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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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Duchess Marie of Mecklenburg-Schwerin


이름
독일어
마리 알렉산드리네 엘리자베트 엘레오노레
(Marie Alexandrine Elisabeth Eleonore)
러시아어
마리야 파블로브나
(Мари́я Па́вловна)
출생
1854년 5월 14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루트비히슬루스트
사망
1920년 9월 6일 (향년 66세)
프랑스 콩트렉세빌
배우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74년 결혼/1909년 사망)
자녀
알렉산드르, 키릴, 보리스, 안드레이, 옐레나
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어머니
로이스-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공녀
형제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파울 프리드리히, 니콜라우스, 요한 알브레히트, 알렉산더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1. 개요
2. 생애
2.1. 조카 니콜라이 2세 일가와 갈등
2.2. 말년
3. 여담



1. 개요[편집]


러시아 제국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아내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비 옐레나의 어머니이다.

덴마크의 왕비 알렉산드리네와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 체칠리에의 큰고모이다.


2. 생애[편집]


1854년 5월 14일 루트비히스루스트 궁전에서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대공과 로이스-케스트리츠의 아우구스타 공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1862년 어머니 아우구스타 대공비가 사망했고, 아버지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두 번의 재혼을 하면서 계모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 공녀[1]의 손에 자랐다.

1874년 8월 16일, 마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삼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다.[2]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루터교를 믿고 있었던 마리는 정교회로 개종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시어머니가 될 마리야 황후는 마리의 개종 거부를 반발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2세는 삼남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가 비정통파 여성과 결혼하도록 허용했고, 결국 마리는 '마리야 파블로브나'로 러시아식 이름으로 개명한 채 결혼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네바 강의 궁전 제방에 위치한 블라디미르 궁전에서 살기 시작했다.


2.1. 조카 니콜라이 2세 일가와 갈등[편집]


마리야 파블로브나는 법원 사회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녀는 매우 야심적이어서 조카며느리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조차도 마리야 파블로브나를 두려워하여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노력했다고 했다.

다만 조카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일가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계승법에 따르면, 알렉세이 황태자가 21세가 되기 전에 황제가 죽으면 마리의 장남 키릴 대공이 섭정이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3] 니콜라이 2세는 현행법에 따라 알렉세이의 큰누나 올가 공주를 섭정으로 지명했고, 후견인을 부인 알렉산드라 황후로 지명했다. 마리야는 화가 났지만 니콜라이 2세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4]


2.2. 말년[편집]


1908년 마리야는 정교회로 개종했다. 러시아 주재 영국 대사의 딸인 메리엘 뷰캐넌은 "지난 얼마 동안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는 러일전쟁 중 부상을 입은 아들 키릴의 안전을 지켜달라고 성모상께 기도했고, 키릴이 무사히 탈출한 것을 보고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아 정교회로 개종했다."고 언급했다. 1년 후 남편 블라디미르 대공이 사망하자, 마리야는 남편의 죽음을 충격을 받아 남은 생애 동안 상복을 입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자, 마리야는 러시아를 진심으로 지지했다.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고민에 빠졌는데, "내 마음과 내 정신 속에서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라고 회상하면서 러시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러시아 제국이 몰락한 후 마리야는 키슬로보츠크로 떠났다. 1920년 2월에 그녀는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행 배를 타고 러시아를 떠났고, 베니스에서 프랑스로 떠나 콩트렉세빌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떠났다. 1920년 8월 6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콩트렉세빌에 있는 사도와 동등한 막달라 마리아와 블라디미르 대공을 기리기 위해 교회 무덤에 묻혔다.


3. 여담[편집]


  • 애칭은 '미헨'으로 스타일 감각이 뛰어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아서 왕자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독일을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은 마리가 매우 예쁘다고 언급했다. 남편이 될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역시 마리가 놀랍도록 표현력이 풍부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 시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와 가까운 사이였다. '헌신적이고 친절한 시아버지'라고 회상했지만, 알렉산드르 2세가 말년에 정부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와 불륜을 하자마자 분노했다. '그 여자는 시아버지에게 귀머거리와 눈 멀게 만들기 위해 주문을 걸어 묶은 것 같다.'고 예카테리나를 비난했다. 게다가 시어머니 마리야 황후의 오빠 루트비히 3세에게 '황제 폐하는 신민인 우리에게 이 여자를 친하게 지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불안하게 만드는 내부 갈등과 감정, 의무, 외부 압력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 윗동서인 다우마 황후랑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마리는 자기 남편 블라디미르 대공이 알렉산드르 3세보다 더 나은 황제가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자, 다우마 황후는 자기 남편 알렉산드르 3세와 자신을 업신여긴 마리를 경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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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헬미나 여왕의 국서 헨드릭 공의 어머니이다.[2] 블라디미르 대공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는 마리의 할아버지 파울 프리드리히 대공의 사촌이었다. 블라디미르와 마리는 7촌 관계인 셈이다.[3] 니콜라이 2세의 남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평민 여성 나탈리야 브라소바랑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왕위 계승 순위에서 밀려났다.[4] 1916년 마리는 조카손녀 올가 공주와 자신의 차남 보리스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사이의 결혼 가능성에 대해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 황후는 "18살 연하의 순수하고 상큼한 소녀"가 "잘 사용하고 반쯤 지쳤으며 뻔뻔한 청년"과 결혼하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마리의 제안을 거절했고, 마리는 알렉산드라 황후의 갑작스러운 거절에 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