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재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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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편집]


리재룡은 대한민국 어부출신의 비전향장기수다. 남쪽에서 태어나 자란 납북어부 출신으로 2000년 북송된 비정향장기수 중 최연소 비전향장기수였다.


2. 상세[편집]


리재룡은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해가던 1944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에서 태어났다.[1] 당시, 리재룡이 태어난 곳은 광복 이후 38선이 그어졌을 당시 북한지역이었고, 그의 맡형은 6.25가 터지자 인민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가난한 어부 집안에서 태어난 리재룡은 어린 나이부터 천대받고 멸시받는 어부로서 소년 시절을 보냈는데, 전쟁을 겪으며 부모님이 죽고 형 또한 실종되면서 고아의 삶을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전쟁이 끝난 이후 리재룡은 최종 학력이 중졸이기에 결과적으로 어부로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가 어부가 된 것도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부가 됐는데, 1967년 꽁치잡이배에서 어업을 하던 도중 의도치 않게 북한으로 가게 됐다. 의도치 않게 나포 되었는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다른 선원들과는 달리 북한에 남게 됐다. 2000년 한겨레 기사에 나온 리재룡 스스로의 증언에 의하면, “60여일 동안 평양과 황해제철소, 신천박물관 등을 다니며 무상치료와 교육 등 당시까지 우월했던 북쪽 체제를 경험한 데다, `뱃놈'을 `사람'으로 대접해준 북쪽의 태도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더 나아가 6.25때 인민군으로 입대한 형과도 조우하게 되면서 남한으로의 귀환을 거절했다고 한다.

북한에 남은 리재룡은 남파공작원에 자원했으며, 3년간 훈련받은 뒤 1970년 6월6일 새벽 `공작선'을 타고 원산을 떠나 대구로 잠입했다. 그러다가 체포돼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구타를 견디지 못해 전향을 했지만, 그러나 교도소에서 동료 죄수들을 상대로 북한의 체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등 선전을 시도한 것이 발각되어 추가 기소되면서 1999년까지 29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복역하게 됐다.[2]

1999년 리재룡은 김대중 정부 하에서 특사로 석방되었으며,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북한으로 송환됐다. 이때 같이 송환된 사람들 중에 가장 나이가 젊은 것과 남한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북송된 이후 리재룡은 북한 정부에서 소개해준 한 여성과 결혼했으며, 2002년에는 딸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당시 북한의 김정일이 "온 나라 인민들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애기 이름을 축복이라고 지어줍시다"라고 적은 친필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따라 이름을 축복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현재도 북한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며, 2015년 당시 노길남이 평양을 방문하여 그를 만난 것이 확인됐다. 또한 2020년 당시 북한에서 만든 비전향장기수 100세 생일 기념관련 영상에도 얼굴을 비추었다.


3. 기타[편집]


2019년 당시 리재룡의 딸 리축복이 김일성 종합대학경제학부에 입학한 것이 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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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뉴스에 따르면, 194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2]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북송될 당시 리재룡은 두 가지에 감사했다고 한다. 첫째 10년을 추가로 감옥에 있으면서도 전향하지 않은 것이고, 둘째 출옥 후 ‘한눈팔지’ 않고 미혼인 채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송환 기회를 얻었고, 비교적 홀가분한 마음으로 형님이 있는 북으로 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