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레타 레이욘후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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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스웨덴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왕비이자 요한 3세와 칼 9세의 어머니.
스웨덴에서 이상적인 왕비의 이미지로 여겨지는 여성이다.
2. 생애[편집]
스웨덴의 귀족 에리크 레이욘후부트의 3녀로 태어났다. 마르가레타가 4살 때 에리크는 스톡홀름 대학살[1] 로 목숨을 잃었다. 마르가레타는 어머니,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 숨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535년에 구스타브 1세 바사의 왕비 작센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가 낙상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새로운 왕비 후보로 마르가레타가 거론되었다. 마르가레타의 가문은 당시 스웨덴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고, 어머니 에바 에릭스도테르는 구스타브 1세 바사와 육촌지간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구스타브 1세 바사가 마르가레타에게 청혼하러 갔을 때 마르가레타는 성 다락방에 있는 상자 속에 숨었다고 한다. 당시 마르가레타는 스웨덴의 귀족 스반테 스투레[2] 와 약혼한 사이였으나 왕이 그 약혼을 깼다. 1536년 10월, 40세의 구스타브 1세 바사는 20살이 된 마르가레타 레이욘후부드와 웁살라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한번은 마르가레타와 스반테 스투레가 단 둘이 한방에 있는 것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목격했다. 왕이 화를 내며 설명을 요구하자 마르가레타는 스반테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청혼하기 위해 결혼을 허락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진짜인지 임기응변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화가 풀린 구스타브 1세 바사는 결혼을 허락했고, 스반테 스투레는 마르가레타의 막내동생 마르타와 결혼했다.
모든 기록에서 마르가레타는 훌륭한 왕비로 평가되고 있다. 마르가레타는 아름답고 지적이었으며, 남편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부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10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중 8명이 유아기를 넘겼다. 마르가레타가 왕비가 되고 그녀의 가족들은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왕조차도 마르가레타의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연이은 임신으로 몸이 약해진 마르가레타는 배를 타고 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독한 폐렴에 걸렸다. 짧은 투병 끝에 1551년 8월, 자식들에게 다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왕비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으나 1년 뒤에 마르가레타의 조카와 재혼했다.
3. 자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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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20년에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가 이끄는 군대가 스톡홀름에서 일으킨 대학살.[2] 스웨덴의 섭정을 역임한 소 스벤 스투레의 아들이다.[3] 지그문트 3세 바사 등[4] 구스타브 2세 아돌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