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이스라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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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20세기
2.2. 21세기
3. 문화 교류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리투아니아이스라엘 사이의 공식적인 국가 대 국가 외교관계는 소련 해체 이후 1992년에 수립되었다. 전통적으로 리투아니아는 아슈케나지 유대인, 카라임의 주요 거주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유대인의 미국 이주와 시오니즘 운동, 홀로코스트 등을 거치며 오늘날에는 약 2천여 명 정도의 유대인 인구만이 리투아니아에 잔류한 상황이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20세기[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리투아니아 147,000명의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였다. 이들 중 90~91%가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에 진주한 후 홀로코스트로 학살당했다.

1995년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 리투아니아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인들이 유대인 학살에 부역한 역사 관련하여 이스라엘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이후 이스라엘의 지원으로 리투아니아 각지에는 홀로코스트 및 유대인 문화 기념 시설들이 유지, 복구되었다.

1996년 리투아니아 검찰청이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전 NKVD 대령 나흐만 두산스키스(Nachman Dušanskis)를 전쟁 범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해당 인물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였다. 리투아니아의 이근안으로 알려진 나흐만 두산스키스는 하이파에서 자연사했다.

2.2. 21세기[편집]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베냐민 네타냐후가 리투아니아를 방문했다.

폴란드의 경우와 유사하게도 일부 리투아니아 작가들의 저서가 홀로코스트 책임을 부정하거나 혹은 유대인들을 폄하한다는 이유로 종종 논란이 되고 있다.

3. 문화 교류[편집]


파일:Karaitesynagoguevilnius.jpg
빌뉴스 시의 카라임 유대교 시나고그

17~18세기 당시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는 북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유대인 인구가 번성하였던 도시로 리투아니아 각지에는 유대교 관련 유적이 풍부하다. 일반적인 아슈케나짐 관련한 유적 이외에도 카라임 유대인 관련한 유적도 찾아볼 수 있다.

18~19세기 동유럽을 중심으로 한 아슈케나짐 사회에서는 유대교 신비주의와 랍비 유대교 사이의 조화 관련한 이견 문제로 근본주의-신비주의 성향 하시딤 유대교와 합리주의 성향의 리타임(리트박) 유대교가 갈라져 대립하였다. 하시딤 유대교는 폴란드를 중심으로 하였고 리타임 유대교는 바로 리투아니아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다.[1]


4.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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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사회가 몰락한 이후 아슈케나짐 사회에서는 하시딤 유대교의 입지가 강해졌는데, 하시딤 중에서도 초근본주의 교파를 하레디로 분류하면 대충 맞아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