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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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여담



1. 개요[편집]


빨치산 출신의 북한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1901년 8월 19일, 함경남도 단천군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소학교 4학년까지 공부하다가 학업을 중단했다는 기록과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모두 있다. 어쨌든 간에 큰 교육을 받지 못하였고 1920년대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두 노동자로 힘들게 먹고 살다가 마창에 살때 자기 병원을 열어서 의사일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반일 운동에 가담, 1930년부터 안길 등과 함께 기층 당조직 사업을 하였으며 193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훈춘현 금구당위원회 비서를 하였다. 1932년 김일성 빨치산 부대에 입대 군의로 일하였다. 김일성은 훗날 "림춘추, 리봉수 등은 치료사업에서 특출한 업적을 쌓은 명의들인 동시에 후비육성에서도 무시할수 없는 공로를 세운 권위있는 산파들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품에서 삶의 노래, 소생의 노래를 부르며 뛰쳐일어나 대오로 돌아갔던가."라고 그가 군의로 큰 공을 세웠다고 칭찬해주었다.

세기와 더불어에 따르면 빨치산 동료이며 재봉대 담당자인 안순화와 결혼하여 무려 5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지만 동상으로 발가락을 모조리 잘라내야 했던 장남만 소련으로 가서 겨우 살고[1] 차남은 홍역으로 죽고 삼남은 일본군에게 살해됐으며 사남은 굶어죽고 오남은 어떤 집에 맡겼지만 영영 찾지 못했다는 비참한 가족사를 가졌다고 한다. 1938년에는 리봉수의 아내 안순화마저 살해되었고 리봉수는 무척이나 비통해했다고 한다. 이후 다른 빨치산 동료 김명숙과 결혼하였다. 문식이 어느 정도는 있어서 그런지 정치강습도 맡았는데 김일성 주장에 따르면 호평을 받았다 카더라. 1940년 소련으로 이동하여 88국제여단 편입 이후 하사 계급을 받고 위생관으로 복무했다.

해방 이후 귀국, 최인덕, 박성철과 함께 해주로 파견되어 해주시의 당조직 사업을 맡았으며 해주시 당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1947년까지 재임하였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 조선인민군으로 이동하여 1959년 3월까지 복무하였는데, 1970년대에 발간된 국회의 북한 인명록에도 실리지 않을 정도로 잘 알려지진 않은 인물이었다. 중앙위원회 위원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지 않은 것을 봐서는 이 시기에는 중요한 직책을 맡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 중에는 조선생산협동조합 중앙련맹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3급을 받았다. 1959년 3월, 만경대혁명학원 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검열위원장을 겸하여 군 내부의 조직사업을 담당하면서부터 급부상하였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66년,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전임 검사위원장 김려중이 검열위원장에 이동함에 따라 신임 검사위원장에 선출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뭔가를 크게 해볼 틈도 없이 곧 사망하였다. 로동신문의 부고에 따르면, 1967년 3월 12일 8시 50분에 중환으로 죽었다고 하는데, 한가지 이상한 점은 이후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세워진 묘비에는 3월 13일이 기일로 적혔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빨치산 시절 군의로 일한 옛정 덕분인지 국장이 거행되고 시신이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되는 등 매우 성대한 대접을 받으면서 죽었으며 아내 김명숙도 함께 합장되었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검사위원회는 연명으로 부고를 발표, "리봉수동지는 김일성동지의 친근한 전우로, 충직한 전사로서 혁명활동을 시작할 때로부터 66세를 일기로 서거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자유독립과 우리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전생애를 다 바쳐 투쟁하였다. (...) 당과 수령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조국과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였으며 시종일관 당적원칙성과 고결한 혁명적품성을 소유하고 항상 동지들과 인민들 속에서 두터운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리봉수 동지는 공산주의적혁명투사의 모범으로 된다."라고 북한이 부고를 통해서 바칠 수 있는 찬사를 아낌없이 바쳤다.

이후 혁명렬사릉에 반신상이 제막되면서 리봉수의 반신상도 제작되었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2일, 5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계림, 김경석, 강진건, 강영창, 김은순, 김갑순, 김태근, 안룡각, 강상호, 리주연, 김원빈과 함께 리봉수를 '당에 끝없이 충실하였으며 혁명을 위하여 몸 바쳐 투쟁한 동지'로 언급하였다.

하지만 김정은 시대에서는 숙청당한 리영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절 언급이 없다. 하지만 과거 김정일 시대에도 딱히 북한 선전에 많이 나온 인물은 아니며, 김일성 사후 만들어진 세기와 더불어에서도 그냥 간단히 언급되는 인물 정도라서 여기에 너무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여담[편집]


  • 남로당 출신으로 북한에서 초기 재정국장을 지낸 동명이인 리봉수가 있으나 이 사람은 숙청당하여 1953년에 처형된다.

  • 그의 아들이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낸 리영호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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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순화가 1938년에 죽었는데 리영호는 1942년생이니 리영호는 이 살아남은 장남이 아니라 후처인 김명숙의 아들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