의 신분으로 시호를 책봉받은 것임으로 절대로 "명성왕후"라는 표현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 역사적인 팩트인 것이다.

민비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 또한 맞지 않는 것이, 조선에는 추존왕후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한씨, 문종의 정비이자 세자빈 신분으로 사망한 현덕왕후 권씨, 예종 정비 장순왕후 한씨, 중종의 정비였으나 왕비 책봉을 못받고 이혼 당한 단경왕후 신씨, 경종의 정비이자 세자빈 신분으로 사망한 단의왕후 심씨 등등 이들 모두 "성씨+비"로 부르지 않으면서, 유독 명성황후만을 "민비"로 부르는 것은 자유라고 외치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논리일 뿐만 아니라 명성황후를 비하하기 위해 일본이 만들어낸 것을 따르자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행위이다.

그리고 경국대전에 따르면 왕비는 왕과 동급인 지존인 신분이다.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면 고종황제는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찬성론자에게 물어보면 이 역시 꿀먹은 벙어리가 된다. "이(李) 고종"이라고 부를 것인가? 그러면 정조대왕은? "이(李) 정조"인 것인가?

이렇게 "명성황후 추존론 신봉자"들 스스로도 자가당착에 빠지는 논리의 모순을 스스로 짊어지고서 유독 명성황후의 지위와 호칭을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식민사관의 신봉자이면서 명성태황후를 "여우"에 비유했던 일본인들처럼 자신이 친일파임을 내세우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며, 황제국의 직제와 규정들을 조선왕조시절로 대입하여 인식하고 조선왕조시절의 용어를 사용하거나, 일제강점기 당시의 일본 황족 소속의 왕공족으로 격하된 이왕가 상태로 사용된 용어를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대한제국의 '대한'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명기된 법적 정통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천명한 현대의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통해 유추해보았을 때, 대한제국을 폄훼하는 용어를 버젓이 사용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법적인 계승의 정통성을 폄훼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식민사관이다.

따라서 대한제국은 엄연한 황제국이었음으로, 관련 용어와 관료조직 및 황실과 관련된 용어들은 모두 황제국에 맞게 기술되고 불리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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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영향이 남아있던 조선 전기엔 딸은 물론 딸이 낳은 외손들도 자세히 족보에 올려 집안에 따라선 매우 방대한 양의 책이 되기도 했다.[2] 왕의 이름인 글자는 문서에조차 등장시키지 않는 문화였다. 피휘.[3] 비슷한 예로 실학자 연암 박지원이 있다.[4] 그러나 더 이전 과거 정조대 신하인 다산 정약용의 아내 홍씨도 본명이 '혜연' 이었다는 설을 보면? 어차피 조선시대나 현대나 음성으로는 한국어, 문자로는 한자를 쓰면서 유교적 관념 하에서 이름을 만들다 보면 결과물은 크게 변동이 없었을 지도...[5] 두 글자씩 떼어내듯이 읽는다[6] 황제는 《예기》(禮記)에 따라 2명의 황후를 둘 수 있었으나, 정후와 차비(此妃)인 측후의 위계와 구분을 엄격히 했는데, 후호(后號)는 정후(正后)만이 받을 수 있다.[7] 26번[8] 일본과 조선은 대마도를 거쳐 거래했었는데 일본이 대마도로 보낼 때는 일본갑 조선을로 보냈는데 대마도가 자체 필터링을 거쳐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보낼 때는 조선갑 일본을로 바뀌었고 반대로 조선에서 대마도 대마도에서 일본으로 보낼 때는 마찬가지로 필터를 거쳐 조선갑 일본을이 → 일본갑 조선을로 바뀌어 일본 조정에 보내진다. 이는 조선 일본 양국의 암묵적 용인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대마도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되기 위해 위조한 것도 있지만 대마도 입장에서는 조선일본의 사이가 좋아야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기에 껄그러운 내용들을 순화해서 좋게좋게 넘어가게끔 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로는 상황이 바뀌어 일본이 직접 조선으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서계거부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 운요호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러 차례 외교적 시비가 있었고 이때 일본에선 정한론이 대두되는 등 조선에 대한 악감정이 커졌다. 이 외교적 시비와 '일본은 상국, 조선은 하국'이란 인식에 나온 명칭인 것.[9] 영성문대궐이란, 덕수궁 신선원전 권역을 말하며 덕수궁 중전인 중화전 권역과 멀리 떨어져서 이루어진 권역이라서 1910년경부터 신선원전 구역의 정문인 영성문을 차용해 영성문대궐이라고 했다. 지금의 덕수초등학교 북쪽 사거리에 위치해 있었다[10] 선조실록 24권, 선조 23년 2월 11일 계미 1번째기사, "중전(中殿, 의인왕후)의 존호를 ‘장성(章聖)’으로 올렸다"[11]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2월 20일 경오 5번째기사, 고종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3대비전과 중궁에게도 존호를 가상하고 올리라는 명령, "옛날 우리 영묘(英廟, 영조)에 존호를 올릴 때면 그때마다 인원 성모(仁元聖母, 인원왕후)에게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한 예가 있었으니, 이것은 우리 왕조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이고 또 연전에 조정의 신하들이 이것을 끌어다 예식 절차를 의논한 일이 있었다"[12]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2월 24일 갑술 2번째기사, "중궁전에 올릴 존호의 망은 ‘효자(孝慈)’입니다."[13]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22일 양력 2번째기사, 대행황후의 지문 어제 행록 중에서 "황후는 여러 차례 책봉받는 글을 받았다. 계유년에는 조신(朝臣)들이 존호(尊號)를 올려 ‘효자(孝慈)’라고 하였고 무자(1888), 경인(1890), 임진년(1892)에는 황태자가 존호(尊號)를 더 올려 ‘원성 정화 합천(元聖正化合天)’이라고 하였다."[14] 이 블로그의 글 중 "명성황후는 생존에 존호를 받지 않았다"라고 기술한 부분은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살펴보건데 명백한 오류임을 밝힌다[15] 폐비 윤씨를 중전의 자리에 밀어준 사람이 세조비 정희왕후인데, 폐비 윤씨의 패악질이 도를 넘자 성종과 더불어 중전 폐비에 앞장 섰으며, 여걸로 일컬어지는 인수대비조차 폐비 윤씨를 두려워 하여 수랏상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했다. 이렇게 중전이 윗전을 업신여긴 결과는 폐비 윤씨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폐출인데, 명성황후가 폐비 윤씨의 일을 모르고 신정왕후를 두려워하게 했다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독서를 많이 했다고 알려진 명성황후가 왕비의 필독서인 인수대비의 저술서인 내훈(內訓)을 안읽었을 리가 만무하고, 고종과 가례를 올리기 전에 거처한 운현궁 노락당에서 경복궁에서 파견 나온 상궁들 뿐만 아니라 비종법적 친 시어머니이자 가례식에서 친정어머니 역할을 한 흥선대원군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분명히 내훈을 바탕으로 교육을 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16] 실제로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의 수령청정을 거두는 하교에서 "예로부터 왕비가 조정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것은 곧 나라를 다스리는 데 큰 불행이다. (중략) 내가 계속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나라의 체모(體貌, 체면)를 존중하고 큰 법을 바로 세우는 데 심히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말한바가 있다.(고종실록, 고종 3년(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2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17] '연호+제' 형태의 황제호칭은 명, 청대에 황제 한 명 당 한 가지 연호만 쓰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면서 정착된 호칭이지 직전 원나라 까지만 하더라도 (죽은) 황제의 호칭으로 묘호를 압도적으로 많이 썼다. 그래서 명목상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이었던 한반도 왕조들에서는 원칙적으로는 쓸 수 없었고 심지어는 정응태 무고사건 당시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명을 친다고 주장할 때 든 근거 중 하나로 제후국 주제에 묘호를 쓴다는 것을 들 정도였다. 정응태의 주장 중에서 묘호 사용만은 사실이었기에 조선은 중국에 고려 때부터 이어온 실수였다고 싹싹 빌었다. 물론 몰라서 쓴게 아니라 자기 자존심 세우게기 용으로 쓴 것이다. 건국 시점부터 대놓고 외왕내제했던 고려에 비해, 건국 시점부터 명나라라는 확고한 슈퍼파워가 있었던 조선이 사용한 약화된 외왕내제라 보면 된다.[18] 이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흥선대원군묘를 기부채납하기로 한 후손들에 대한 예우와 문화재청 조선왕릉관리사무소의 흥선대원왕 및 흥원이라는 명칭에 대한 역사적 사실 조회를 한 건의를 고려한 결과이다. [19] 의민황태자 영친왕의 차남 회은황태손 이구의 경우 "회은"이란 시호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내린 사시인데다가 대한제국이 책봉한 황태손이 아니라서 회은황태손이란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