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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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투스 페디우스
라틴어: Quintus Pedius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지위
파트리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대 율리아(어머니)
퀸투스 페디우스(이부동생)
율리우스 카이사르(삼촌)
아티아(사촌)[1]
참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원로원 의원, 장군.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로, 아우구스투스의 오촌 당숙이자 법적 사촌이다.


2. 생애[편집]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두 누이 중 맏누이 대 율리아가 이름 미상의 첫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이부 동생은 퀸투스 페디우스이다.

로마의 가장 오래된 파트리키 명문가로 누마 폼필리우스의 장남 피누스를 시조로 뒀다고 주장한, 사비니계 파트리키 집안인 피나리우스 가문 출신이다. 그의 출신 가문은 로마에서 건국 당시부터 권위있고 저명하기로 유명한 파트리키들로, 다양한 지파 출신이 모두 사제로 봉사했고, 공화정 시대 내내 수많은 집정관, 법무관을 배출했다.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기원전 44년 3월 로마에서 외삼촌 카이사르가 암살되었을 당시, 이부동생 페디우스처럼 경력 있는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고대 기록들에서 언급된다. 그는 외삼촌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재산의 8분의 1을 받았다. 이 상속분은 정치적 자산이기도 했는데, 그는 양자로 입양된 이종사촌 아티아의 아들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가 종조부의 재산 4분의 3을 받자, 어린 투리누스의 가문 상속을 위해 스스로 그들 상속 재산 전체를 대가 없이 넘겼다. 이후 스카르푸스는 카이사르파 중 가장 경력이 훌륭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면서, 카이사르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를 살인자로 규정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즉, 그는 외삼촌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카이사르파 내에서 암살범들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등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지했다. 이런 태도는 동생 퀸투스 페디우스와 묘하게 달랐다. 왜냐하면 페디우스는 입양 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로 정식 개명한 투리누스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 파에 합류한 뒤부터, 안토니우스의 요청으로 브루투스, 카시우스 롱기누스와의 전쟁을 준비 후 참전했다. 이후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그리스 악티움에서 악티움 해전을 벌이기 전까지, 키레나이카에서 안토니우스 휘하 군대를 이끈 야전사령관에 임명됐다. 그는 4개 군단을 지휘했는데, 그동안 군자금 모집을 위해, 키레네에 화폐주조소를 장악한 다음 안토니우스 이름으로 다양한 주화를 발행하고, 본인을 화폐감독자로 새겨 넣었다.

그는 안토니우스 지지 활동 속에서도 옥타비아누스에게 도움을 꾸준히 줬다. 그러면서 안토니우스의 아내가 된 조카 소 옥타비아와 그 자녀를 도왔다. 이런 상황에서 안토니우스가 스카르푸스의 조카 소 옥타비아에게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했다. 그렇지만 그는 안토니우스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이 벌어진다. 이 전쟁에서 안토니우스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끈 옥타비아누스 해군에게 패한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북아프리카로 향하면서, 자신의 4개 군단을 이끈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사절을 보냈다. 이에 스카르푸스는 대노하면서, 안토니우스와의 어떤 만남도 거부했다. 그는 이어 안토니우스 사절들을 붙잡아 모두 사형에 처한 다음, 자신에게 사절과 함께 부관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를 보낸 옥타비아누스에게 지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는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칼루스에게 4개 군단 전체의 지휘권을 넘겼고, 조카 옥타비아누스가 동쪽에서 아시아 , 시리아 , 유대를 거쳐 이집트를 향해 진군하는 동안, 코르넬리우스 갈루스가 서쪽에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진군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을 완전히 격파한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고, 옥타비아누스가 유일한 1인자가 됐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렸고, 황제가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위해 카이사르의 상속 재산을 대가 없이 넘겨주고, 결정적인 순간까지 기다렸다가 안토니우스가 무너지는데 큰 공을 세운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함을 표했다. 그러면서 그는 법적 사촌인 집안 어른 루키우스 피나리우스 스카르푸스에게 오늘날 리비아 일대인 트리폴리타니아 통제권을 부여하고 키레나이카 로마 장관 직에 임명했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황숙 자격의 황제 화폐 발행 대리인으로 삼았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의 화폐 발행 대리인으로 주화에 새겨 넣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그를 본인의 삼촌으로 소개했다. .

이후 기록은 많지 않으나, 이후 장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죽기 전 작성한 유언장으로 손자뻘 친척 소 옥타비아, 옥타비아누스 남매에게 일정의 재산을 넘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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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 옥타비아,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남매의 어머니이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종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