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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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외교관.

6자회담 당시 북측 차석대표로 출석하여 유명세를 얻었다.

2. 생애[편집]


1946년 7월 7일, 함경남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종합대학 독문과 졸업 이후 1975년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이후 1985년 7월, 중좌 계급으로 짐바브웨 북한 대사관 부무관으로 나갔다가 나중에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장이 되는 대사관 무관 리상우 소장과 함께 상아 밀거래로 10만 달러를 벌어들여 그것을 김정일에게 충성자금으로 바치고 남은 돈을 오진우, 리봉원, 김기선, 배용준 등에게 골고루 뿌렸다고 한다.

덕분에 조직지도부, 간부부의 지시를 받아 제대, 1993년 5월 정무원 외교부 미주국 과장으로 조동되었고 1996년 8월, 미주국 부국장에 이르렀다. 1997년 5월 유엔의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로 임명되어 유엔 외교를 담당하였다.

2002년 8월, 유엔 대표부 차석대사에서 해임, 본국으로 귀국하여 외무성 미국국 부국장을 맡았으며 2003년 8월부터 2004년 6월까지 1~3차 6자회담 차석대표로 참석했다. 2005년 2월, 외무성 미국국 국장으로 승진했으며 2005년 7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4,5차 6자회담에도 차석대표로 참가했다.

2008년 2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평양 공연을 관람했으며 2009년 10월 23일, 이틀간 뉴욕을 방문하였으며 11월 3일, 성 김 북핵특사와 비밀리에 회동했다. 이에 관해서 북미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회담이 아니냐는 추측이 많았는데 북한 외무성에서 이를 부인했고 나중에 북미회담은 김정은, 트럼프가 만난 후에야 성사된다. 2009년 10월, 김계관의 중국 방문을 수행했고 2011년 4월, 지미 카터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영남과 회담했을 때도 동석했다. 2011년 10월 2차 북미 고위급 회담 북측 대표로 참석했다.

하지만 이후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2015년 2월, 김평일의 뒤를 이어 신임 폴란드 대사로 임명, 2020년 6월까지 재임하다가 주영 대사인 최일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3. 참고문헌[편집]


  • 최주활, 북한 체제에서의 당-군 관계 연구(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1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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