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킨 파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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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린킨 파크


1. 초창기(1996년~1999년)
2. 1집 활동(2000년~2002년)
3. 2집 활동(2003년~2004년)
4. 사이드 프로젝트(2004년~2006년)
5. 3집 활동(2007년~2008년)
6. 휴식기(2009년)
7. 4집 활동(2010년~2011년)
8. 5집 활동(2012년~2013년)
9. 6집 활동(2014년~2015년)
10. 7집 활동(2017년~현재)




1. 초창기(1996년~1999년)[편집]


린킨 파크는 마이크 시노다, 롭 버든, 브래드 델슨의 세 명에 의해서 결성되었다. 이 셋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들로, 학교에 다닐 때부터 서로 모여서 음악 활동을 하는 등 자주 모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부터 이 셋은 본격적으로 음악에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결성된 것이 바로 린킨 파크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밴드인 Xero. 1996년에 밴드를 결성하면서 추가 멤버로 조 한,[1][2] 피닉스 파렐, 그리고 마크 웨이크필드를 영입하게 된다. 비록 밴드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봤자 이들은 아직 별 경제력이 없는 대학생들이 모여 만든 학생 밴드 수준이었기 때문에 매우 한정된 자원 속에서 활동을 해야만 했다. 당장 그 당시에는 스튜디오를 따로 빌릴 여건이 안 돼서 마이크의 침실을 레코딩 스튜디오로 사용했었다고 할 정도니.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밴드는 작곡 활동을 하면서 1997년에 4곡짜리 데모 테이프인 "Xero"를 완성한다. 이들은 이 테이프를 각 음반사에 보내게 되지만 그러나 이들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거절 뿐. 이후 멤버들은 많은 좌절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밴드의 보컬이었던 마크 웨이크필드가 탈퇴하게 된다. 베이시스트인 파렐 또한 자신이 속해있던 다른 밴드의 투어에 참석하기 위해서 Xero를 이탈하게 되고, 결국 밴드는 한동안 와해를 겪게 된다.

이후 멤버들은 서로 각자의 살 길을 찾다가 1999년에 다시 모이게 된다. 이후 팀을 떠난 웨이크필드를 대체하기 위해 보컬 오디션을 보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현재 린킨 파크의 보컬인 체스터 베닝턴. 당시의 유명한 일화로 오디션장에서 체스터 베닝턴이 한 소절을 부르자마자 체스터 뒤로 대기 중이었던 다른 지원자들이 모두 오디션장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다.[3] 결국 체스터 베닝턴을 영입하게 된 밴드는 밴드의 이름을 Xero에서 Hybrid Theory로 바꾸게 되고 다시 작곡 활동에 매진하게 된다. 그리고 1999년 5월, 수많은 노력 끝에 마침내 그들의 첫번째 EP 음반을 완성하게 된다.[4] 아직 이 때까지도 밴드는 음반사와의 계약을 따내지 못 했기 때문에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음악을 알렸다. 그러나 이 점이 화근이 되어 당시 Hybrid Theory라는 이름을 쓰던 또다른 밴드와 인터넷 상에서 마찰을 빚으면서 밴드의 이름을 한 번 더 바꾸게 되는데, 그게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밴드명인 LINKIN PARK다. 자신들이 주로 공연을 했었던 링컨 공원(Lincoln Park)라는 곳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5] 아쉽지만 밴드는 계속해서 음반사와의 계약을 맺는데 실패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결국 밴드는 평소 친분이 있었던 Zomba Music이라는 음반사의 부사장을 통해 다른 여러 레코딩사와 연락을 하게 되고, 마침내 여러 번의 설득 끝에 워너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을 하게 된다. 메이저 계약을 따낸 이후 밴드는 자극을 받아 열심히 작곡에 몰두하게 되고, 그리고 이듬해에 드디어 그들의 데뷔 앨범인 “Hybrid Theory”를 발매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소속사와의 갈등[6]이 있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워너브라더스 관계자가 체스터 베닝턴을 따로 불러내 마이크 시노다를 쫒아내고 다른 래퍼를 넣자고 제안했다 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체스터는 관계자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었다면서, 히트곡들을 낼 수 있는 훌륭한 작곡자를 자르려하는 멍청한 짓을 했다고 비판했다. 체스터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웃기고 정신 나간 일이었다고링크

2. 1집 활동(2000년~2002년)[편집]


앞서 언급한 온갖 산전수전을 겪고 나서 린킨 파크는 마침내 그들의 데뷔 앨범인 Hybrid Theory를 2000년 10월 24일에 발매하게 된다. 수록곡들은 마이크가 1990년대 후반 작곡한 것들을 2000년 초중반에 걸쳐서 다듬어 내놓은 것이다.[7] 대체로 마이크의 랩과 체스터의 보컬이 왔다갔다 하는 구조를 보인다.[8] 10월 하순에 발매된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Hybrid Theory는 2000년을 넘기기 전까지 두 달 동안 500만 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한 달에 250만 장 정도를 판 꼴. 이후 2001년에는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 되었다.[9] 말그대로 듣보잡 신인들이 몇 달만에 전국구급 인지도를 쌓은것. 빌보드 200에서는 2위까지 기록했다. 그 밖에도 "베스트 하드 록 퍼포먼스" 부문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그 외 2개 분야에 노미네이트[10]되는 등, 거칠 것 없는 행보를 이어나갔다. "Hybrid Theory"는 린킨 파크의 앨범들 중 《죽기 전에 반드시 들어야 할 1001가지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결국 미국 내에서 판매량 천만 장을 넘기고 Diamond 인증을 받는다.

이러한 상승세를 타고 린킨 파크는 이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다른 유명 밴드들과 라이브 투어를 진행했고 미국을 포함해서 단독 월드 투어를 시작한다. 1집 전 곡은 물론 미공개했던 곡들도 함께 라이브로 진행했다. 한창 주가가 높았던 2001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324번의 공연을 뛰었다고 한다. 2001년 11월에는 이들의 첫 라이브 투어 실황을 담은 DVD "Frat Party At The Pankake Festival"이 발매되었다.

월드 투어가 진행될 무렵 밴드를 한동안 이탈해있었던 베이시스트 피닉스 파렐이 팀에 돌아왔고 이후 린킨 파크는 "Hybrid Theory"의 수록곡들의 리믹스 앨범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다양한 아티스트들과 함께 작업을 한 끝에 리믹스 앨범인 Reanimation이 2002년 7월 30일에 발매됐다. 린킨 파크 팬들 사이에서는 1.5집으로 통한다. "Reanimation"은 발매 첫 주에 28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빌보드 200 차트에도 2위에 랭크되는 등,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지나친 상업주의라는 비판을, 또 다른 일각에서는 신인 밴드의 신선한 시도였다는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3. 2집 활동(2003년~2004년)[편집]


1집이었던 'Hybrid Theory'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유명세를 떨친 린킨 파크는 1~2년 가량을 투어에 전념하게 된다. 멤버들은 투어 도중에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히 다음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 3년이라는 텀을 두고 정규 2집 Meteora가 발매되었다. 2003년 3월 25일에 발매되었는데 리믹스 앨범인 'Reanimation'이 2002년 7월에 발매되었던걸 생각하면 사실 상 쉴 틈 없이 2집 준비를 해온 셈이다. 일부 팬들은 이를 워너브라더스 뮤직의 지나친 상술이라고 까기도 한다. "Meteora"라는 앨범의 제목은 그리스에 실존하는 지역의 이름이라고 한다.[11] 그곳 특유의 바위투성이 지형이 앨범 작업에 있어서 많은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2집 앨범의 곡들은 1집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분위기나 곡 구성이 비슷했다. 기존의 뉴메탈과 랩코어 장르 노선을 유지하면서 샤쿠하치[12] 등의 다양한 악기들을 사용하면서 음악적인 시도를 했다.

'Meteora'는 발매 첫 주 90만 장 넘게 판매되면서 히트를 기록했고, 앨범에서 싱글컷된 Somewhere I Belong, Faint, Numb 등도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Faint는 한국의 팬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인 관심을 받아 각종 매체에도 소개되기도 했다. 한 해 동안 300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한 린킨 파크는 이후 다시 라이브 모드에 돌입, 메탈리카 등의 유명 밴드들과 함께 투어를 진행했다.[13] 2004년 초부터는 미국을 포함해서 Meteora 단독 월드 투어에 나섰다.

'Meteora'는 'Hybrid Theory'만큼의 완전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2003년 미국에서 2번째로 많이 팔린 앨범이 되는 등 괄목할 성과를 많이 거두었다. 2집은 팬들과 평단 모두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또한 Breaking The Habit과 같은 경우에는 기존의 린킨 파크 스타일과는 아예 거리가 멀었다. 이 때부터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추구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물론, 이때까지는 메탈적인 색깔의 곡들이 더 많은 편이다. 'Hybrid Theory'가 현재 미국 내에서 천이백만장 이상, 'Meteora'가 현재 미국 내에서 팔백만장 이상 팔렸다.

10년이 훌쩍 지난 2017년 발매된 7집에 여전히 1, 2집과 비교하며 혹평을 가해대는 팬들이 많다. 10년이 지나서까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팬들이 많으니 당시 1, 2집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4. 사이드 프로젝트(2004년~2006년)[편집]


1집과 2집 활동을 연달아 해오면서 쉴 틈 없이 달려왔던 린킨 파크는 이후 자신들의 3집 작업을 잠시 중단하게 되고 그 동안 멤버들이 해오지 못했던 다양한 사이드 프로젝트들을 시작하게 된다. 체스터 베닝턴은 다른 가수들의 곡들에 피처링을 했고 본인의 사이드 프로젝트 밴드인 데드 바이 선라이즈를 결성해서 작업을 하게 되며 마이크 시노다는 신스팝 밴드인 디페시 모드와 작업을 진행하게 된다.

2004년에 린킨 파크는 JAY-Z와 함께 Reanimation에 이은 두 번째 리믹스 앨범을 발매하기 위한 작업을 하게 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Collision Course EP다. 수록곡들은 전부 두 아티스트들 각자의 그 동안의 인기곡들을 섞어서 만든 곡들인데, 그 동안 린킨 파크가 고집해왔던 뉴메탈 장르와는 꽤나 차이가 있어서 신선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일부 팬들은 지나친 상업주의라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미 상을 수상할 때 린킨 파크+JAY-Z+폴 매카트니가 Numb+Encore+Yesterday로 콜라보레이션 공연을 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2004년 11월 30일 "Collision Course EP"가 발매된 이후 멤버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만의 사이드 프로젝트에 몰두하게 된다. 마이크 시노다는 포트 마이너 활동을 하게 되면서 그 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시노다의 힙합적 재능을 보여주었다. 데드 바이 선라이즈에서 체스터는 그 동안 보여주었던 스크리밍 위주의 메탈 창법 대신 가볍고 멜로딕한 파워 발라드를 부르며 팝 보컬로써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오늘날 린킨 파크하면 활발한 기부 활동을 떠올리게 되는 팬들이 많은데 그런 이미지를 쌓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 때부터다. 2집 활동 이후 린킨 파크는 수많은 자선 행사들에 참여하면서 그 수익금 전액을 허리케인 카트리나, 남아시아 대지진 피해 복구에 기부하는 등의 대인배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2005년에는 아예 Music for Relief라는 자선 단체를 직접 만들어 세계 각지에 재난이 있을 때마다 다른 아티스트들과 협동하여 앨범을 만들고 이를 기부금을 받는 형식으로 무료로 배포했다. 현재도 진행중이다.
파일:external/midtownvoice.files.wordpress.com/chesterbenningtonmikeshinodalinkinparkcmev_v6_bdzl.jpg
파일:external/www3.pictures.gi.zimbio.com/Linkin+Park+Helps+Rebuild+Homes+Affected+Hurricane+J5vQfqJ2VvHl.jpg

5. 3집 활동(2007년~2008년)[편집]


3집 Minutes to Midnight 에 이르러 린킨 파크는 큰 변화를 겪는다. 약 20여 곡을 미리 작곡한 뒤, 그중에서 엄선해 앨범에 수록했다고 하는데 뉴메탈 사운드를 완전히 배제한 음악을 선보였다. 실제로 3집 제작비화에서 마이크 시노다가 언급한 내용이다.[14] 린킨 파크의 기존 랩과 보컬의 파트 배분도 모두 사라졌는데 마이크의 비중 축소가 크다. 랩 파트가 많이 줄어 대부분이 체스터의 솔로곡이고 마이크는 백보컬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마이크의 래핑이 주를 이루는 곡이 하나, 마이크가 메인보컬을 맡는 곡이 하나가 있다. 조 한의 턴테이블 소리까지 거의 사라지니 한마디로 린킨 파크다운 요소가 많이 사라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랩-보컬 파트 배분을 깨뜨린것은 신선한 시도로도 평가받는데, 1집·2집 때에 썼던 스타일을 계속해서 쓰게 된다라면 발전 없이 고인물이 되어 약간 독이 되어서 돌아올 면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기존의 멋진 머리 염색과 패션을 모두 버리고 정장이나 가죽 자켓을 걸치고 라이브하는 모습에 국내외 린킨 파크 팬들에게 말그대로 충격과 공포. 서정적인 가사나 자아성찰에 대한 가사나 슬픈 가사가 꽤나 보인다는 점이 기존 앨범과 그나마 비슷했던 점이다. 친근하고 부드러운 멜로디로 일부 곡들은 그동안 린킨 파크를 잘 모르던 대중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지만 이런 극적인 변화는 일부 팬들에게 반감을 샀다. 평론가들의 반응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린킨 파크만의 색깔을 잃었다는 평가가 다수이다. 3집 이후 조 한은 본인 파트가 없는 곡을 라이브할 때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을 하여 인스타그램 등지에 업로드를 한다. 3집은 현재 미국 내에서 오백만장 이상 팔렸다.

6. 휴식기(2009년)[편집]


체스터 베닝턴은 데드 바이 선라이즈 활동을 하였다. 꾸준히 월드 투어를 진행하였다.

7. 4집 활동(2010년~2011년)[편집]


2010년 8월 2일에 싱글 'The Catalyst'가 발표되었고, 메달 오브 아너의 최신작의 사운드 트랙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2010년 9월 14일. 린킨 파크의 4집 앨범인 A Thousand Suns[15]가 발매되었다.

3집에서 보여줬던 실험성을 밀어붙여 더 많은 팬들의 반감을 사고 있으나, 여전히 좋다는 팬들도 물론 존재한다. 린킨 파크의 4집은 앨범이 모두 연결되는 컨셉트 앨범으로, 앨범 트랙 1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들어야만 제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게 호불호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데 본래 컨셉트 앨범이라는 것이 서양에나 잘 알려져 있고 잘 쓰이는 용어이지 록/메탈 장르에 취약한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고 봐야 한다.[16]

원래 추구하는 게 하이브리드 형식의 노래라 더 이상 메탈을 안한다 평가하는 것도 좀 무의미한 게 사실이다. (애초에 1집 이름이 Hybrid Theory이다.) 4집은 가장 평론가들의 평이 좋은 앨범이다. 릭 루빈이 공동 프로듀싱한 3집부터의 스타일도 괜찮게 여기는 쪽에서는 라디오헤드Kid A를 떠올리는 성공적인 실험으로 본다.

8. 5집 활동(2012년~2013년)[편집]


2012년 들어 5집을 발표하겠다 예고했었고,4월 16일 첫 번째 싱글 'BURN IT DOWN'[17]을 발표하고 새 앨범 제목인 LIVING THINGS와 앨범아트를 공개했다. 6월 26일 발매예정이라고 하며 1집 "Hybrid Theory" 이후 제일 헤비한 앨범일 거라 예고했다. 6월 16일 음원이 공개되었다.

하지만 헤비하다고 해서 예전의 뉴메탈 사운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마이크 시노다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오히려 3~4집에서 보여줬던 하이브리드 함을 더욱 강조하게 될 앨범이 될 것 같다고. 2012년 4월에 공개된 싱글인 'BURN IT DOWN'을 들어보면 4집 때 한번 실험해본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계속 밀 생각인 듯 하다.

발매 이후 평은 엇갈리는 편이다.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주가 된게 아쉽다는 의견도 있지만 좋다는 의견, 예전에 했던 1집을 계승하는 앨범이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는 평도 존재한다.

파일:attachment/linkinpark_MOH_W.png

4집 싱글 'The Catalyst'가 메달 오브 아너의 엔딩 테마로 쓰였듯이 5집 싱글 'CASTLE OF GLASS' 또한 메달 오브 아너: 워파이터의 엔딩 테마로 쓰였다.

2013년 일본 섬머소닉 콘서트때, 스티브 아오키와 함께 신곡 'A Light That Never Comes'를 공연하였다. 음원은 9월 13일 공개예정이었으나 예정했던 일자보다 조금 늦은 2013년 9월 16일에 오리지널 비디오가 공개되었다. 2013년 10월 29일, 린킨 파크 5집의 리믹스 앨범(1집의 Reanimation과 같은)RECHARGED가 발매되었다. 팬들 사이에선 5.5집이라 불리며 5집 수록곡 대다수를 리믹스하고 'A Light That Never Comes' 원곡과 릭 루빈 리부트 버전 2곡이 수록되어 있다.
파일:external/assets.rollingstone.com/091213-linkin-park-624-1379084124.jpg

9. 6집 활동(2014년~2015년)[편집]


2014년 6월 17일 6집 앨범 발매, 3월 7일 Guilty All the Same 발표, 4월 28일 앨범 타이틀명 및 트랙 리스트 공개, 타이틀명 The Hunting Party, 5월 5일 Until It's Gone 발표, 6월 1일 Wastelands 발표, 6월 3일 Rebellion 발표, 6월 9일 Final Masquerade 발표
6집은 지금까지 린킨 파크 곡들중에서 가장 기타가 강조된 앨범이다.[18] 마이크 시노다는 인터뷰에서 "내가 어렸을때, 선배 록 음악가들(퍼블릭 에너미, 앤스랙스)의 음악을 듣고 기타에 입문했듯이, 누군가 이 앨범을 듣고 기타를 배웠으면 좋겠다." 라고 한 것이 반영된 것이다.

12곡의 수록곡이 모두 공개된 현재, 3집 "Minutes To Midnight"부터 시작해서 4, 5집에 이르러 더 하이브리드함이 강조되었던 앨범들과는 달리 6집은 본래의 린킨 파크다운 맛으로 회귀했다는 호평을 받고있다. 타이틀곡 Final Masquerade를 비롯해 Until It's Gone, Wastelands 등 1,2집의 향수가 묻어나는 곡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또한 Until It's Gone에서 그런 부분이 두드러진다. Until It's Gone는 트랜스포머: 라이즈 오브 더 다크 스파크 주제곡으로 쓰였다.

10. 7집 활동(2017년~현재)[편집]


빌보드 200 역대 1위 앨범
Harry Styles
Harry Styles

One More Light
Linkin Park

True to Self
Bryson Tiller

2017년 2월 16일 Heavy를 공개하였고 최근 유행하는 팝과 비슷한 성향의 곡이다.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은 편인데, 그들이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고 이 곡도 그중의 일환이라고 보는 팬들도 있으나 일부 골수팬들은 린킨 파크 본연의 장르에서 크게 벗어났을뿐더러 너무 상업성과 대중성을 노린 곡이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했다. 3월 16일 Battle Symphony를 공개, 4월 13일 Good Goodbye를 공개, Battle Symphony는 비트가, Good Goodbye는 Mike의 랩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으며 5월 10일 Invisible를 공개, 5월 19일 7집 One More Light 의 전 수록곡이 공개되었다. 타이틀곡 One More Light는 조용하고 깔끔한 곡 분위기가 마치 Iridescent를 연상한다는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노래의 가사 내용 역시 다른 노래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시적이고 우울한 뜻을 담고 있어 체스터가 겪었던 우울증과 분위기가 소름끼치게 일치한다.

예전처럼 1, 2집과 비교하며 린킨 파크를 비난하는 팬보단 이제 린킨 파크가 하고 싶은 음악 하는 록밴드임을 인정하자는 팬들의 반응이 더 많이 보인다. 2017년 5월 20일 메세지 영상이 올라왔다. 2017년 6월 Billboard200 1위를 유지중이다.

2017년 7월 20일(현지 시간) 오전 9시 체스터 베닝턴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팔로스 버디스 에스테이츠에 있는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로 처음 가정부(직원)에게 발견됐다. LA 카운티 검시관은 "캘리포니아 주 팔로스 베르데스 에스테이츠 (Palos Verdes Estates)에 있는 체스터 베닝턴의 집에서 오전 9시경 긴급 전화를 받았다. 직원이 체스터 베닝턴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체스터 옆에는 술병도 있었지만, 마약 성분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유서 등은 남기지 않았다. 24일(현지 시간) 검시관이 체스터 베닝턴의 사망 사건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사인을 자살로 판명했다. 경찰은 24일 검시관의 결과를 유족들에게 전달하고 사건을 종결했다.[19] 체스터 베닝턴의 마지막 인터뷰가 주목받고 있다.

2017년 7월 21일(현지 시간) Live Nation 트윗에 의하면 린킨 파크의 북미 투어 전체가 취소되었다.

2017년 9월 18일 One More Light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 영상은 2020년을 기준으로 무려 1억 5300만회의 재생수를 돌파하고 있다. 한국 시간으로 10월 28일 체스터 베닝턴의 인생을 축하하는 공연, Celebrate Life in Honor of Chester Bennington 라이브 공연을 하였다. 공식 홈페이지에 공연 예고가 뜨자 해외 여러 팬들이 유투브로 실시간 스트리밍을 요청했는데 실시간 스트리밍을 해주었다. 여기서 볼 수 있다.

12월 15일 One More Light Live 앨범이 발매되었다.

2018년 1월 마이크 시노다의 트위터에 따르면 일단은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라고 한다. 다만 시간이 걸릴거라고.

2월 인터뷰를 통해 진짜 적합한 보컬을 찾는다면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말했다. 단, 체스터 베닝턴을 '대체'한다는 생각은 절대 없다고. #

2023년 2월 미공개곡이었던 LOST를 공식 발표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7NK_JOkuS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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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6 12:37:22에 나무위키 린킨 파크/활동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마이크 시노다와 대학교 동창이다. 마이크와 한이 만난 대학은 Art Center College of Design로, 둘은 그 곳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2] 또 다른 여담으로 브래드는 UCLA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정도의 수재였으나 로스쿨을 포기하고(!!) 밴드에 매진하게 된다.[3] 근데 아이러니한 것이 린킨 파크가 데뷔 초 때 약점으로 지적받은 것이 체스터 베닝턴의 심한 기복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후로는 많이 좋아졌다.[4] Hybrid Theory EP라는 음반인데, 이 음반은 이후 린킨 파크가 메이저 데뷔를 하고 난 후에 팬클럽 회원들에게 무료로 배포되었다.[5] 멤버들은 원래 Lincoln Park라는 이름을 그대로 밴드명으로 사용하고 싶어했으나, linkinpark.com이라는 인터넷 도메인을 얻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LINKIN PARK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6] 밴드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소속사는 마이크와 한이 빠졌으면 했다고 한다.(아무래도 이 두명의 멤버가 동양계라서 약간의 인종 차별을 받은듯 하다.) 이 내용은 마이크의 솔로 앨범에 노래 가사와 노래 속 대화에도 들어있다.[7] 체스터 영입 이전에 만들어 놓은 곡들도 있다.[8] 마이크와 체스터의 랩 vs. 보컬 파트 배분을 가만히 놓고보면 거의 비슷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2집까지 그렇다.[9] 미국 내에서만 1000만장 이상, 해외 판매량까지 합치면 2500만장 이상이다.[10] "최고의 신인", "베스트 록 앨범"[11] 꽃보다 할배에서 나온 절벽 위 수도원이 있는 그 곳이다.[12] 일본의 전통 악기이며 대나무로 만든 피리다. 2집의 수록곡인 Nobody's Listening에 나오는 피리 소리의 정체도 바로 이 것이다.[13] 메탈리카와 함께 한 투어 중 텍사스에서 했던 공연은 이후 Live In Texas라는 이름의 실황 DVD로 출시되었다. 팬들 사이에서 아직도 명라이브로 회자될 정도로 밴드가 절륜한 라이브 실력을 선보였다.[14] 하지만 메탈 사운드가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그 예가 Given Up, Bleed It Out, No More Sorrow[15] 핵물리학자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인용해서 한 말(천개의 태양빛이 하늘에 한번에 폭발한다면 이것은 전능한 이의 광채와 같을 것이다)에서 따온 문구. 그래서 앨범의 전체적인 내용도 반핵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16] 문제는 이걸 모르고 린킨 파크의 4집을 골라 들은 일부 사람들은 중간 중간에 곡이 왜 이리 짧냐며 린킨 파크는 이제 메탈을 거론할 가치가 없다면서 혹평을 했는데 정말 속 없는 비판으로, 린킨 파크 4집은 1번부터 끝까지 다 들어야 함을 생각해보고 들어보자.''' 그 이후 해도 늦지 않는다.[17] 5집은 앨범 제목과 수록곡들 전부를 대문자로 표기하는 것을 정식 명칭으로 하고 있다.[18] 기타소리가 강조되었다 해서 1~2집 시절의 사운드나 혹은 하드록스러운 스타일의 기타소리인 것은 아니다.[19] 매우 가까웠던 친구 크리스 코넬도 지난 5월에 똑같이 목 매달아 자살해서 굉장히 힘들어했는데 사망 날짜가 코넬의 생일이라고 한다. 사적인 것들로 고통받고 있었을진 몰라도 적어도 남들한텐 내색하지 않다가 집에서 혼자 술에 취한 채 크리스 코넬을 기억하며 충동적인 판단을 했을거라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