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협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 언론인 및 시인에 대한 내용은 김광협(언론인 및 시인) 문서
김광협(언론인 및 시인)번 문단을
김광협(언론인 및 시인)#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前 부수상 겸 민족보위상
김광협
金光俠 | Kim Gwang Hyeop


파일:downloadfile-33.jpg

출생
1915년
함경북도 회령군
사망
1970년 (향년 55세)
최종 당적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2.1. 광복 이전
2.2. 광복 이후
2.3. 6.25 전쟁
2.4. 6.25 전쟁 이후
2.5. 갑작스러운 숙청
3. 가족
4. 여담



1. 개요[편집]


소련, 북한군인이자 정치인.

6.25 전쟁 당시 제2군단장으로 참전했지만 1970년 김일성의 유일사상체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숙청당했다.


2. 생애[편집]



2.1. 광복 이전[편집]


1915년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출생했으며 193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후 만주에서 김일성과 함께 중국 공산당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활동을 했다.

1940년 3월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총지휘부 경위부대 정치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는 소련 하바롭스크로 월경하여 소부대 및 공작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44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제4영 제7연장으로 임명되며 군사훈련을 지휘하였다.

1945년 7월 말 신동북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2. 광복 이후[편집]


1945년 8월 광복 이후 류창권·리청송·황동하·조명선 등과 함께 목단당분견대를 인솔하고 목단강 지역에 파견되어 경비사령부 부사령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1947년 동북민주연군 연변분구 사령원이 되었으며 1948년 초 북한으로 입북하여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이 되었고 1948년 3월 열린 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같은 해 8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 김달삼, 김웅, 김일, 전태룡, 최용진, 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최현,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그후 1949년 1월 북한 총참모부 작전국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1949년 5월 김웅과 함께 중국공산당조선인 부대의 이관을 중국공산당 중앙에 직접 요청하여 인민해방군 제164사단과 제166사단 병사 1만2000여 명을 입북시켜 조선인민군으로 개편하였으며, 다시 1950년 1월 중국에 재차 파견되어 1만4000명의 조선인 중공군을 입북시키는데 성공하는 등 북한군의 초기 설립에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6.25 전쟁 발발 직전 제2전선사령부 참모장으로 전쟁을 준비하였으며 전쟁 초기 제2군단장을 맡아 동부공세에 가담하게 된다.


2.3. 6.25 전쟁[편집]


2군단장으로 임명받은 김광협에게 김일성이 지시한 작전은 중부-동부전선의 공세에 가담하여 1일만에 춘천, 홍천을 점령후 3일만에 수원을 점령하여 서부전선의 공세를 보조하는 한편 국군을 포위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주었는데 이는 그동안 김광협의 외교적 성과와 이에 따른 김일성의 기대로 보인다. 그렇게 그는 춘천의 6사단을 격파시키기 위한 공세를 가했으나 그는 북한에겐 불행히도, 남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군사적 역량은 부족했다. 게다가 당시 6사단은 6.25 전쟁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김종오 대령이 이끌고 있었다. 그는 3개사단 2만의 병력과 압도적인 화력우세에도 불구하고 춘천에서 3일이나 지체하며 보기좋게 깨져버렸고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음에도 국군의 후퇴를 바라만 봐야 했으며 결정적으로 서울에서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했다. 이에 빡친 김일성은 그를 전격 해임해버렸다.

그렇게 김무정에게 군단장직을 물려주고 대신 제2군단 참모장으로서 참전하였으며 1951년 김책이 사망하자 장의위원에 위촉되는 한편 그 후임으로 전선사령관에, 휴전 직후인 1953년 8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받았다.


2.4. 6.25 전쟁 이후[편집]


김광협은 이후 1953년 8월 로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상임위원회 위원, 당 규약개정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4월 열린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는 상무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고 1957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 해에 여동생 김성애김일성과 결혼해서 김일성과는 친인척이 되었다.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같은 해 9월부터 1962년 10월까지 제2차 내각의 민족보위상 재직을 마지막으로 마쳤으며, 1958년 1월 2일, 인민무력의 강화의 공을 인정받아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고 1958년 9월 7일, 김일, 박정애, 김달현, 정준택, 김익선, 홍명희, 박금철, 림해, 리주연, 하앙천, 정일룡, 김창만, 리효순, 한상두, 남일, 홍기황, 리종옥과 함께 북한 건국 10주년 기념 국기훈장 1급을 또 받았다. 1960년 10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에 임명되었다.

1961년 9월 열린 조선로동당 제4차 대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고 1962년 10월, 3기 내각에서 부수상에 유임되었다. 1964년 6월 조선로동당 부위원장에 선출되는 등 이후 조선로동당의 핵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6년 10월 제2차 로동당 대표자회 기간 중 열린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신설된 정치위원회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에 뽑혔으며 1967년 12월, 4기 내각에서도 부수상에 유임되었다.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지냈다.


2.5. 갑작스러운 숙청[편집]


그러나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는 돌연 1970년 김일성 유일사상체계 구축에 반대했다는 명목으로 숙청당했다.[1] 이후 행방은 불명이며 사망년도 또한 미상이다. 다만 김일성의 아내였던 그의 동생 김성애나 김성갑 등은 김광협이 숙청당한 이후로도 계속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동생이 김성애였으므로 김일성과는 인척관계이기도 했다. 그의 숙청을 조카 김평일을 후계자로 밀어줬던 것과 연관지어 보기도 한다. 기사 또한 김일성과 같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기는 했지만 김광협은 최용건 직계였기 때문에 최현, 오진우 같은 김일성 직계와는 약간 결이 달랐던 인물로 분류되기도 한다. 김광협 외에도 빨치산계 인물 중 숙청당한 인물은 김창봉, 허봉학, 김동규 등 몇명이 더 존재한다.

근래의 북한 문헌에서는 김광협이 대놓고 김일성이 아픈 틈을 타서 자신이 후임 수상이 되는 것을 도모했으며, 김일성의 경제계획을 훼방을 놓았다면서 박금철급의 악랄한 인간쓰레기라고 온갖 욕을 다 퍼붓고 있는 내용인데 이런 문헌들의 내용을 봐선, 김광협은 김일성에게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나 처참하게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3. 가족[편집]




4. 여담[편집]


김성애 남매들 중 유일하게 '성'자돌림이 들어가지 않아서 김일박성철의 형제설과 비슷하게 실제로는 김성애의 오빠가 아닐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김광협의 숙청에 김성애나 김평일이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은 것도 어딘가 이상하다. 물론 어떠한 이유로 김광협만 돌림자를 쓰지 않았거나 김일이나 최현처럼 가명을 썼다가 그대로 이름으로 굳어졌을 수도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00:08:03에 나무위키 김광협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이른바 최후의 정파였던 갑산파의 숙청과 연계시켜 보기도 하지만, 정작 갑산파의 대표격인 박금철 부수상의 숙청 시기인 1967년 3월 당시에 김광협은 부수상을 지내고 있었다. 별도로 보는 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