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본기 김교수/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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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본 제조업 폄하
3. 일본 문화 비난및 그밖의 일본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
3.1. 일본 식문화 폄하
4. 썸네일 및 제목 관련 비판
5. 약자에 대한 무시
6. 유튜버로서의 자질
7. 저서의 신뢰성
8. 조선 문화재 비난
9.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부정 및 부정선거론 전파


1. 개요[편집]


유튜버 롯본기 김교수의 비판을 담은 문서.

2. 일본 제조업 폄하[편집]


file:///C:/Users/User/AppData/Local/Temp/BNZ.6426f3af30a2713b/train12-1-1/2/img/img.png
(이 주소를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어넣기 하면 이미지를 볼수있다.)

김교수는 일본 제조업에 대해 카메라를 예로 들며 "좀 더 작게 개선하는 데만 역량이 있을 뿐이다."라고 비판했지만 카메라 제조로 유명한 회사 중 독일의 라이카 스웨덴의 핫셀블라드 덴마크의 페이즈 원 스위스의 Sinar 또한 자잘한 개선만 주기적으로 이루어졌지 무언가가 크고 갑작스럽게 바뀐 건 없다. 이 논리대로면 저 3국의 회사들 모두 혁신이 없다는 뜻이 된다.

​애초에 제조업 분야에서는 김교수의 말이 얼마나 실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는데, 몇몇 특수한 사례를 제외한 제조업의 대부분은 혁신이 아닌 양산에 초점을 맞춰두고 있다.[1] 현대에서 주로 쓰이는 것만 봐도 장갑[2]부터 자동차[3]까지 무언가가 혁신적으로 한번에 갈아치워진 적은 없었다. 또한 한국이 그래픽 메타렌즈를 개발한 것은 맞으나 영국과 공동개발하였다는 이야기는 쏙 빼놓고 말하는 지독한 친한, 자문화 중심주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사실 그래픽 메타렌즈 역시 메타렌즈의 기술을 가져와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롯본기의 논리대로라면 혁신적이지 않고 거기다가 카메라의 혁신의 기준을 무조건 렌즈의 변형으로만 초점을 맞추는 롯본기의 주장도 전혀 근거가 없다. 실제로 SLR카메라 역시 그전부터 존재했지만 큰 대중성은 없었는데 1954년 아사히 광학 공업에서 SLR 카메라의 큰 변화를 불러 일으켰는 퀵 리턴 미러 기능을 최초로 만들어 내면서 SLR카메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변화를 일으켰으면 그리고 위 내시경 카메라도 일본에서 1950년대 일본에서 최초로 위 내시경에 카메라 기능을 만들면서 내시경으로 위를 촬영할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캠코더만 해도 사실 비디오카메라는 그전부터 있긴 했지만 그 이전의 캠코더는 하나같이 방송용 캠코더 뿐으로 80년대에 소니에서 그러한 캠코더를 크게 개선시켜 소비용 캠코더를 최초로 만들어서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길거리에서 캠코더로 영상을 촬영을 할수 있는 변화를 일으켰고 또한 일본 교세라에서 99년도에 최초로 휴대폰에 사진을 최대 20장까지 찍을수 있는 카메라 기능을 추가해서 이후 삼성같은 기업들은 그러한 휴대폰에 카메라를 넣는 폰카 기능을 따라했고 2000년대 일본 샤프에서 휴대폰으로 인터넷 연결 없이도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수 있는 최초의 지금과 같은 방식의 폰카를 출시해서(2000년도 삼성에서 만든 폰카도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을려면 일일히 비싼 요금이 나오는 인터넷에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교세라에서 만든 VP-210과 별큰차이가 없어서 애초에 제대로 된 지금과 같은 방식의 같은 방식의 폰카를 기준으로는 2000년도 샤프에서 만든 현대식 방식의 Sharp SHO4 폰카가 최초다.) 애플,모토로라 많은 휴대폰 기업들은 본격적으로 그러한 폰카방식을 따라해서 본격적으로 폰카시장이 형성이 되는 변화를 일으켰듯이 오히려 카메라 역사에서 렌즈의 변화보다는 카메라 본체의 변화가 더 큰 혁신적인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혁신이란 무조건 새로운 재료로 재품을 만드는것만 혁신인게 아니라 원래 기존에 있던 것을 크게 개선시켜 새로운 변화를 불러 일으키는 것 역시 혁신에 해당한다. 당장 21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란 스마트폰만 해도 원래 휴대폰에 인터넷 기능을 이미 2g폰 시절부터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한국은 롤러블 텔레비전, MP3 플레이어, 폴더블 스마트폰 등을 개발하였다고 혁신적이라고 주장하며 일본은 혁신이 없는 민족성이라고 주장한다.[4] 하지만 정작 이 논리대로면 일본 또한 캠코더, 현대식 탄소봉 건전지, 플래쉬 메모리, QR 코드, 폰카,야기 안테나,청색 LED,리튬이온전지 등 롯본기 김교수 입장에서 충분히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발명품이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당장 인류의 문명 발달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노벨상 수상 업적만 보더라도, 2019년 기준 28명의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중, 발견이 아닌 새로운 개발이나 발명으로 상을 받은 사람만 따져봐도 여럿이 있다. 예를 들어, 크로스 커플링을 개발해 노벨 화학상을 받은 스즈키 아키라 및 네기시 에이이치, 그리고 리튬이온 전지의 발명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요시노 아키라, 청색 발광 다이오드의 발명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아카사키 이사무, 아마노 히로시 및 나카무라 슈지 등.

애초에 그런식의 모순적인 논리로 일본을 욕하는 롯본기는 정작 LG가 만든 캡슐형 아이스크림 기계,캡슐형 맥주기계,둥근 얼음이 나오는 LG 오브제 컬렉션 얼음냉장고 등은 혁신적이라고 찬양하지만 사실 이런 기계들도 완전히 새로운 혁신적인 기능을 추가한게 아니라 모양을 작게하고 좀더 얼음이 늦게 녹게 하는등 기본 성능을 향샹시켰을 뿐이다. 얼음을 둥글게 만드는것 온더블 등으로 역시 이미 그전부터 있었던 방식이고 캡슐형 아이스크 기계, 맥주기계같은 음식기계에 캡슐형 방식역시 캡슐형 커피등 그 이전부터 있었던 방식이며 그밖에 롯본기가 혁신적이라고 찬양하는 한국에서 만든 5G나 수소연료전지 자동차, LPG 연료선등 역시 이런 5G는 그전부터 있었던 3G, 4G와 같은 와이파이 통신기술을 성능을 좀더 빠르게 항샹시켜서 만든 것이고
수소연료전지 자동차역시 기존에 있었던 수소자동차와 전기자동차와 기술들을 각각 가져와서 만든것이고 LPG 연료선 역시 내연기관에 LPG를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건 LPG 자동차의 기술을 가져와서 만든것이기 때문에 이들역시 롯본기의 주장대로라면 그전부터 이미 있었던 기술들을 가져와서 만든것이니 전혀 혁신적인게 아닌 기존에 기술들에 약간 변형만 시키고 성능만 항샹시킨것 뿐이다.

애초에 김교수가 주장하는 '혁신적'이라는 기준 자체도 모호한데, 무엇을 혁신적이라 하는지 언급도 없이 본인이 주장하는 극히 일부의 사례만 소개해놓고서는 일본은 혁신이 없는 민족이라고 자기결론을 내리고 끝난다. 이는 김교수가 스스로 주장한 '일본에 대한 환상을 깨기 위한 불가피한 과격함'을 넘어서 그냥 국가차별 및 인종차별적 발언이다. 또한 한국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MP3 플레이어 역시 일본을 욕하는 롯본기의 논리대로라면 전혀 혁신적이지 않은게 MP3 플레이어가 수많은 음악들을 안정적으로 다운받을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MP3플레이어의 가장 핵심적인 기술인 MP3 코덱은 독일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가장 핵심 기술을 남이 만든 기술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기반 기술을 다른 데서 가져왔다고 생각하면 혁신적이지 않다고 볼수도 있는 셈인데다가 심지어 사실 MP3 플레이어 역시 사실 96년도에 이미 미국에서 먼저 미국기업 Audio Highway에서 최초의 MP3 플레이어 Listen Up player를 개발하고 출시했다. 즉 한국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MP3 플레이어는 그 이전에 있었던 남이만든 MP3플레이어를 가져와서 본격적인 상업화를 한 것으로 롯본기의 일본을 욕하는 논리대로라면 새로운 것을 만든게 아닌 전형적인 이미 남이 만들어놓은 기술,아이디어를 베껴서 장사를 한것에 불과하다.

(애초에 MP3자체도 포멧도 플레이어도 같이 만든 거라면 소니와 필립스의 합작이 있으므로 오히려 이쪽이 혁신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한국이 만들었다는 위 기술들은 대부분 혁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술 쇼나 다름없다는 평가도 있다. 롤러블 텔레비전의 경우 아직 실험 단계 수준이라 켜는 데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가격도 성능에 비해 너무나도 터무니 없기 때문에 그런 텔레비전은 누가 쓰겠냐는 의견도 존재하기도 한다.(실제로 롤러블 텔레비전 같은 경우 한해 판매량이 두자리수로 상업화에 제대로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혁신이 없는 것이 된다. 그리고 롯본기가 주장하는 한국이 최초로 만들었다는 자동차 자율주행 기술역시 자동차의 자율주행 개념은 이미 1960년대에 벤츠를 중심으로 제안되었고, 1970년대 중후반부터 초보적인 수준의 연구가 시작되었고 일본에서 77년도에 최초의 자율주행차를 개발했다. 93년도에 한국에서 나온 자율주행차는 거기서 좀더 멀리 주행할수 있을 정도로 성능을 업그레이드 시킨 것뿐이다. (사실 93년도 한국에서 나온 도로자율주행차도 실제 자율주행 거리가 10km가 조금 넘기 때문에 그 이전 자율주행차들과 마찬가지로 상품성이 없어 제대로된 자율주행차라고 말할수 없다.)

또 롯본기가 한국이 최초라고 주장하는 LG의 폴더블 티비, 롤러블 스마트폰이나 삼성의 폴더블 스마트폰은 사실 그런 식의 전자제품의 디스플레이를 접고 펼수 있는 기능을 미리 구상하고 추가하는 폴더블 ,롤러블 기능들은 선보인건 네덜란드의 폴리머 비전이 2006년도에 롤러블 콘셉트 폴더블 스마트폰을 선보인게 먼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폴더블TV, 롤러블 스마트폰, 롤러블 TV , 폴더블 스마트폰도 역시 일본을 욕하는 롯본기의 논리대로라면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아이디어를 베껴서 만든것에 불과하다.거기다가 롯본기가 자신의 책에서 한국이 최초라고 말하는 쿠션팩트는 그전부터 있었던 액상 파운데이션과 스펀지의 특성을 이용해서 만든것으로(정확히 그전부터 있었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스펀지와 액상 파운데이션을 혼합해서 화장품 케이스 안에 넣을수 있게 훨씬더 작게 소형으로 만들어서 화장품에 도입한 것이다.)롯본기의 논리대로라면 그저 기존에 있었던 것들을 여기저기 가져와서 그저 작게 만든것에 불과하고 또한 롯본기가 자신의 책에서 한국이 최초로 상용화시켰다고 말하는 cdma 통신방식과 uhd 공중파방송 역시 cdma통신방식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져 상용화가 되었고 uhd공중파 역시 일본에서 최초로 먼저 만들었는 기술이기 때문에 한국은 기존에 있던 uhd 공중파방송과 cmda 통신방송을 조금더 성능을 높여서 크게 상용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롯본기의 논리대로 따지면 한국이 최초라고 주장하는 것들역시 그저 남이 이미 만든 기술 아이디어를 베낀다음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기존제품에다 크기만 작게 만들고 그저 성능만 조금더 향상시켜서 장사를 한것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롯본기가 자신의 책에서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pc방 역시 컴퓨터는 미국에서 최초로 만들었기 때문에 롯본기의 논리대로라면 그저 남이 만들어놓은 발명품을 이용해서 장사를 한것에 불과하며 그리고 사실 그런식의 기존에 있었던 발명품을 이용해서 돈을버는 식으로 상용화 ,장사를 하는 방식은 노래방기계를 대중들이 쉽게 사용할수 있게 하고 그 사용료를 받는 방식으로 일본에서 세계최초로 만들어진 노래방같이 이미 한국에서 pc방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일본에서도 존재했던 이미 일본에서 먼저 만들어진 상용화기술,방식이며 또한 롯본기가 한국이 수천년전부터 최초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온돌역시 사실 온돌은 이미 지금의 몽골고원 북쪽지역인 러시아 바이칼호에서 이미 5만년 전부터 온돌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러시아 바이칼호에서는 옛날부터 몽골족, 이란족, 튀르크계 족등 수많은 여러 인종들이 거주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어느 특정민족이 만들었다고 볼수 없고 이후 중국에서도 7000년전부터 사용되었다. (거기다가 온돌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전체에 크게 확산되기 시작한건 조선시대 후기부터다.)
또한 Lg에서 만든 칸이 이종으로 분리가 되는 트롬 세탁기를 언급하면 그런식의 방식이 혁신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가전제품에 그런식으로 칸을 밑에 하나더 추가해서 칸을 이종으로 만들어서 안에 들어가는 내용물들을 종류별로 쉽게 분리시키는 방식은 이미 냉장고등 그전부터 있었던 방식으로 이 역시 롯본기의 논리대로 따지면 그저 남이 만들어놓은 기능등을 베껴서 만든것에 불과하다.

그밖에도 실제로 sns, 태블릿 pc, 의류관리기를 한국에서 최초로 개발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 덤이다.

실제로 sns는 95년, 97년도 미국에서 나온 클래스메이트, 식스디그리즈 닷컴이 먼저고 태블릿 pc같은 경우도 일단 최초의 태블릿 pc는 89년도 미국의 애플에서 개발했고 태블릿 pc중에서 최초로 윈도우를 쓰는 태블릿 pc는 역시 미국에서 99년도에 개발했고 심지어 2001년도 Lg에서 만든 태블릿 pc는 실제 상용화도 전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의류관리기 역시 이미 그전부터 해외에 있었던 제품으로 당장 국내에서도 Lg가 먼저가 아닌 중소기업 파세코에서 2008년도에 Lg보다 먼저 출시했다.

그리고 한국의 제조업 구조상 원천기술이 부족해서 상당부분의 전자제품의 원천기술을 일본의 부품,소재 원천기술을 수입해서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라 http://m.naeil.com/m_news_view.php?id_art=453298 (2023년 기준 대일무역적자가 누적금액이 무려 900조로 일본의 2019년 수출무역 보복 이후로도 매년 50조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이러한 한국이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제품들 역시 상당부분의 일본의 기술이 들어간 순수 한국의 독자적인 제품들이라고 말할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의 로봇 산업이 사실 한국에게도 밀리고 일본의 오토바이 산업은 중국에게도 밀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정작 전세계 로봇 시장 점유율 1위 회사가 일본의 화낙이고 오토바이 시장 점유율 1위 회사 역시 일본 기업이 혼다가 압도적으로 1등이다.

2019년도 자료를 가지고 와서 자동차의 고향인 유럽에서는 일본차들보다 국산차가 더 많이 팔린다고 하지만 실제로 단순히 개별 브랜드로 비교하면 현대 기아차가 일본 자동차 브랜드 회사들보다 판매량이 높지만 일본은 한국과 달리 자동차 분야에서 한회사가 완전히 독점을 하는 형태가 아닌 여러 기업들이 시장 점유율을 비교적 골고루 나누어서 먹는 형태기 때문에 실제로 2019년 당시 유럽내에서 국산차 총 판매량vs 일본차 총 판매량을 비교하면 일본차 판매량이 유럽에서도 국산차보다 더 높다(출처: .https://www.best-selling-cars.com/europe/2019-full-year-europe-car-sales-and-market-analysis/ )

롯본기는 일본의 세이코 같은 시계들도 거의 다 해외 브랜드 시계들을 표절한 것이라고 하지만 일본 세이코 시계같은 경우도 디지인 부부은 롤렉스랑 다른 것도 많고 그리고 시계라는 건 기본적으로 모든 시계들의 다 크기가 둥글고 안에 시계바늘이 3개 있고 숫자로 다 표시되어 있으니 기본적으로 디자인이 상당히 서로 비슷할수 밖에 없다. 그리고 롯본기는 또한 일본이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명품 브랜드를 전혀 만들지 못한 국가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일본이 과거 최고 명품인 것인 과거 각종 고급 가전제품 등이 있고 지금은 전철(신칸센)등 역사적으로 존재했는데도 무슨 일본은 전세계적으로 최고의 명품을 한번도 못만들어 보았다고 주장하는건 틀린 주장인데다가 거기다가 애초에 명품이란 것 자체가 애 단순히 기술력이 높다는 것만으로 저절로 얻는게 아니라 사실은 많은 유럽 명품제품들이 사실상 이름빨로 사느 것인데 이런 이름빨 명품들은 최소 100년에서~200년 이상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빨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것들은 절대로 단순히 기술력 높다고 하루아침에 되는게 아니라서 과거 그런 분야에 서양보다 늦게 시작하고 아직 세월도 많이 안지난 일본이 당연히 밀릴수 밖에 없는 것이고(명품 인지도 이런건 절대 단순히 기술력처럼 순시간에 올릴수 있는 것이 아니니 한국만 해도 기술력은 빠르게 성장했어도 전세계적인 명품 브랜드 인지도 이런건 서양에 비하면 택도 안되는 수준이다.)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의 도요토의 생산방식이 딱 필요한 재고량만 구입하는 방식이여서 그렇게 되면 나중에 혹시라도 재고량이 부족할수도 있으니 운반비용이 더 든다고 비효율적이라고 비난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방식이 더 효율적일수 있다. 물론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면 비상상황이 발생했을때 곤란함을 겪을수는 있지만 평소에는 딱 필요한만큼만 구입하고 팔아서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게 물량을 과도하게 많이사서 나중에 다 팔지도 못하고 버리는 낭비를 하는것보다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3. 일본 문화 비난및 그밖의 일본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편집]


영상을 통해 일본의 문화는 폭망하고 있다고 비판을 넘어 거의 비난을 하는데, 일본 실사 영화, 일본 음악의 아이돌 분야 등 일부 분야에서 나타난 현상을 문화 전반으로 확대해석했다는 점이 문제다. 서브컬처에 해당하는 일본의 게임은 닌텐도[5], 소니 등이 버티고 있는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분야였고, 일본의 애니메이션도 일부 작품에 있어 작품성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더라도, 꾸준히 명작이라는 평가를 듣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으며[6] 수출 실적을 비롯한 경제적 이윤 창출 효과가 높은 편이다.



그리고 일본 문학계는 1945년 이후에만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2명 배출해냈으며, 현재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몇몇 노벨 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로 꼽히는 일본인 작가들이 존재할 정도로 일본은 문학계에서 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꼽힌다. 이외에도 NHK 등으로 대표되는 언론계 또한 일본 문화의 특별한 강점으로 꼽히며, 2018~2019 세계 주요 연구 기관들의 소프트파워 역량 조사에서 일본은 3~8위 사이의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의 경우, 일본인만 8명[7]이 수상하여 현재 미국과 공동 1위를 달리고 있는 등, 건축 예술을 통한 문화의 접목 역시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긍정적 지표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 없이 본인의 주관적 경험이나 일본 문화계의 부정적 면모들만 추려 비판하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은 창의성이 없고 표절만 한다고 비난하지만 위에글 처럼 발명품 노벨상 등 여러분야 에서 스스로 발명한 것들이 많고 문화 쪽에서도 표절작품도 많이 존재하지만 히사이시 조 , 칸노 요코(칸노 요코가 여러 표절한 작품이 있다고 해도 그의 모든 작품을 다 표절했다고 할수 없다)같은 많은 작곡가들이 만든 좋은 음악들, 게임쪽에서는 젤다의 전설, 포켓몬, 슈퍼마리오 시리즈 같은 수여러 명작 게임들과 만화,애니 쪽에서도 일본은 트레이싱한 장면이나 캐릭터 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게 훨씬 많다.(원피스 같은 경우도 몇몇 기술들이나 캐릭터들을 도용하긴 했지만 원피스의 수많은 캐릭터들이나 , 기술들중 일부가 표절이라 하더라도 원피 스 전체를 표절작품 이라고 할수 없듯이)



일본에 존재한는 DQN 네임들을 소개하는데 제대로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 마치 일본에 이런 특이한 이름들이 흔하다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져있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이름은 매우 희귀하며 일본인들에게도 크게 비판받는 사항이다.

거기다가 댓글들에 포켓몬, 마리오, 젤다같은 장수 컨텐츠를 다른 아이디어가 없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댓글도 있는데 앞서 기재된 컨텐츠들은 그 만큼 세계적인 팬들에게 사랑받기 때문에 장수 컨텐츠로 있는게 가능하고 일본 쪽의 미디어는 다른 작품들도 계속 양산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비난도 옳지 않다.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근현대 문학인 나츠메 소세키를 언급하며 일본인들이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나츠메 소세키는 사실 표절로 명성을 쌓은 작가라며 폄하하였다. 실제로 나츠메 소세키의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일본에서 표절 의혹을 제기하는 소설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츠메 소세키가 이 한 가지만 낸 것도 아니고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포함하여 중장편, 단편포함해서 35편이나 되는 문학 작품을 낸 작가이며 표절의혹이 일어난 작품외 34편은 표절 의혹조차 없는 작품들인데 이는 단 한 가지 사례만으로 너무 서두른 비판을 한 것이다. (거기다가 표절이라고 정의를 내릴 것이라면
비슷하다고 추측되는 작품하고 그 작품의 세세한 내용까지 비교를 해서 말해야지 대략 공통됨 점이 몇개 정도 겹친다고 표절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성급한 것으로 그런 식이면 한국의 오징어 게임 역시 그 이전 데스 작품들로부터 표절 혐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논리라면 한국의 작가의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황석영의 소설 아우를 위하여를 표절했라는 의혹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문열 작가도 표절로 유명해진 작가라고 비난이 가능하다.

거기다가 일본 파칭코 총 매출이 200조원이고 전세계 카지노 매출이 180조원 이라면서 일본은 도박 천국이라 비난하는데 애초에 카지노랑 파칭코랑 동일선에서 비교하는 것부터가 오류이다.
파칭코 같은 경우는 참가자가 돈을 잃으면 그걸 빠칭코 업소가 전부다 가져가는 시스템이지만 카지노 같은 경우는 룰렉이나,블랙잭같이 카지노랑 싸우는 도박이 아닌 홀덤같이 플레이어 끼리 싸우는 도박들은 카지노 업소는 기본적으로 수수료만 가져가고 돈을 잃으면 나머지는 전부 다른 상대방 측이 가져가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업소측이 많은 수입이 나는 파칭코가 카지노에 비해 훨씬더 매출이 높게 나오는 시스템 이라는것.
거기다가 일본 도박 중독자가 536만명 이상 이라고 2013년 기사를 이용해서 주장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면 최소 파칭코 중독자 2명중 1명 이상은 중독자 라는 말인데 사 2013년 후지 노동성에서 발표한 536만 이상이라는 수치도 도박 중독자 숫자가 아닌 도박 중독자 의심 수치를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2017년 후지 노동성에서 조사한 일본내 도박 중독자 조사표에 의하면 2017년 현재 도박 중독증이 있다고 의심되는 숫자는 70만명이고 생애중에 한번이라도 도박 중독증 혐의가 있는 경우가 320만명이다.
거기다가 홍콩의 카지노 매출이 20~30조원 수준이라고 하는데 실제 홍콩 카지노 매출은 연 40조원 이상 이상이며 미국내 도박 중독자가 1.58% 이상이라는 말 역시 2002년도 자료에서 나온 수치로 20년 가까이 지난 자료를 근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롯본기는 일본의 문학이 형편없고 한국의 문학에 비할바가 못된다고 하지만 정작 현실은 전세계 노벨 문학상에서 일본은 일본국적의 노벨상만 2명 외국 국적의 일본계 수상자까지 합치면 총 3명인 반면 한국은 0명이다. 그리고 롯본기는 박경리 소설가의 말을 인용해서 일본 문학을 비하하지만 박경리 소설가 역시 스스로를 반일 작가라고 말할 정도로 상당히 일본에 대한 혐오감이 있는 작가다.

롯본기는 과거 일본의 자동차나 카메라 등의 표절을 언급하며 일본을 까지만 사실 그런 과거 카피들은 과거에는 지금과 같이 인터넷도 없던 시대라 저작권 개념이 없었던 시대기 때문에 사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도 그런게 비일비재했고 지금은 중국이 제2의 경제대국이지만 여전히 카피짓을 일삼고 있는등 사실 이거 과거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일본이 지금도 옛날보다는 표절이 덜하지만 여전히 진행중이긴 하지만 사실 그건 저작권 의식이 높아지 현재의 한국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금까지 심심찮게 터지는 문제이긴 하다.(특히 웹툰쪽.) 그리고 롯본기가 일본이 표절했다고 주장한 것들 중에서 표절이라고 볼수 없는것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일본 영화 고질라로 고질라가 베꼈다고 주장하는 미국 영화는 일반적인 공룡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실제 존재했던 전형적인 고대 공룡의 모습을 한 괴물이 나오는 영화인데 공룡이란 디자인 자체는 그 작품만의 독특한 디자인을 하고 있지 않은 이상 특정 집단이나 개인이 만든게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일반 공룡의 모습 자체는 특정 집단이나 개인의 저작권이라고 볼수 없다.

롯본기는 전 세계적으로 예술끼등등 모든 부분이 한국인들이 일본인들 보다 높을 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수준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구글에 전세계 관심 트랜드에서 검색을 해보아도 일단 일본은 애니메이션 쪽 하나만 해도 전세계적인 인지도 트랜드가 한국의 케이팝 못지않고 그리고 영화같은 경우도 역대 아카데미 상 개수가 일본은 15개인 반면 한국은 아직 5개 정도의 수준이다. 그리고 음악이라 이런 부분 역시 한국의 방탄이란 이런 몇몇 그룹들이 인기가 있긴 하지만 빌보드 차트 100 순위안에 드는 음악들은 거의 대부분이 미국이고 한국의 K팝은 방탄같이 소수의 일부 한정된 가수들의 곡에 한정되있다.

그밖에 일본이 비효율적 이라는 근거중 하나로 벽걸이 에어콘을 예로 드는데 실제로 일본에서 벽걸이 에어콘이 많은 가장 큰 이유는 지진 때문이며
(벽걸이 에어컨은 말그대로 에어컨이 벽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스탠드에어컨에 비해 지진이 나도 에어컨이 넘어질 위험이 작다.)
그밖에 일본내 폐렴 환자가 많은게 이로리 때문이니,요바이는 일방적인 강간이였다니(실제로 요바이도 주초 촌장이 허가한 경우에 한해서 진행이
되며 여성이 거절할 권리도 있었고 또 여성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여성의 가족들도 있으니 함부로 강간을 저지르기도 어려웠고 또한 여성이
임신을 하면 여성이 아이의 아버지를 선택할수 있는 여성에 대한 제도적 안전장치도 존재했다.)
또한 옛날 일본은 사무라이 들이 아무렇게 않게 사람을 죽여도 문제 없었다니(애초에 당시 일반 백성들 자체가 다이묘한테 세금내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다이묘의 재산과 거의 마찬가지인데 다이묘 밑에 있는 사무라이들이 함부로 백성들을 죽일수도 없는 데다가 키리스테고멘도 상대가 자신을 모욕했다는 명백한 일치된 증언들이 있어야 하면 그렇지 않으면 일반 살인죄로 처벌받았으며 츠치기리 역시 명백한 일본내에서도 불법으로 주로 사회에 품은 낭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묻지마 범죄와 비슷하듯이.)

일본인들은 잘 이를 닦지도 씻지도 않는다니(이건 통계치가 말하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일본보다 통계가 높게 나온 아프리카나 유럽은 아예 몸에다가 똥을 바르고 다닌다는 말이 된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러한 행태는 마치 일본내 혐한들과 똑같은 수준이다. 일본내 성범죄가 한국보다 낮은 이유는 일본내 성폭행율이 한국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그렇지 실제로는 일본이 그런 성범죄들이 비일비재 하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성폭행안에는 단순히 강간뿐만 아니라 치한이나, 성희롱들이 다 포함되는 개념으로 실제 일본내 성폭행 신교율은 4%수준이고 한국내 성폭행 신고율은 6~10%로 대략 8% 수준이다. 실제 일본내 강간건수는 2010년도 기준으로 1400건 수준이고 한국의 직접 성교로 인한 강간건수는 2020년 기준으로 2300건으로 한국이 일본보다 신고율이 2배 정도 더 많지만 일본이 한국보다 인구가 대략 2.4배 이상 많으니 신고율 인구대비를 다 따지면 일본이 대략 2800건, 한국이 5600건으로 여전히 일본의 인구대비 강간비율은 한국의 절반정도 수치밖에 안될 정도로 낮은게 사실이다.
( 출처: https://namu.wiki/w/%E5%A7%A6%E5%9B%BD ) , (출처: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32&tblId=DT_13204_2011_211&conn_path=I3 )

롯본기는 일본이 노벨상을 많이 받은 이유도 과거 일본이 제국시절 당시 731부대의 생체실험으로 그렇다는 헛소리를 하는데 사실 731부대의 실험은 그때당시의 시대적 한계와 일본제국의 광기로 그렇게 효율적인 실험도 아닌 비효율적인 실험들이 상당부분 이였고 그나마 효울이 좀 있었던 실험들도 무기 위력 실험같이 어느정도 효율이 있다 수준이였지 노벨상을 받을 수준의 획기적일 정도로 대단한 수준은 절대 아니였다. 그리고 미국같은 경우도 어차피 자기들이 731부대의 피해자도 아니고 그냥 좀 약간의 정보들을 얻고 당시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넘어가 주었고 사실 미국은 일본에게 도쿄 대공습, 원자폭탄 투하 등 일본에게 자신들이 전쟁중 입은 피해에 몇배로 철처하게 복수를 해주었기 때문에 극동군제군사재판이나 일본의 최고책임자인 쇼와 덴노 히로히토에 대해서도 전혀 처벌을 하지 않는 등 일본의 전범재판에 대해서도 독일의 전범재판에 비해서 비교적 봐주기식 재판을 하는 등 최대한 과거 전쟁 문제를 끝내고 일본을 통치하는데 일본의 협력을 얻을려고 하는 태도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사실 조금만 신중히 생각을 해보더라도 말이 안되는 주장인게 생체실험으로 얻은 실험결과로 연구자료를 낸다고 해도 생체실험을 통해서만 얻을수 있는 연구들같은 경우는 그 연구자료가 사실인지 전세계적으로 검증을 될려면 전세계 과학자들이 직접 그 연구자료를 보고 생체실험을 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는이상 증명을 할수가 없기 때문에 사실상 연구자료가 사실인지 증명을 할수도 없는 비윤리적인 연구자료들을 대상으로 전세계 유명과학자들이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상을 준다는건 있을수 없는 일이다.(연구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할수도 증명할수도 없는 비윤리적인 연구자료들을 대상으로 전세계 과학자들이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상을 준다는 말이나 된단 말인가?)

롯본기는 일본의 영화 문학이나 일본의 거장인 구로사와 아키라 역시 별거 아니고 오히려 지금의 한국의 영화 감독들이 구로사와 보다 더 뛰어난 인물들이 많다고 주장하지만 구로자와가 지금까지 존경받는건 구로사와 감독 영화에 그 특유의 뛰어난 영상의 회화적인 미학성으로 특히 독특한 색채와 구도의 시각적 표현에다가 영화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휴머니즘 의식 뛰어난 표현력 이런것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고 실제로 그런면에서 스티븐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 같은 감독들도 구로사와를 높이 평가하고 실제로 많은 스타워즈, 라이언 일병 구하기등 많은 명작 영화들이 그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내용과 전투묘사들을 많이 참조해서 만들어졌는게 현실이고 일본의 영화 문학역시 전세계 공식적인 영향력을 가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베를린 국제 영화제 황금공상에서 한국 영화가 수상한 적보다 일본 영화가 수상한 적이 훨씬 많고 아직까지 여전히 역대 그런 전세계적인 공식적인 영화상 수상횟수는 여전히 일본이 현재까지 압도적인 1위다.

롯본기는 일본의 활이 쓸데없이 크면서 한국 활보다는 오히려 사거리가 짧다고 무조건 크게 만들면 좋은줄 아는 일본인의 무식함과 미개함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일본의 활이 한국의 활보다 크면서 사거리는 더 짧았던 이유는 한국의 활은 일반적으로 나무를 덧대어 붙이는 식의 합성궁인데 나무를 붙일때 사이사이에 아교를 붙어서 만들기 때문에 활의 크기가 크지 않지만 탄력 자체는 강한데 비해서 일본은 한국보다 평균적으로 온도가 높고 습도가 높기 때문에 나무를 붙여서 활을 만들기가 어렵고 설령 나무를 붙여서 만들더라도 습도가 높아서 관리가 힘들기 때문에 조선의 활과 같은 방식으로 합성궁을 만들기가 어려워서 나무의 탄력을 늘리는 방식보다 단순히 활의 크기를 키워서 위력을 강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택할수 밖에 없었다.

롯본기는 일본도가 허구한날 쉽게 부러지는 허접한 칼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사실 롯본기가 예시로 든 몇몇 예시들도 면밀히 살펴보면 자신에게 편파적인 사진들만 제시했는데 그 예시들에 대해 반박하면 일단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일본도로 철모를 쓴 미군을 공격하다가 철모의 어느 정도 깊이의 자국만 내고 철모를 완전히 뚫지 못해서 오히려 일본도로 공격한 일본군이 미군의 총에 맞아서 죽은 사건이 있지만 사실 애초에 철모 자체가 2차 대전당시 적의 총탄이나 포탄 파편들도 어느정도 방어가 가능하게끔 만든 방어구인데다가 당시 미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최고수준의 철광기술을 가진 국가기 때문에 칼로 그런 당시 미국의 철모를 완전히 뚫지 못했다고 해서 칼이 품질이 쓰레기라고 결코 말할수 없고 그리고 이전부터 한국 인터넷 사이트에서 퍼져있던 일본도로 콜라 페트병을 쳤는데 일본도가 휘어졌다는 영상역시 애초에 그 영상에 나온 일본도는 진짜 일본도도 아닌 고무로 만든 모조품 가검인데다가 실제로 일본도로 실험 결과 페트병이 베여지는걸로 나왔다.(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UddTKZNII68 ) 애초에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체가 차라리 유리처럼 쉽게 부러질지언정 고무줄 처럼 휘어지는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데가 애초에 저런 식으로 칼이 쉽게 고무줄처럼 휘어졌다면 칼을 만들때 쇳물에 녹여서 망치로 두드려서 칼 모양자체를 만들지를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흔히 인터넷에도 일본도가 쉽게 부러져서 사무라이들이 칼을 여러개 차고 다녔다는니, 일본도가 쉽게 부러져서 당시 일본에는 칼을 부딪히는 기술 자체가 없다니 대나무를 베다가 쉽게 부러진다르니, 정으로 쪼아서 조각할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무리다는 등 일본도가 다른 동시대의 칼들에 비해서도 성능이 안좋다는 식의 소문들이 널리 퍼졌는데 일단 일본도가 대나무도 쉽게 베어버리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반박으로는 일단 칼은 기본적으로 중량 1~2kg에 두께 3~6mm 전후인 얇은 철판이다.정도 이상의 강한 충격을 받으면 당연히 부러지거나 휘어지며, 제작자나 사용자의 '실수'가 있다면 더 작은 충격에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비단 일본도 뿐만 아니라, 다른 장도들도 그렇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중기병들의 갑주전투에서 사용되던 대갑주 롱소드 에스터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칼날을 붙잡히면 휘어져서 못쓰게 될 위험이 있었고, 기병들은 전투 도중 검이 망가질 때를 대비해야 했고 일본도가 실전이나 베기 시험 도중 쉽게 망가졌다는 증언의 출처는 대부분 중일전쟁 시기 일본육군 군도수리반의 기술자였던 나루세 칸지의 <싸우는 일본도:戦ふ日本刀>와 <실전도론:実戦刀譚>이다. 하지만 나루세 칸지의 저서에서는 같은 전통 일본도라도 고도(古刀)와 신도(新刀), 신신도(新々刀)에 대한 평가가 다르며, '에도시대 망나니의 시참용 검'과 '군진에 필요한 탄력있고 강한 검'을 구분하고 있다. 에도 이후부터 내려진 전쟁금지령 때문에 전체적으로 성능이 떨어진다고 평가받은 신도(新刀) 중에도 한 번의 전투에서 휘어져 못쓰게 된 검, 날이 깨졌지만 계속 사용할 수는 있었던 검, 전투에 적합한 일부 좋은 검 등 다양한 사례가 존재한다. 약하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단단하고, 무르더라도 충분히 사용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을 비롯한 근대 전쟁사에 등장한 일본 군도 역시 휘어지고 부러지는 등 성능 자체는 좋지 못했으나 철강 기술의 개편으로 제값을 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실제로 실험 영상에서 일본도로 대나무나 두개골을 쉽게 베어버리는 실험 영상들도 많기 때문에 일본도의 거의 대부분이 대나무도 쉽게 베어버리지 못한다는 말 자체도 근거가 없다. 그리고 정으로 쪼아서 조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검신이 무르다는 말에 대한 반박도 애초에 이는 강도보다는 경도의 문제로, 무게, 가공 등을 고려한 전투용 도검의 이상적인 경도는 HRC 50전후다. 잘 만든 칼이라도 단단한 못으로 긁고 쪼면 파인다. 다만 세밀한 조각이 가능하다는 것과 못이나 정으로 찍어 파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물론, 근대 이전의 도검은 거의 대부분 해당사항이 있다. 당장 현대 기술로 제작된 도검만 봐도 스테인리스 재질의 군용 나이프가 HRC 60 정도이다. 그리고 일본도가 강도가 떨어져서 일본검술에는 검을 부딪히는 기술이 없었다는 말에 대한 반박도 일본 검술에도 칼을 부딪히는 신도무념류,카토리신도류 같은 검술이 잘만 있다.그리고 일본 무사들이 검을 여러개 갖고 다녔던 것도 실제로 애초에 칼도 상황에 따라 쓰이는 용도가 다 다르기 때문으로(좁은 협소한 골목에서 서로 가까이 바짝 붙어서 싸울때는 순신간에 상대방한테 베일수가 있어서 최대한 빨리 칼을 휘둘러야 하니 빨리 칼을 휘두룰수가 있는 짧은 탄도(단도)를 사용했고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대치하며 싸울때는 상대방이 미리 가까이 오기전에 멀릴서도 휘두를수가 있는 긴 장검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당시 유럽도 상황에 따라서 가장 알맞은 칼을 쓰기 위해서 여러 종류의 칼을 차고 다녔다 https://www.youtube.com/watch?v=whSEcvOxEGM

그리고 정작 조선왕조 실록을 포함한 조선의 기록에서도 당시 일본도를 동아시아 최강의 칼이라고 호평하고 기록들만(당시 청나라 같은 경우도 조선의 조공품으로 일본에서 만든 일본도를 선호해서 앞으로 일본도로만 바치라고 명령할 정도고 조선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일본으로부터 일본에서 만든 일본도를 바치지 못했을때는 품질이 떨어진 조선의 환도를 대신해서 바치니 송구스럽다고 사죄까지 할 정도로 청나라에서조차 일본도를 동아시아 칼중에서 성능면에서 일본도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선호하였다.) 가득한데다가 일본의 무사들이 칼을 여러개씩 차고 다닌 이유도 상황에 따라서 쓰는 칼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즉 칼도 용도에 따라 여러 종류의 칼들이 있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가장 용도에 알맞은 칼을 쓰기 위해서 항상 짧은 칼과, 긴 장검을 길이가 서로 다른 칼들을 차고 다니는 것이다.(그건 중세시대당시 유럽의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협소한 장소에서 서로 가까이에 밀착해서 싸울때는 최대한 상대를 빨리 공격하는게 중요하니 휘두르기 쉬운 길이가 짧은 칼인 와키자시를 쓰고 탁트인 곳에서 서로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싸울때는 긴 사거리를 이용해서 상대가 가까이 다가오지 전에 멀리서 먼저 상대를 베는게 중요하니 길이가 긴칼인 노다치를 차고 다닌다. 당시 조선측 기록에서도 일본의 무사들이 상황에 따라서 가장 용도에 알맞은 칼을 쓰기 위해서 길이가 서로 다른 두종류의 칼을 차고 다닌다고 나온다.( https://namu.wiki/w/%EC%9D%BC%EB%B3%B8%EB%8F%84 자세한건 이 항목참조. 이 항목에 일본도와 검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같은 경우는 무신들이 한자루의 칼만 차고 다니긴 했지만 그건 조선은 일본처럼 칼을 전문적으로 다루고 중요시하는 국가가 아니다보니 장수들이 지희용으로 칼 한주식만 차고다닌 것이다.


그리고 일본도가 유튜버나 이런 실험 영상들에서도 서양의 검에 비해서 강도면에서 밀리긴 하지만 애초에 당시 서양은 플레이트 아머같은 강철 갑옷을 입었던 강철이 일상이였던 동네여서 그런 강철 갑옷에도 타격을 주기 위해서 칼도 최대한 강도 면에서만 몰빵해서 만든 곳이기 때문에 당시 그런식의 강철을 사용하는게 일반적이지 않았던 동아시아랑 똑같이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



3.1. 일본 식문화 폄하[편집]



8월 31일 유튜브에서 고급지다는 이미지[8]를 지닌 일본 요리가 독창적인 게 뭐가 있냐며 일본 요리에 대한 비판만 나열했는데 예를 들어 일본의 명점이라 소문난 스키바야시 지로의 가게에 2번 갔고 메뉴판과 오노 지로와의 사진을 보여주며 인증하며 먹어봤는데 본인의 주관적인 입맛임에도 불구하고 밥이 시큼하다[9] 것부터 시작해서 초밥이란 건 단순하게 좋은 생선, 좋은 쌀, 좋은 간장, 좋은 와사비, 쓴 밥 위에 날것을 얹은 것 뿐이라며 폄하하고 마지막에 바르는 마법의 간장 소스를 바르고 일본인들이 그걸 먹으며 호들갑을 떠는데 해당 소스는 자기가 미각이 섬세하다 보니 소스에 미원이 듬뿍 들어갔다느니 초밥을 맹비난했는데 이는 초밥에 대한 무지이다.

애당초 모든 요리는 좋은 재료를 써서 정말 요리를 절망적으로 못하는 양반이 다루지 않는 이상 어류나 육류만 해도 그냥 소금간 후추간만으로도 맛나는것은 물론이며 초밥도 에도마에 스시[10], 니기리 스시, 하코스시 등 여러가지 조리법이 있다. 간단한 예로 장어에 바르는 달콤짭짤한 양념 쯔메 같은 경우에는 장어 삶은 물을 보관했다가 이를 간장과 여러 양념을 섞은 뒤 몇 시간 동안 불 앞에서 해당 소스가 타지 않게 저어야 하는 정성이 들어가는 조리이며 게다가 최근 오마카세 전문 초밥 요리사들이 마지막에 소스를 발라주는 건 가게마다 다르지만 미원이 아니라 미원의 주요 성분이 많이 함유된 다시마를 이용하여 간장에 감칠맛을 더하는 집이 있고 보통은 일반 간장이 대부분이다. 이는 손님들이 젓가락으로 초밥을 집다가 간장에 아예 빠뜨리거나 손으로 집어먹을 때 재료가 아닌 밥에 간장을 찍어서 형태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 간장을 과도하게 찍어 본 맛을 못 느끼는 것을 막기 위해 초밥 요리사들이 적정량의 간장을 발라주는 행위이지 마법의 소스가 아니다. 최근 떠오르는 초밥 컨텐츠 유튜버인 쉐프 코우지의 영상[11]을 보면 김교수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초밥의 밥알 개수 정확하게 쥐는 게 10년, 15년 노가다하면 익혀지는 것인데 이게 뭐가 대단하냐고 비판하는데, 그 10년, 15년이 누구 개집 이름도 아니고 그 정도로 오랫동안 만든 요리에 그 정도로 파고들었다는 것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 칭송받아야 마땅하지 하찮다고 비난받을 사항이 아니다.

애초에 위의 주장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요리 중 하나인 비빔밥도 별다른 조리법이 필요없이 대충 데친 나물들과 계란 프라이를 얹어 섞어 먹으면 끝인 별거 아닌 요리로 폄하할 수 있다. 애초에 비빔밥만이 아니라 한국이든 일본이든 다른 나라든간에 외국산을 국내산이라 속이거나 질낮은 식재료를 쓰는 곳도 보이는 상황에서 좋은 식재료를 쓴다는 것 자체가 식당의 신뢰성을 보증해주는 지표이고 조리에 대해서는 위에 상술해놨듯 말할 필요도 없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김교수의 지적대로면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요리인들이 비난받는 꼴이다.

사케도 우리나라가 가르쳐주고 일본인에게 '그냥 삭혀'라고 말한 게 사케라는 이름이 되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12] 낫또도 요리가 아니라 식재료라 칭하고 일본의 야채절임(츠케모노) 중 배추절임도 우리나라가 가르쳐줬으며 오니기리도 쌀밥과 소금만 있으면 되고 야키토리도 그냥 꼬챙이에 고기 구워주는 게 뭐가 독창적이고 멋있어 보이냐며 폄하하였다.



이 또한 허무맹랑한 소리가 대부분인데, 우리나라의 김치도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고추를 수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배추에 소금을 절이고 후추를 넣어 만드는 백김치가 기본적이었고 현재 주로 취급되는 빨간 김치는 생각도 못하던 상황이었다.(그전에 한국에도 고추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일종의 고추냉이고 지금과 같은 빨간고추는 임진왜란때 일본을 통해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일본 야채절임은 상술한 방식 외에도 '겨'라는 일본식 누룩에 재우는 방식이 있으며 오니기리(주먹밥) 또한 밥에 소금만 쳐서 먹는 것도 있기는 하지만 예전부터 안에 장아찌를 넣거나 양념을 더하는 등 여러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 전통음식이다. 야키토리 또한 닭껍질, 닭가슴살 등 여러 부위에 소금, 양념 등 여러 소스등 다양한 변화가 생겼고 최근에는 고급화가 진행되어 고급 닭으로 조리한 야키토리를 취급하는 요리집도 존재한다.

우동도 어느 한 일본인이 '칼국수가 한반도에 넘어온 이후 생긴 음식이다.'라고 주장한 개인의 견해를 바탕으로 '우동은 한국이 일본에게 전수해준 음식이다!'라는 이상한 주장을 펼친다.[13] 애초에 이 논리대로면 붉은 김치는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고추를 유통시켜준 덕분에 만들 수 있어졌으니 붉은 김치의 원산지는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14] 그리고 또한 김역시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나 근거가 없고 일본에서 최초로 김을 만들어서 먹기 시작한건 야마토 시대 말기로 몬무 덴노 재임기인 702년 2월 6일에 공표된 다이호율령에 김(海苔)이 조세의 대상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김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713년에 편찬된 히타치국 풍토기(常陸国風土記)에서도 그 지방이 김으로 유명하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이 김을 주로 구워먹지 않다고 주로 생으로 먹는다고 미개하다고 비하하지만 사실 생으로 먹든 구워먹든 그건 본인의 취향으로 그걸 가지고 우월을 정하는건 옳지 않다. 그리고 김을 굳이 구워먹든 그냥 먹든 간에 생김으로 먹어도 노리마키 처럼 다른 재료들을 이용해서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수도 있다.

또한 일본의 대중적인 요리 중 하나인 타코야끼 또한 덴마크의 에이블스키버라는 요리를 베꼈을 뿐이며 에이블스키버의 역사가 더 기므로 에이블스키버가 대단한 요리이며 타코야끼는 그냥 하찮은 모방품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데[15], 이 말대로면 한국인 중 안 먹어본 사람이 드물 김밥도 일본의 노리마키에서 유래된 음식이므로[16] '노리마키보다 역사가 짧은 하찮은 모방품'이 되어버리고 김밥을 만들거나 먹은 사람들 모두 '일본요리의 짝퉁이나 먹거나 만드는 사람들'로 격하시키는 꼴이 된다. 애초에 옛말에서 '발명은 모방에서 나온다.'라고 할 정도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무에서 유를 발굴하는 경우보다 기존에 있는 걸 변화시키면서 발전시켜나가는 것인데, 김교수의 이런 발언은 이걸 전부 무시하는 것이다.[17] (그리고 그런 식으로 일본 요리를 비하하는 롯본기는 정작 한국의 회오리 감자나,감자 핫도그, 소세지 빵, 콘치즈 등 이런 것들은 또 대단한 음식인마냥 찬양하는데 사실 롯본긴의 주장대로 따지면 회오리 감자역시 서양의 감자칩을 베낀 것에 불과하고 감자핫도그 역시 단순히 미국의 핫도그에 튀긴 감자를 추가한 것으로 미국의 핫도그를 베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감자튀김 역시 서양에서 만든 굉장히 흔한 요리며 소세지 빵 역시 그전부터 있었던 서양의 가로로 길쭉한 핫도그를 베낀 것에 불과하며 콘치즈 역시 구운 옥수수에 다가 그전부터 서양인들이 즐겨먹는 구운치즈를 넣어서 같이 먹는것에 불과하며(애초에 구운 옥수수에 다가 치즈를 같이 넣어서 먹는 방식은 멕시코의 엘로테가 먼저다. 다만 멕시코의 엘로테는 구운 치즈를 같이 섞어서 먹는게 아니가 구운 옥수수 위에 치즈가루를 위에 올려서 먹는다는 차이점 정도가 있다.) 양념치킨 역시 서양음식인 치킨에다가 그저 위에 물엿과 고추장 양념을 부어서 먹는것에 불과하며 롯본기가 한국요리라면 말하는 짜장면 역시 사실 한국내에서 살고 있는 중국계 화교들이 한국에서 현지화해서 발명한 음식이다.

그뿐만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군의 각기병의 원인으로도 원래 일본 음식이 영양분이 없어서 생겨났다는 헛소리를 하는데 실제로 메이지 시대 당시 일본군에게 각기병이 생겨난 이유는 당시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흰 쌀밥을 주식으로 지급했는데 실제로 쌀밥은 잡곡이나 현미에 비해서 인체에 꼭 필요한 비타민B1이 결핍되어있다. 그 시대에는 아직 비타민이라는 존재가 밝혀지기도 전이라 병사들도 주로 쌀밥만 선호하면서 고집했다. 게다가 당시 병사들은 농민이나 하층민 출신 병사들이여서 잡곡없는 쌀밥은 그야말로 귀한 것이였기에 반대 했던것. 추후 일본 정부서 각기병의 원인이 순수 쌀밥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여 현미나 잡곡을 넣겠다는 조치에 크게 반발한 적이 있었고 당시에 비싼 쌀밥을 주는 대신 고기류 같은 육류등 군대 내의 부식은 부실하여 당시 병사들은 일본 정부가 쥐어짜낸 쌀밥과 부실한 반찬을 먹었기 때문에 각기병이 일본군 내에서 크게 유행한 것이다. 이때문에 해결법으로 당시 일본 해군은 카레를 개량한 카레라이스로 각기병을 해결했고 육군은 고기감자조림으로 이를 해결하였다. 이 두 음식은 전역자 출신들을 중심으로 크게 퍼진덕에 대표적인 서민요리가 되었다.

거기다가 스키바야시 지로의 일본 유명 초밥집을 까기 위해 미슐랭 가이드가 자신들의 타이어를 더 팔아먹기 위해 배포한 맛집 지도일뿐인 근본없는 가이드북(미슐랭은 타이어 팔아먹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운전자들이 어디까지나 운전하다가 배가 고프면 가까운 맛집에 가서 즐기라는 의도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순수하게 남 좋은 일 해주는 영리기업은 없기 때문에 타이어 소비를 늘리려는 의도도 없다고 할수 없다. 하지만 1900년부터 시작해서 2020년 현재 120년간 운영해온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요리 맛집 가이드북의 대표명사로 될 정도의 위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단순히 타이어를 팔아먹기 위해서 허위 정보들을 마구잡이로 퍼트렸다면 절대로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질수 없을 것이다.)이라고 폄하하기 까지 하였다. 게다가 초밥을 까기 위해서 일본 명점 초밥집을 방문한 버럭 오바마 등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서양 고위 정치인들이 먹고 호평한 이력을 폄하하기 위해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맛에 섬세하지만(그리고 그런 프랑스도 음식이 별로 대단한게 없다고 까는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그렇지 못하며 특히 미국,영국 사람들은 양 많으면 그냥 좋아한다는 과도한 일반화 발언까지 하였다.(영국 요리야 맛이 없는 걸로 유명하긴 하지만 영국 요리가 맛없다는건 다른 서양 국가들 뿐만 아니라 영국 내에서도 영국인들 한테도 비판받는 부분이고 롯본기는 단순히 미국,영국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 거의 대부분이 맛도 제대로 못본다고 같이 까면서 일반화 하는 모습 등을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는 일명 김말이 초밥도 간토풍 김말이 호소마키를 가지고 단순히 단무지, 낫토, 참치와 오이 김말이 이렇게 단순하고 맛도 없고 영양가도 없다며 폄하하는데 김말이 초밥은 엄연히 마지막 입가심으로 주는 역할이기에 단순한 역할이다.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 요리는 한국 요리에 비해서 오래 발효된 음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 요리는 한국 요리에 비해서 떨어진다고 말하지만 사실 발효된 요리가 다른 음식들에 비해 건강에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대신 냄새가 많이 나고 청국장 같이 고유의 쾌쾌한 맛에 먹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대표적으로 청국장이고 된장찌개 역시 쌈장을 넣어서 만든 고깃집 된장찌개는 냄새가 거의 안나지만 전통시 된장찌개는 냄새가 많이 나서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는 데다가 쌈장 된장찌개는 냄새가 별로 안나서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지만 대신 된장에다가 고추장을 전부다 넣어서 만들기 때문에 나트륨 과중으로 인해 전통 된장찌개 보다 건강에 안좋다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웃긴것은 롯본기가 그렇게 폄하하는 초밥역시 원래 생선을 발효시켜서 만든 발효음식이다.) 음식이란 건강성도 중요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쉽게 먹을수 있도록 접근성도 중요한데 발효 음식들은 그런 전급성에서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단순히 음식을 발효의 양으로 우위를 정하는것 무리가 있다.



4. 썸네일 및 제목 관련 비판[편집]


파일:김교수 썸네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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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소를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어넣기 하면 이미지를 볼수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썸네일이 거부감이 들 정도로 너무 자극적이다.

'일본인에게만 있는 정신병'이나 '일본인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 등의 썸네일을 걸거나 ‘일본인은 철학이 없다’나 ‘일본인이 판단력이 떨어지는 이유’를 제목으로 다는 등 단순한 비판이 아닌 아예 일본인 자체를 깎아내리며 비난하는 어조를 보이는 등 너무 지나치게 혐오적인 표현을 쓴다. 또한 ‘일본의 건축 장인은 대단한가?’같이 개인의 노력을 별거 아니라는 듯이 깎아내리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1]

위에 있는 ‘일본인에게만 있는 정신병’같은 경우는 파리 증후군을 소재로 삼았다. 이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파리에 대한 환상과 현살간의 괴리로 인한 스트레스 질환인데, 말하자면 자신이 프랑스나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갖고 갔는데 실제로 가보자 현실의 여러 문제점으로 실망하거나 충격을 받는 걸 뜻한다. 하지만 여러 이유가 겹쳐저 유독 일본인들에게 많이 일어났던 증후군이여서 그렇지 외국에 가서 그에 대한 동경과 큰 환상을 가지고 있다가 현실과 마주치면 누구든지 파리 증후군과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썸네일에선 마치 일본인에게 일어나는 식으로 과장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통일 관련 주제를 다룬 영상에서 아예 제목과 썸네일에서 세계 3대 경제대국이나 G3를 넣으면서 국뽕 유튜버가 연상되는 과장된 썸네일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제는 아예 국뽕 유튜버로 분류해도 될 정도. 게다가 본인 유튜브 채널 소개에서마저 사이버 김구라고 자칭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섬숭이 조련사, 열도잔나비 타골장인 등과 같은 노골적인 일본인 비하 표현을 사용하는 등 이미 '일본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다'는 주제의식은 거의 상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5. 약자에 대한 무시[편집]


구독자가 20만이 넘어가고 라이브 방송으로 전환하면서 일본 사회의 현실에 관해 여러 가지 입장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러 입장 중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약자에 대한 무시이다.

예를 들면 "토익 점수도 안 나오는 머리도 안 좋은 애들이 취직해서 나라 망한다.", "일본은 명문대만 나오면 다른 스펙 안 따도 취직이 되다 보니까 경쟁력이 후달린다." 등의 발언을 하며, 마치 토익이나 기타 스펙을 쌓지 않은 사람이 취직이라도 하면 기업의 경쟁력과 나라가 망하는 것처럼 말한다. 정확히 노력하지 않는자가 그냥 기업에 들어가서 경쟁력이 낮아지고 있다고 말한다.

사실 어느 나라 기업이나 마찬가지지만, 각 기업이 보는 '스펙'이란 것은 그 기준이 천차만별이며, 스펙에서 표식되는 자격증, 해외 연수보다는 학점, 면접에서 보여준 가능성 등을 보는 기업도 존재한다. 그러나 롯본기 김교수는 이러한 것을 다 무시하고 토익, 어학 연수와 같이 한국 내에서 오르내리는 요소를 중점으로 사람의 경쟁력을 자의적으로 판단하며, 동시에 약자에 대한 무시를 일삼는다.

이것 외에도 자신감이 별로 없는 성격에 대한 무시, 친구가 별로 없는 사람에 대한 무시, 저학력자 무시 등을 기본 전제로 깔고 들어간다.

6. 유튜버로서의 자질[편집]


파일:김교수 반론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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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교수 반론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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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교수 반론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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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71A1A64D-D9CC-4959-AE75-B183BCBD73F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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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소들을 각각 복사한뒤 주소창에 붙어넣기 하면 볼수있다.

위 사진에서 영상에 대해 반박하는 댓글에 대하여 ‘내가 너보다 공부 많이했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얕은 지식으로 아는 척 하냐’같은 선민의식적인 말을 포함해서 너 일본놈이지같은 논리도 근거도 없이 몰아가거나 병신이라는 욕설을 쓰거나 아예 상대방의 닉네임을 트집잡아서 니 지능 수준 이라는 인신공격까지 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인 특성이라고 생각한다는 글에 분노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자신도 자신이 격은 사례를 들고 와서 일본인의 국민성을 평가 및 비하하는 모습을 보여서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어지간히 적의를 불태우지 않는 이상 상대방이 무슨 단어를 사용했던간에 이 영상의 내용에 대해서 명백히 반론하고 있는 댓글에 반박할 거면 자신의 의견을 바탕으로 침착하게 의견을 밝히거나 논파해야지 트집이나 잡으며 욕하는 건 옳지 않다.

신고가 누적되어 노란딱지가 쌓이자 댓글로 '친일 세력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면서 '자신은 순수한 의도에서 더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업로드하는 것이다'라는 글을 올린다. 하지만 애초에 유튜브를 하게 된 이유이자 영상을 업로드하는 주 목적인 '일본의 민낯을 알린다', '일본에 환상을 가진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해준다'라는 순수한 목적이라면 노란딱지는 그저 수익 창출 제한이 되지 그 외엔 어떠한 업로드 활동 제한도 없으므로 자신의 목적과는 상관이 없고 방해받지도 않으니 신경 끄면 그만이다. 그런데 막상 노란딱지가 봍으니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는 장문의 글을 쓰거나 위에 있는 친일 세력 방해글같이 감정에 호소하는 글을 올리는 등 자신의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유튜브로 버는 수익은 겨우 수십 만 뿐이며 그로 인해 그가 원래하던 사업이 전부 망해서 먹고살기도 힘들어지는데 노란딱지까지 붙었다는 것도 의심하는 의견이 있다. 그의 구독자 수나 시청자 수만 봐도 기본적으로 수십 만은 나올텐데 김교수의 영상들은 기본적으로 10분은 넘기 때문에 영상시간도 긴 편이다. 거기에 그가 말하는 '망한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자세하게 나온 것도 아니라[2] 직접 자세히 밝히기 전까진 사실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

7. 저서의 신뢰성[편집]



그가 쓴 저서는 반일감정을 담은게 아니며 증거로 야후재팬과 주간문춘에도 책이 올라왔다고 주장하는 글이 있지만 둘 다 신용하기 힘든 사이트다. 야후재팬은 일빠, 혐한, 혐중 뉴스도 나오며 그 또한 유명신문사는 거의 없고 찌라시나 소형 신문사의 정보들만 겨우 올라오는 수준이며 주간문춘은 아예 일본 내에서도 여러모로 유명한 황색언론이다. 여기서 단지 언급됐다는 이유만으로 저 둘을 들먹이기엔 저 둘의 신용도나 회사의 품격 면에서 문제가 많다.

세계 최초의 SNS가 싸이월드라 주장했으나 진짜 세계 최초 SNS는 클래스메이트였고 그 2년 뒤에도 외국에서 또다른 SNS가 만들어졌었다. 즉 싸이월드는 아무리 높게 잡아도 세계 최초의 SNS로만 보면 높아도 3위다. 또한, 세계 최초의 태블릿 PC를 LG가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그것도 정식으로 출시한 것도 아니지만) 실제로는 99년도에 미국에서 나온 QBE가 먼저다.



8. 조선 문화재 비난[편집]


파일:롯본기 김교수 개소리 2.jpg
file:///C:/Users/User/AppData/Local/Temp/BNZ.6426f3af30a2713b/train12-1-1/2/img/img_5.jpg
(이 주소를 복사한뒤 주소창에 붙어넣기 하면 이미지를 볼수 있다.)
조선문화재고려의 문화재와 신라, 백제의 문화재보다 수준이 떨어지고 디테일이 부족하다고 조선백자와 조선의 문화재를 까는데, 조선백자는 사치를 싫어하는 유교의 정신 때문에 화려함보다는 단순함을 추구했고 만드는 방법 또한 고려 청자보다 힘들다. 김교수의 논리라면 앙부일구, 측우기, 자격루, 혼천의 등등 무엇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문화재인 한글 또한 조선시대의 문화재인데 이 모든 것들이 이전 시대의 문화재보다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조선과 고려는 다른 나라이며 무엇보다 시대가 다르고 가치관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의 차이로 어떤 것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뽕들이 식민지 시혜론을 주장할 때 들먹이는 논리가 이와 유사하다.[3]

9.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 부정 및 부정선거론 전파[편집]


그 외에도, 지속적으로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었는데, 11월 4일 이후 트럼프의 낙선이 확정된 이후 우편투표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등, 일부 극우 유투버와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경합주 투표 개표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유포하는 등, 음모론에 기반한 그릇된 진실을 유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바이든 당선에 따른 미일관계 개선 전망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이 빗어낸 촌극으로 보여진다. 2021년 1월 20일, 아무런 이변 없이 조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지금까지 예측해왔던 주장들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되면서 유튜버로서의 신뢰성 자체를 상당히 잃게될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10. 반유대주의[편집]


파일:롯폰기 김교수- 반유대주의.png
file:///C:/Users/User/AppData/Local/Temp/BNZ.6426f3af30a2713b/train12-1-1/2/img/img_1.png
(이 주소를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어넣기 하면 이미지를 볼수있다.)

그뿐만 아니라,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에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할 당시 노골적으로 반유대주의 컨텐츠까지 방송 했다. 미국 주류언론의 대다수가 유대인 언론이기 때문에 트럼프에게 부정적인 보도를 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네오나치가 주장하는 유대자본 서사를 그대로 사용하여 이 컨텐츠는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 컨텐츠라는 비판이 대거 나왔었다.


11. 지나친 국수주의와 악의적인 일본과 일본인 비하 태도[편집]



통일대박론이라는 영상으로 국수주의자의 정점을 찍었다. 일단 영상 썸네일부터 출산율 취업률 저성장 자원부족 영토문제 등 모든 문제해결 가능. 통일만 되면 세계 3위 경제대국이 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다. 일단 썸네일 영상을 하나하나 반박하자면 북한에서 나오는 광물 혹은 자원들은 북한이 이미 중국에게 이권을 다 팔아버렸고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이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통일을 해도 들어오는 자원은 별로 없을 것이다. 게다가 취업율은 통일이 되면 취업이 활성화될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은 사실이나 한가지 간과하는 것은 북한 출신인 국민들까지의 취업율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과 오랫동안 이념의 차이로 인한 갈등은 무조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통일만능론자들은 통일대박론을 외치며 그렇게 되면 한국이 G7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데 독일 통일 과정만 보면 그 길은 쉽지가 않다. 그리고 북한의 김씨 가문이 외국에 돈을 빌리고 체납한 것이 많아서 이를 메우기에도 바쁘다는 암울한 현실이 있는데 이런 변수들을 전부 무시하고 미국과 나란히 하는 열강이 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만 하고 있다.

일본인의 조상인 죠몬인의 유전저가 안다만 니코바르 제도의 원주민과 가장 유전적으로 흡사하다고 하면서 일본인들을 비하하지만 정작 일본인의 유전자가 니코바르 제도의 원주민한테 왔다는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가 없으면 역시 자신의 그런 주장에 대한 아무런 자료 하나 제시를 하지 않았다.

일본내 유명인물들인 창가학회의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나 아사다 마오, 기요하라 가즈히로, 마츠이 히데키, 등 거의 대부분의 일본내 유명인물들이 재일출신 이라고 주장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 역시 그저 인터넷에 그런 루머들은 있지만 본인들이나 본인의 친척들이 직접 밝히거나 그밖에 재일설이 맞다는 확실한 자료나 증거는 전혀 없다. 애초에 일본내에서 일본 우익들은 자신들에게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있거나 아니면 한국에 조금만 우호적이거나 이런 식으로 한국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한국의 빨갱이/친일 프레임 같이 그런 식으로 특정 집단이나 인물들을 재일이라고 몰아가면서 마녀사냥을 해되거나 일본내 재일들도 조금만 뛰어나거나 유명한 인물들이면 재일이라고 정확한 근거 없이 그런 식으로 우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히 그런 인물들이 한국에서 활동한 적이 있거나 아니면 우호적이라 거나 이런 식으로 한국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더 그런 편이고.)사실 일본내에서 유명해지면 왠만하면 저절로 따라붙는게 재일루머다.

현대차가 국내에서 주로 욕을 먹는 이유가 조선일보와 같은 친일 신물들이 국산차를 깎아내리고 일본차를 뛰어주기 위해서 일부로 현대차를 모함해서 발생한 언론 선동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보배드림 같은 자동차 사이트에서도 현대차에 국내 AS차별같은 소비자를 호구로 취급하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글들만 해도 무수한데다가 그리고 그동안 계속 미국에 비해서 자동차 기능 차이뿐만 아니라 결함시 리콜 대응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 데다가 (출처: https://autopostkorea.com/?p=25168 ) 실제로 세타 2 엔진때도 미국과 달리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아예 리콜을 하지도 않다가 국토교통부가 제작결함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에야 뒤늦게 문제가 커질려고 하자 리콜을 하는 등 그동안 소비자들을 계속 기만하는 행동들을 하였기 때문에 롯본기의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고 국산차라고 지나치게 감싸주는 국수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현대차보다 오히려 도요타같은 일본차들이 자신들 국가인 일본에는 굉장히 품질이 안좋게 팔면서 미국에는 재료부터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서 판다는 식으로 오히려 일본차들이 자국에 대한 내수차별이 더 심하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것에 대한 아무런 자료 하나 제시 못하는 등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일본은 그저 미국한테 전적으로 기대서 미국에게 이용만 당하는데 반해서 지금 현재 문재인 정권은 미국과 중국사이 균형적인 외교를 하면서 이익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지금 현재 일본의 최대 자동차 수줄국가 중 하나가 미국인데다가 특히 지금도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과연 누가 상호간의 무역으로 흑자를 훨씬 더 많이 보고 있는지를 보면 미국한테 이용만 당한다는 아무런 롯본기의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는 데다가 (특히 오바마때는 한국보다 일본에 훨씬 더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그걸로 일본이 이득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국내에서 오바마의 별명이 왜바마였을 정도니.) 일본은 아베 정권 이후에도 계속 중국하고도 여러 협력 산업들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데다가 (출처: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923354.html ) ,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71231014400073 ) 중국과의 무역관계 에서도 일본의 가장 핵심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매출규모가 계속 늘어나는 등 (출처 : http://global-autonews.com/bbs/board.php?bo_table=bd_028&wr_id=145 )그저 미국에게만 기댄다는 롯본기의 주장역시 전혀 근거가 없다.그리고 문재인 정권의 외교부분에서도 지나치게 북한이나 중국의 눈치를 보는 것 때문에 국내 뿐 아니라 미국내에서도 비판을 할 정도로 과연 문재인 정권이 롯본기의 주장처럼 그렇게 균형적인 외교를 하는지는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자세한건 문재인 정부/평가/외교를 참조. )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내에서 한국의 고려대, 연세대만큼의 위치를 가진 대학교가 게이오, 와세다 대학교이며 게이오, 와세다가 더이상 전세계적인 명문대학교가 아니며 게이오나 와세대의 전세계 대학순위는 한국의 중앙대학교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롯본기가 자기 유튜버에서 저런
영상을 올린 2021년도 기준으로 실제로 일본내에서 한국의 고려대, 연세대만큼의 위치를 가진 대학교는 게이오, 와세다 대학교가 아닌 도쿄공업대학, 오사카대학이며 도쿄공업대학교는 전세계 대학순위 56위, 오사카 대학교는 72위이며 한국의 고려대학교는 69위, 연세대학교는 85위다. 그리고 일본의 게이오, 와세대 대학교 역시 서로 대략 200위권 안으로 대략 400위권 정도의 중앙대학교보다 훨씬더 순위가 높다. (출처: https://www.topuniversities.com/university-rankings/world-university-rankings/2021 ) 대학순위는 QS 세계대학 랭킹 사이트에서 확일할수 있다.

일본이 미국한테 경제적으로 많이 의존한다는 이유로 일본이 미국의 경제 식민지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한국역시 중국의 매출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중국한테 경제적으로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한국은 중국의 경제 식민지가 된다. 사실 수출국가에서 자신들의 수출중 가장 크게 비중을 차지하느 국가의 어느정도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건 어쩔 수 없는 면으로 그건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도 마찬가지고(문재인 정권의 대중외교만 보아도 알수 있듯이)사실 일본도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중국하고도 협력을 하는등 마냥 미국에게만 그저 의존하는 행동을 보이지만은 않는다 .
(출처: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923354.html ) , (출처: https://www.yna.co.kr/view/AKR20171231014400073 )

그리고 일본이 150년동안 크게 발전한것도 사실 그전까지는 일본이 조선보다도 뒤쳐졌는데 단순히 운때문에 그런것이라고 그저 운에 불과하다고 주장을 하지만 애초에 일본은 그때당시 청나라도 영국같은 서구세력에 털렸던 것을 보고 더 이상 서구세력에 청나라처럼 버티어 보았자 더크게 털리고 개항을 당할 것이란 걸 알고 빨리 개국을 해서 서양의 뛰어난 문화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노력하고(서양에 아시아 중에서 제일 먼저 사절단까지 보내고 단순히 무기뿐만 아니라 서양의 입헌군주제 같은 정치체제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도입을 하고 그리고 일본이 개항을 해도 안정적으로 발전할수 있었던 건 당시 일본은 그전부터 조선과 달리 이미 여러 에도시대 부터 작게나마 서양과 교류를 하면서 정보의 문을 열어놓고 그리고 농업몰빵이 아닌 상당부분 공업에도 이전부터 신경을 섰고 경제나 산업 면에서 이미 조선을 이미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
무조건 빨리 개항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근대화가 성공하는 것도 절대 아닌게 당시 동아시아 3국중에서 가장 먼저 개항했다가 유럽국가들에게 동네북 신세가 된 청나라를 생각해보자. 청나라가 아니더라도 동남아 부터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 역시 일본보다 먼저 개항을 하다가 식민지가 된적이 있다. ) 애초에 일본이 메이지 유신전까지 조선보다 뒤쳐졌다는 주장도 틀린 주장으로 이미 사실 에도시대 초기부터 일본은 간토평야가 개발이 되고 상업이 크게 활성화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미 조선보다 월등히 경제력이 앞서 있었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막대한 자본력으로 조선과 달리 근대화를 할수 있었던 것이며(청나라는 일본 못지않게 자본력이 좋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한건 중국이란 시장자체가 너무나도 큰 시장이라 그런 중국을 노리는 서구열강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중국과 달리 일본처럼 별로 눈독을 들이는 서구열강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이랑 상황자체는 똑같았다. 즉 조선이 일본과 달리 근대화에 실패한게 결코 운때문이 아니라는 것.)

또 자신들끼리도 외세가 노리고 있는 이때에 서로간의 계속 싸워보았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걸 알고 보신전쟁 같은 내전들을 최대로 서로가 협의 하에 빨리 끝내는 현명한 판단을 해서 그런 성공이 가능했던 것이고 또 일본도 마냥 싸우지도 않고 서구세력에 문을 열고 개항을 하는게 아니라 죠슈번이나 사츠마번은 이러한 에도막부의 정책에 크게 반발해서 서양과 개항을 반대해서 영국하고 직접 전쟁까지 했고(사쓰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 실제로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중심세력역시 직접 서양과 전쟁까지 치르고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서양문물의 수입의 중요성을 느낀 죠슈번과 사츠마번이다.

그리고 2차 대전이후 경제발전 같은 경우도 한국전쟁 같은 어느정도 운빨도 작용해지만 일본이 정책으로 기업에서도 직원들이 기업이 집이라는 인식을 들게끔 여러 기업들이 직원들을 위한 인식과 편의성 등을 마련해 주고 일본인들도 돈을 아끼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다시 빠르게 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던 건 당시 한국인들의 노력도 있지만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천문학적인 원조를 받았고 (그때 당시 자원,기술등 다 합치면 무려 150억 달러였는데 150억 달러면 지금도 큰 수준인데 그때당시 150억 달러면 엄청나고) (출처: https://blog.naver.com/a6969235/222252498181 ) 거기다가 일본도 한국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점 때문에 많은 기술들을 투자해 주었고 거기다가 반도체 전자제품 같은 경우도 80년대 당시 미국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플라자 합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엄청나게 일본을 견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그 사이에 한국은 미국의 일본 견제로 일본의 반도체, 전자제품 시장등이 경재력을 잃자 어느정도 어부지리로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서 어느 정도 숨통을 틀수가 있었고 미국과 일본의 견제하는데 신경을 다쓰는 사이에 아무런 견제없이 발전할수 있었는 등 한강의 기적 역시 어느 정도 운이 적용이 되었는데 그런건 다 무시하고 무조건 일본은 단순히 운빨로 근대화, 경제화 발전을 이루었고 반면 한국은 오로직 철처한 실력만으로 경제화,산업화를 이루었다고 말하는건 지극히 국수적인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롯본기는 일본의 대학 교수들도 영어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무식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에 대한 근거는 전혀 없고.(그리고 웃긴건 정작 롯본기는 본인이 그렇게 말하는 그런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대학 교수도 아니고 대학이라 해보았자 정원 300명 이하의 듣보잡 지잡대의 그것도 정식 교수가 아닌 부교수 수준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의 혐한이 일본의 선동 때문이라 본인 주장들에 대한 근거도 없는 주장들을 해되고 거기다가 일본의 가부키보다 한국의 마당놀이가 더 재미있다, 도쿄 올림픽 당시 전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일본 픽토그램이 조잡하다는 등 단순히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밖에도 일본 벚꽃이 한국이 원조라니 일본애니가 발전된 이유가 일본인들이 표현을 못해서 그렇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지만 사실 흔히 일본 벚꽃을 말하는 소메이 요시노는 제주 왕벚꽃과 비교해서 유전자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고 2018년에 국립 수목원의 조사결과로 밝혀졌으며(출처: 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538869 )일본애니가 발전된 이유역시 실제 일본애니가 발전된 이유는 일본이 제국시절 당시 전쟁 홍보를 애니,만화를 통해서 사람들의 접근성을 쉽게 하고 재미로 관심로 끌어서 전쟁 프로파간다로 써먹기 위해서 발전된 것이다.(확실히 그냥 사람이 나와서 연설하는 것보다 만화 캐릭터가 나오는게 훨씬더 재미도 있고 관심도 끌수가 있으니.)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이 과거 건축이나 공예품등이 과거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서 떨어진다는 이유로 한국은 대단하고 일본은 열등하다고 비하하지만 사실 일본이 이런 기술력이 부족한 것도 일본은 섬나라인 반면 한국은 바로 중국 바로 옆에 있어서 대륙으로부터 기술력이나 문화를 좀 더 빨리 전파받을수 있는 지리적인 장점도 있었고(당장 같은 반도인 로마나 그리스랑 비교해보면 이미 로마나 그리스는 한국보다 더 오래전에 뛰어난 건축이나, 공예품들이 제도 등 문화가 발전하였다. ) 반면 일본은 지리적으로 폐쇄적인 섬이기 때문에 주변국가들과 문화 교류나 기술력 전파가 상대적으로 느릴수 밖에 없었는데도 이런 식의 환경적인 요소는 전부다 배제하고 단순히 일차원적으로 저런 식의 비교를 해서 저런 주장을 하는건 문제가 있는 데다가 그리고 일본 역시 삼국시대 당시에는 한국의 왕조들로부터의 문화에만 전적으로 의존을 하였지만 한국의 남북조 시대부터는 신라보다 문화가 더 우수했던 당나라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고 그것도 헤이안 시대부터는 일본 고유의 국풍 문화가 시작되어 일본 고유의 문화들이 많이 발전을 하였다.

롯본기는 일본인들을 정리정돈을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는 정리정돈에 관한 책이 많다고 주장하지만 애초에 일본내에서 정리정돈에 관한 책이 많다는건 다르게 보면 그만큼 일본인들이 정리정돈을 굉장히 중요시해서 단순한 정리정돈이 아닌 좀더 확실하게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정리정돈에 크게 신경을 쓴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될수있다.

롯본기는 자기 개인적인 주관적인 생각으로 일본이 자국내에서 서양인이 아닌 외국인 노동자 차별은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더 많다고 하지만 그것에 대한 아무런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본인이 직접 일본에 가보아서 그런 식의 체험을 해보았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롯본기 이 인간은 평소 아주 악의적으로 일본을 비하하는 말들을 많이 했다는걸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또한 롯본기는 이치로를 예로 들면서 이치로 같은 경우도 해외에서 팀내에서 선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정도로 일본인들을 해외에 가서 외국인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치로가 해외에서 같은 팀의 선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편파적인 소리로 실제로 켄 그리파 주니어나 라울 이바녜즈는 이치로를 감싸고 두둔했으며 이치로나 다른 동료들과 잘 지내는 사진들도 많고 그리고 일본인들 역시 해외에 가서 외국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다는 말 역시 별다른 근거가 없다.(물론 그것과 별개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 비해서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긴 하지만 그건 일본뿐만이 아니라 유럽 역시도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는 등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공동체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해서 외국인들과 잘 어울린다는 법은 없다.)

롯본기는 일본의 2021년 일본의 여고생이 집단 이지메를 받고 자살한 사건에서 그 학교의 교감이 죽은 피해자보다 남아있는 가해자의 미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사건과 역사상 일본인들을 가장 많이 죽인 인물인 이순신을 존경하고 거기다가 역사상 가장 일본인들을 많이 죽인 국가인 미국을 일본인들이 우호적으로 본다는 이유로 일본인들과 일본을 좋게 대우해주면 안대고 오히려 더 가혹하게 대우를 해야 일본이 순응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단 2021년 일본의 여고생이 집단 이지메를 받고 자살한 사건에 관해서 그 사건의 교감이 그런 식의 망언을 한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일부의 그런 사건을 가지고 마치 전체가 다 그렇다듯이 일반화시키는건 잘못인데다가 사실 그런식의 사건 주변 인물들이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고 심지어 가해자를 더 옹호하는 사건 같은 경우는 국내만 해도 여러번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2004년에 일어난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는 사건을 조사하던 경찰,검찰측에서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식의 망언을 하기도 했고 2011년에 일어났던 2011년 대구 중학생 집단괴롭힘 자살사건에서는 여러 그 학교의 교직원들이나 민주당 소속인 안민석 의원인 피해자를 비난하고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는 식의 망언들을 하기도 하고 언론에서도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친구로 표현하는 식의 행위들을 하였고 2014년에 일어난 제28보병사단 의무병 살인사건에서도 군대 내부에서 직접 사건 은폐를 조직적으로 가했을 뿐만 아니라 국군양주병원장이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측이 옹호하는 망언을 일삼기도 하였다.그리고 이순신과 관련해서도 일단 일본인들을 가장 많이 죽인 인물은 충무공 이순신이 아닌 일본의 대공습으로 수십만명의 민간인들을 죽인 커티스 르메이인데다가 과거 일본 해군에서도 이순신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그건 엄엿한 이순신의 높은 충정심과 전략 때문에 비록 적장이지만 대단한 인물이였으니 배울건 배우자라는 취지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정말 일본인들이 이순신을 자기들 위인처럼 존경했다면 도쿄시내부터 시작해서 일본내 곳곳에서 이순신 동상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동상은 없는데다가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 대한체육회가 이순신 장군 현수막을 걸자 일본인들의 반발로 그 현수막이 철거되기 까지 하였다. 그리고 일본과 일본인들이 미국에 우호적인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건 같이 시장 경제 민주주의를 따를뿐만이 아니라 같이 사회주의 사상을 반대하고 북한,중국을 견제하는 국가인데다가 거기다가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무역으로 막대한 흑자를 얻고 있는 등 상당히 미국과 같은 외교,안보, 경제적으로 많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경제적으로도 상당한 이득을 얻고 있는 데다가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도 미국이 일본내 폭격으로 많은 희생자를 발생시키긴 했지만 태평양 전쟁이 애초에 미국이 일으킨게 아니고 일본이 일방적으로 일으킨 전쟁인데다가 또 원폭투하 같은 경우는 애초에 일본이 미국의 포츠담 회담도 무시하고 무리한 전쟁을 끝까지 고집해서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던 어쩔수 없었던 이유도 있어서(그래도 미국같은 경우는 대공습을 해도 미리 경고 삐라를 일본내 뿌리거나 원폭 투하 같은 경우도 인구가 많은 대도시가 아닌 비교적 인구가 적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같은 인구수가 비교적 작은 도시에 투하하는 등 최대한 인명피해를 막을려고 했고.)

비교적 과거사 문제가 없기 때문에 일본과 일본인들이 나름 미국을 우호적으로 보는 것이다.(만약 진짜로 롯본기의 주장대로 자신들의 도시에 대공습과 원폭 투하를 하는 이유로 미국을 우호적으로 본다면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 대한 추모나 추모비도 없어야 하지만 일본내에서 지금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추모하고 여전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추모비가 크게 있는 데다가 2016년도에는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가 일본을 방문했을때 일본의 수상인 아베 신조가 미국 대통령 오바마와 함께 직접 오바마와 함께 히로시마에 가서 원폭 희생자들을 추모하기까지 했다.)

단순한 본인의 주관을 가지고 일본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못생겼다고 일본인들 전체를 외모비하를 하고(그렇게 말하는 정작 롯본기 본인의 외모를 보면) 일본인들을 열등한 민족,미개한 민족이라는 등 인종차별, 헤이트 스피치적인 발언등을 일삼고 있다.

2015년 당시 IS의 일본인 처형 사건을 예로 들면서 IS의 일본인 처형 영상에서도 인질로 붙잡힌 피해자 일본인은 자신이 죽게 되는 상황에서도 그저 자신의 죽음으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말할 정도로 일본인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IS에게 일본인 처형 영상이 공개되었을 때도 처형 당하는 일본인은 아베를 비판했을뿐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 그런 말 한적이 없다.

롯본기는 당시 일본이 노인 빈곤율 때문에 노인들의 범죄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본의 노인 빈곤율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순위권 안에도 없을 정도로 하위권이고 오히려 반대로 한국의 노인빈곤율이 oecd 국가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다. (출처: https://www.sedaily.com/NewsVIew/1Z8160P09H )

또한 롯본기는 일본은 임진왜란때 유럽전체가 보유한 조총보다 많은 조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쟁에 패배했고 이후 당시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무리하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을 가지고 일본인들은 큰숲을 보는 전략이 없고 반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을 상대로 패배한적이 단 3번밖에 없으니 일본인은 전략성이 떨어지고 한국인은 전략성이 높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한국이 역사적으로 애초에 지금 현재 중국 한족과 전쟁을 한적이 별로 없으며 그런 중국 한족이나 다른 농경민족을 상대로도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고조선이 전쟁에 패해 영토를 크게 빼았기기도 하고 이후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고조선을 멸망당하기도 하고 또 위나라때 위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구려가 수도를 털리기도 했으며 이후 선비족과 한족혼혈 국가인 당나라에게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당하기도 하는등 털린적도 많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연합해서 멸망시킨 것이긴 하지만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기 전에 백제한테도 본진에서 밀릴정도로 백제 하나도 혼자서 상대하지 못하고 역부족이였는 상태로 당나라의 역할이 가장크다. 그리고 고구려와의 전선은 애초에 고구려는 안시성, 요동성, 비사성같은 주요 핵심성들은 거의다 요동반도에 몰려있었을 정도로 고구려의 핵심 방어선은 요동방어선이였는데
요동방어선에서 전투들은 전부다 당나라가 혼자서 도맡아했다. 고구려 멸망이후 그런 당나라를 신라가 몰아낼수 있었던 이유도 고구려 멸망이후 당나라는 급성장한 토번하고 자신들 본지에서 총력전하기 바빴기 때문에 제대로 신라에게 신경을 쓸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방 유목민족과의 전쟁들에서는 전쟁에 패배한적은 정묘호란, 병자호란 , 거기다가 조선시대보다 이전인 삼국시대때는 고국원왕때 고구려가 전연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공을 바치고 그리고 부여가 불과 보름만에 거란에게 패배한거나 고려때 윤관의 여진정벌때 무려 17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끝내 힘들게 점령한 동북9성을 다시 여진에게 돌려주어서 결과적으로 전쟁에 패배한점, 그리고 몽골과의 전쟁에서 결국 고려가 항복하고 몽골의 지배를 받았는 등( 사실 당시 몽골의 주요 대상은 고려가 아닌 송나라였고 그래서 송나라는 50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쳐들어간 반면 고려는 3만정도의 병력을 보낸게 다였으며 몽골의 9차레의 침입도 사실상 2차 침입을 제외하면 몽골이 고려 전국토를 실컷 유린한고 약탈을 실컷한다음 철군했고 그러한 상황인데도 당시 고려의 무신정권은 그러한 몽골의 침입을 제대로 대처하지도 않고 자신들끼리 강화도로 피신가서 전쟁을 방치했기 때문에 고려가 제대로 막았다고 볼수도 없다.)

사실 어차피 몽골은 당시 고려를 멸망시킬 생각없었고 몽골의 주목적은 강화도로 피신간 고려정부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의 최대한 피해를 주어서 고려정부가 그 피해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항복하게 만드는게 목적이였기 때문에 몽골의 고려를 침입할때 몽골군의 목적도 고려땅을 점령하는 것보다는 고려의 영토를 철처하게 약탈하는게 주목적이였다. 그로인해 고려는 몽골이 침입할때마다 당시 무신정권은 강화도로 피신해서 전쟁을 사실상 방치해 놓았기 때문에 몽골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못해 고려영토는 철처하게 몽골군에 짓밟히고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미 3번을 넘을 정도로 전쟁에서 패배한적이 상당하며(거기다가 당시 북방 유목민족들의 주요대상은 중국이였기 때문에 중국에 비해 먹을 가치가 별로 없는 한국같은 경우는 주요 침략대상도 아니였다.) 또한 일본이 보유한 조총이 유럽 전체보다 많다는 말 역시 전혀 근거가 없는 사실이고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총 비율은 일본군 전체 비율의 대략 15%정도였고 나머지가 창과 칼로 무장을 해서 실제 일본군의 무장 비율 거의 대부분은 창칼인 근거리 무기였다. 그리고 당시 조총은 실제로는 그때당시 시대적인 한계로 기계기술이 허접해서 조금만 습도가 높아도 쉽게 고장나기도 일수고 장전시간도 오래 걸리고 바람 불거나 비오면 쓰지 못하고, 장전할때 화약가루로 인해서 여러명이서 쏘고나면 연기 때문에 시야도 안보이고 사거리도 활이나 대포에 비하면 짧고 거기다가 활처럼 곡사가 안되서 무조건 직선공격이라 안그래도 산지가 많은 조선에서는 제약도 많았는 등 단점이 많았고 (그런데도 일부나마 조총을 당시 사용했던건 당시 활에 비해 조총이 워낙 배우기가 쉬웠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병력보충을 할수가 있다는 점이다.실제로 당시 조선군은 최대한 빨리 대량의 정규군을 육성하기 위해서 조선전체 병종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조총병력으로 육성을 하고 그런 조총을 보조하는 창병같은 근접병력은 제대로 육성을 하지 않는 바람에 정묘호란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에게 제대로 털렸다.)


오히력 화력면에서는 조총이 사거리가 100m고 조선의 총통은 1km가 넘어서 조선의 각종 천자총통,승자총통같은 총통들이나 그밖에 신기전,비격진천뢰 등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 훨씬 더 우세했던게 사실이며 특히 임진왜란당시 양국의 군함들 역시 일본의 주력군함인 세키부네나, 고바야보다 조선의 주력군함인 판옥선이 크기도 배의 높이도 더 높아서 일본군은 조선군을 사격하기 힘든반면 조선군이 일본군을 사격하기 훨씬더 쉬웠으며 배의 크기도 훨씬더커서 대량의 함포들을 대량으로 장착시키기 더 유리하고(특히 해전은 상대를 배를 빠르게 침몰시키는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철처히 함포싸움이다.실제로 중세시대 이후 세계사적으로 유명한 해전들도 거의다 함포싸움으로 승패가 결정났다. 그리고 사실 일본은 전국시대 전투들 거의 대부분이 지상전 위주의 싸움이였기 때문에 해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서 해군력과 해군무기는 빈약했다.)내구성도 더 튼튼해서 사실 무기는 조선이 훨씬더 좋았다. 그런데도 당시 일본군이 전쟁난지 불과 20일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할 정도로 전쟁초반에 일반적으로 압승을 거두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병사들의 근거리 전투 숙력도가 당시 전문적인 훈련을 배우 일본군이 워낙 압도적이였기 때문이며 당시 이러한 병사들의 근접번 전투력 차이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일본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조선의 기록들에서도 당시 일본의 검술에 대한 조선이 호평한 기록들이 많고 (출처: https://namu.wiki/w/%EC%9D%BC%EB%B3%B8%EB%8F%84 자세한건 이 항목참조. 이 항목에 일본도와 검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거기 나온 역사학자들이 당시 전투 숙련도면에서 일본군이 더 월등하다고 묘사했고 임진왜란 이후 30년 넘게지난 이괄의 난에도 임진왜란때 항복했던 항왜들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때 시점 기준으로 50살 전후의 당시로서는 노인들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의 최정예병력이였던 북방수비군이였던 이괄의군대 내에서도 근접전 전문부대로 관군과 싸우면서 선봉에서 활약했고 조선관군도 이런 이괄의 항왜들에게 큰 피해를 입자 다른 항왜들을 고용해서 이괄의 난을 진압할 정도였다.

그리고 사실 임진왜란은 명나라에서도 대량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는등 조선혼자서 싸워서 이긴 전쟁이 아니다.

특히 당시 명나라는 단순히 군사지원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규모의 식량지원과 물자지원까지 해주었고 명나라가 이긴 전투보다 패배했던 전투들이 더 많다고 하지만 울산성전투같이 명나라가 패배했던 전투들은 전투에 이긴 일본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어 일본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으며 결정적으로 명나라군이 대규모 조선땅에 주둔하면서 일본입장에서도 싸워야 할적이 하나 더 늘어났기 때문에 쉽사리 공격을 하지 못했고 그사이에 조선군은 병력을 재정비할수 있었다. 명나라가 전쟁초기 임진왜란때 조선내에서 약탈을 하긴했지만 명나라가 조선에서 약탈한것보다 조선에 대규모 물자보내주어서 지원해준게 훨씬더 많았고 사실 명나라가 조선땅에서 약탈을 했던 이유도 조선은 제대로된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않아 여전히 식량교환 위주였기 때문에 명나라군이 조선에서 물자교환을 위해 가지고온 은자가 조선땅에서 돈으로 쓸수없었고 또 조선이 명나라에게 제발좀 도와달라고 애걸복걸 해서 명나라에서 군대를 보냈는데 당시 조선이 자신들이 부탁해서 온 지원군한테도 제대로된 식량도 보급해줄수 없을 정도로 막장이였기 때문에 명나라군사들 입장에서는 굶어죽지 않을려면 어쩔수 없이 조선에서 약탈을 할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유재란때는 명나라에서 서해바다를 통해서 조선에 100만석이 넘는 막대한 식량과 전쟁물자를 조선에 지원해 주었다. 만약 명나라에서 그때당시 대규모 식량지원을 해주지 않았다면 조선은 정유재란때 경신대기근급의 대기근이 터졌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무리하게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때는 1940년대로 일본은 1930년대 이후부터 대공황의 여파로 완전히 군부가 완전히 폭주해서 군부폭주화로 완전히 이성을 잃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군부폭주화전의 일본과 군부폭주화 이후의 일본은 상황이 달랐는데 그러한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다.

실제로 군부가 폭주하기전에 일본이 10년뒤까지 큰숲을 보는 전략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이겼던 대표적인 전쟁이 청일전쟁이랑 러일전쟁으로 역시 청일전쟁은 당시 일본이 청나라가 자신들보다 군사력이 허약해질때까지 기다리면서 그 사이에 외교를 통해서 미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든뒤(그래서 실제로 미국이 청일전쟁당시 표면상 중립이였지만 뒤에서는 일본을 지원했다.) 한국의 동학농민운동당시 고종이 자국내에서 일어난 농민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군을 끌어들이자 그 기회를 놓지치 않고(텐진조약으로 청나라군이 조선에 파병을 가면 일본군도 자동으로 조선에 파병을 보낼수 있었다.)조선에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점령해서 확실히 조선을 자신들 손아귀에 넣은 다음에 청나라를 기습하는 전략으로 압승을 거둔 전쟁이며 러일전쟁역시 청일전쟁이후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여든인 삼국간섭으로 청일전쟁으로 얻은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는 그 순간에도 곧바로 러시아에 전쟁을 거는게 아닌 러시아가 자신들보다 국력이 훨씬더 강하니 지금은 러시아를 이길수 없다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10년동안 힘을 기르고 러시아를 혼자서 이기기 힘드니 당시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다는 국제정세까지 정확하게 파악을 해서 외교를 통해서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까지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통해서 승리한 전쟁으로 롯본기는 이러한 일본이 철처한 전략을 이용해서 승리를 거둔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같은 전쟁들은 다 무시하고 역사적으로 사실에도 맞지않는 무지한 소리를 해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이 손자병법을 즐겨 읽는것 역시 일본인들이 다른 주변 민족들에 비해 전략이 떨어져서가 아닌 일본은 역사적으로 자신들끼리 치고박고 싸운 내전이 많았고 700년동안 무사들이 정권을 장악해온 국가기 때문에 그로인해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남을 이기고 스스로 살아남는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에서 병법을 읽히고 응용하는건 필수였고 그러한 오랜 역사적 경험들로 생긴 문화로 인해 그런 것이다.
반면 한국이나 중국같은 경우는 일단 한국은 고려시대 이후부터 1000년넘게 더이상 일본의 전국시대나 또는 삼국시대처럼 100년 이상에서 수백년동안 자신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내전의 시대가 발생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조선시대 부터는 전쟁이 아닌 덕으로 국가를 통치하는 유교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서 일본처럼 그런식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지 않았고 중국역시 오랫동안 내전이 있었긴 했지만 송나라 시대부터는 유교 성리학의 영향을 수백년동안 강하게 받았기 때문에 일본처럼 그런식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이 에도막부때 미국이 협박하자 싸우지도 않고 문을열고 항복한 것을 가지고 일본인들은 용기가 없고 겁이 많다고 비난하지만
이러한 말은 단순히 역사의 한 단면만 보는 무식한 발언으로 실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때 원나라에서 2차레나 통상요구를 하자 원나라의 사신들의
감금하거나 목을 베면서 당시 세계 초강대국 원나라를 상대로 먼저 선전포고를 하며 직접 전쟁까지 한적도 있었고(쓰시마섬이나 이키섬은 1차때나 2차때역시 전멸할때까지 끝까지 싸웠으며 특히 2차 침략때는 태풍이 오기 전에도 이미 원나라군이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기껏 점령한 이키섬에서 퇴각을 하는 패배를 당하기도 하는등 상당히 고전했다.) 또한 에도시대때 역시 에도막부는 무기력하게 싸우지 않고 문을 열었지만 이러한 에도막부의 정책에 수많은 번들이 크게 불만을 품고 이러한 에도막부를 무너뜨렸으며 실제로 메이지 유신의 중심세력이였던 사츠마번이나 죠수번은 직접
서양의 개항협박에 거부하며 당시 전세계 초강대국 영국을 상대로 직접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특히 사츠마번이나 죠수번은 당시 세계초강대국 영국에 비해 그저 일개번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사츠에이 전쟁이나 시모노세키전쟁때 사츠마번, 죠슈번의 사상자과 영국번의 사상자와 비슷하게 나오는 거의 대등하게 전투를 치루었다.)


12. 역사왜곡[편집]



사실 한자는 한민족인 동이족이 만든 민족이고 그리고 중국의 황하 문명이 아닌 고조선 문명이 훙산문명이 사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라고 유사역사학을 주장하지만 애초에 동이족이란 말 자체도 동쪽 살고 있는 민족이란 말로 특정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동이족의 이자 역시 활을 뜻하는 이자가 아닌 사람을 뜻하는 이자였다. (출처: https://books.google.co.kr/books?id=67f5qyid1v8C&pg=PA33&lpg=PA33&dq=%E5%A4%B7+%E4%BA%BA+%E5%B0%B8+%E7%94%B2%E9%AA%A8%E6%96%87&source=bl&ots=C5ROhU97Jo&sig=CSFHNu2z1ifTIrLhwsFGkBGm7gI&hl=ko&sa=X&ved=0ahUKEwiJyMqx9IHLAhWi6aYKHU1sCagQ6AEIKzAC#v=onepage&q=%E5%A4%B7%20%E4%BA%BA%20%E5%B0%B8%20%E7%94%B2%E9%AA%A8%E6%96%87&f=false )
그리고 당시 중국은 자기들 기준으로 주변 민족들을 전부다 오랑캐로 취급해서 동쪽에 살고 있는 민족은 동이, 서쪽에 살고 있는 민족은 서융 , 북적에 살고 있는 민족은 북적, 남쪽에 살고 있는 민족은 남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자가 최초로 새겨진게 갑골 문자이긴 하지만 은나라=동이족설인 이하동서설 역시 고고학적 발굴의 진전에 따라 채도문화와 흑도문화가 지역적인 차이가 아닌 시대적인 차이였음이 드러났으며, 푸쓰녠이 상정한 동이족 또한 사실은 등질적이지 않은 여러 종족집단을 묶은 것임이 드러나면서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퇴조하였다.(그리고 은나라 갑골문 당시 한자는 지금의 한자와 형태도 많이 다르고 훗날 동아시아 전체에 널리 퍼진 지금과 같은 형태의 한자는 중국 한나라 시대때 정립되었다.)

그리고 롯본기가 고조선의 영토라고 올린 지도역시 인터넷에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마치 초등학생이 지도에다가 크래파스로 스크레치를 한듯한 지도를 증거랍시고 올린데다가 훙산문화 역시 훙산문화가 한민족의 문화인지는 여전히 의문점이 있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훙산문화는 아직 문명 이전의 단계인 문화로(고고학에서는 인류사에 영향이 크고 발달된 수준의 유물, 유적군 체계와 산물을 문명이라 한다. 한편 그렇지는 못한 단계의 유물, 유적군 체계와 산물은 보통의 경우 문화라 지칭한다.보통 문화와 문명을 가르는 기준은 청동기 시대가 그 기준으로 청동기를 사용하지 못한 청동기 시대 이전의 단계인 신석기시대는 문화라고 한다. 청동기 시대부터 문명사회인 것. 그런데 훙산문화는 청동기를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명백히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문화라 문명도 구분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국수주의적 선동을 한것이다.

당시 일본이 백제의 식민지였다고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 일본은 당시 오히려 백제가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생각을 하고 당시 중국의 남조 왕조들에게 오히려 자신들이 백제를 지배하는 왕이라고 책봉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그런 책봉을 받을 정도로 당시 일본은 독자적인 외교를 하였고( 출처: http://contents.nahf.or.kr/id/NAHF.jo.k_0006_0097_0130_0010 ) 그리고 삼국시대 후기 당시에는 신라의 김춘추가 백제를 치기 위해서 먼저 고구려에 갔지만 거절당하자 일본으로 가서 그 제안을 했을 정도로 당시 주변국 역시 일본을 독자적인 국가로 보고 있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요동까지 지배하고 고려가 강대국이 될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실제로 현실적으로 생각해도 당시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여러 차례의 홍건적의 난등으로 당시 쇠락해져 갔고 왜구의 공격도 수십년동안 전국토가 초토화가 되면서 겨우 힘들게 막아낸 고려말의 국력으로는 당시 이성계가 끌고 갔던 5만도 최대한 군사들을 다 끌어모아서 보낸 것인데다가 당시 국력이 계속 기울어져 가던 고려가( 원나라 말때 원나라의 상황이 개판이었던 점을 이용해서 고려가 잠시동안 요동을 점령하긴 했지만 그것도 경략은 하지 못하고 잠시 점령하고 곧바로 얼마 안되어서 철군을 하였다.)당시 신생강국인 명나라와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당시 고려가 명나라와 전쟁을 해서 이길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수준이다.

롯본기는 한국의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사실 고조선이 진짜 bc 2333년에 세워졌는지는 의문이있고 실제로는 bc 10세기 쯤에 세워졌다는게 가장 신뢰성있는 학계의 정설이다.(실제로 고조선관련 유물이나 기록들도 하나같이 bc10세기 이후에 것들이고 이에 대해서 중국이 고조선 관련유물이나 기록들도 은폐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전혀 말도 안되는 주장인게 유물이란게 언제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데 고조선의 최대 영역도 꽤 넓기 때문에 그 넓은 영토를 일일히 다 개인사유지까지 철처히 다 관리해서 은폐하는게 쉬운게 아닌데다가 애초에 중국은 고조선을 자기들 역사라고 주장하는 판국이니 굳이 힘들여서 그럴 필요가 없다.)
삼국시대 당시 신라의 금속 공예품이나 이런 걸보고 당시 한국 왕조들의 문화수준은 최고 였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런 화려한 금속 공예품은 당대 중국이나 전세계적으로도 이미 그전에 페르시아나 고대 로마 , 더 옛날로 가면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등 여러 문명 국가에서 이미 한반도 보다 더 빨리 구현했다.그리고 당시 한반도 왕조들은 중국에 비해서 도자기 기술이나(그나마 한반도 왕조가 중국과 비교해서 도자기 기술이 비교가 가능해진건 고려시대 때부터다.) 비단 기술등 여러 중요 기술들이 뒤쳐져 있었으며 동아시아 전체에 크게 영향을 끼친 당시로서는 선진 제도였던 수나라, 당나라에서 만든 과거제, 율령제 등을 뒤늦게 중국에서 도입할 정도로(특히 과거제 같은 경우는 고려시대때가 되어서야 한반도에 도입되었다.) 당시 중국에 비해 문화수준이 뒤쳐졌던게 사실이다.

롯본기는 일제가 환단고기 같은 한국의 고대사를 은폐시키기 위해서 한국의 고서 20만권을 불태웠다니 환빠스러운 주장을 하지만 사실 일제가 한국의 고서 20만권을 불태웠다는 근거는 거의 없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진시황이 과거 분서갱유를 철처하게 실행했지만 실패했을 정도로 책이란게 마음먹고 감추면 감추기도 쉬운데다가 거기다가 한국의 고서를 다 불태웠다고 쳐도 다른 나라 기록에도 적혀있으면 사실상 무의미 해지는게 기록이다. (이런 주장에는 중국이 한국에게 유리한 기록들은 일부로 기록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할수 이지만 사실 그건 억지 주장인게 중국 입장에서는 한국 왕조중에서 자신들의 영토로 영토를 넓힌 한국 왕조같은 경우는 그냥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주장하면 그만이고 그리고 중국 기록에는 정작 자신들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살수에서 대패한 기록들까지 전부다 적혀져 있고 심지어 실현 가능성이 별로 없는 백제 요서경략설까지 중국의 남조 왕조들에게 적혀있을 정도기 때문에(자세한건 나무위키 항목에 있는 백제 요서경략설 항목에 요서경락설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자료들이 나와있다.),중국이 한국에게 유리한 유리한 기록들을 일부로 기록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반론은 별로 말이 되지 않는다. (출처: https://m.blog.naver.com/empiresking/220895646517 일제가 환단고기같은 한국 고대사를 숨기기 위해서 한국의 고서 20만권을 붍태웠다는 근거에 대한 자세한 반론은 이 블로그를 참조.)

그리고 이병도가 대표적인 식민학자로 일제에 편으로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식민사관을 했다는 주장역시 사실이 아니고 실제로 이병도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연대를 내려 주장하는 일본인 사학자의 주장에 반발하여 건국연대를 신라의 경우 내물왕, 백제의 경우 고이왕으로 주장하여 100여 년 이상 끌어올리는 등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학설들을 내세웠고 위만에 대해서도 위만 조선인 썰을 주장하였고 '한사군 한반도설'을 이병도가 일제 식민사학자들한테 이어받았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 문서를 참고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낙랑군의 위치를 한반도 서북한 일대로 비정한 견해는 그 뿌리가 가깝게는 정약용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 넘었다는 패수=대동강설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나오는 기록이다.(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100 )

그리고 롯본기는 유럽과 일본에 비해 한국은 경차가 별로 없고 대형차들을 선호하고 그리고 한국은 일본에 비해 뭐든지 사업도 전부다 크게 하고 마트에 파는 물건들도 전부 다 크게 팔기 때문에 한국은 삼국시대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하였고 지금 한국이 그런 식에 뭐든지 다 큰걸 선호하는 건 옛날에는 대륙을 지배하였지만 지금은 조그마한 반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오랫동안 넓은 대륙에 살다가 조금만 반도에 갇혀살게 되자 오랫동안 억눌리진 마음이 분출해서 뭐든지 다 큰걸 선호한다고 괘변을 주장하지만 사실 한국에 비해 유럽이나 일본이 경차가 더 선호되는 이유는 유럽같은 경우야 환경 보호 문제 그런게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 정말로 철처해서 이산화탄소가 덜드는 비교적 친환경 위주에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라(대형차는 이산화탄소를 엄청 배출해되니) 그렇고 그리고 일본은 경차가 많은 이유는 사실상 차고지 증명제 때문이고(애초에 일본은 한국보다 땅값이 비싼 국가이니) 그리고 한국인들이 무슨 다른 나라에 비해서 사업도 전부다 크게 한다 통도 크고 물건들은 전부다 크고 일본은 다 작고 한국은 다 작다는 말 역시 전혀 근거가 없다.

롯본기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키는 153정도였고 반명 조선인의 키는 그것보다 10cm이상은 더 크고 그리고 당시 일본은 그때당시 지상최강의 무기인 조총의 보유량이 유럽 전체 조총의 보유량보다 더 많았는데도 당시 조선에게 질 정도로 최신무기를 가지고도 그걸 잘 활용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당시 조선인의 평균키는 161cm정도였고 일본인의 평균키는 155cm정도로 약 6cm정도의 차이였고 그리고 당시 일본이 보유한 조총이 유럽 전체보다 많다는 말 역시 전혀 근거가 없는 사실이고 실제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총 비율은 일본군 전체 비율의 대략 15%정도였고 나머지가 창과 칼로 무장을 해서 실제 일본군의 무장 비율 거의 대부분은 창칼인 근거리 무기였다. 그리고 당시 조총은 실제로는 그때당시 시대적인 한계로 기계기술이 허접해서 조금만 습도가 높아도 쉽게 고장나기도 일수고 장전시간도 오래 걸리고 바람 불거나 비오면 쓰지 못하고, 장전할때 화약가루로 인해서 여러명이서 쏘고나면 연기 때문에 시야도 안보이고 활처럼 곡사도 안되고 사거리도 활이나 대포에 비하면 짧았는 등 단점이 엄청나게 많았고(그런데도 일부나마 조총을 당시 사용했던건 당시 활에 비해 조총이 워낙 배우기가 쉬웠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병력보충을 할수가 있다는 점이다.실제로 당시 조선군은 최대한 빨리 대량의 정규군을 육성하기 위해서 조선전체 병종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조총병력으로 육성을 하고 그런 조총을 보조하는 창병같은 근접병력은 제대로 육성을 하지 않는 바람에 정묘호란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에게 제대로 털렸다.)

오히력 화력면에서는 조총이 사거리가 100m고 조선의 총통은 사거리가 1km가 넘어서 조선의 각종 천자총통,승자총통같은 총통들이나 그밖에 신기전,비격진천뢰 등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이 훨씬 더 우세했던게 사실이며 양국의 군함들 역시 일본의 주력군함인 세키부네나, 고바야보다 조선의 주력군함인 판옥선이 크기도 배의 높이도 더 높아서 일본군은 조선군을 사격하기 힘든반면 조선군이 일본군을 사격하기 훨씬더 쉬웠으며 배의 크기도 훨씬더커서 대량의 함포들을 대량으로 장착시키기 더 유리하고(특히 해전은 상대를 배를 빠르게 침몰시키는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철처히 함포싸움이다.실제로 중세시대 이후 세계사적으로 유명한 해전들도 거의다 함포싸움으로 승패가 결정났다. 그리고 사실 일본은 전국시대 전투들 거의 대부분이 지상전 위주의 싸움이였기 때문에 해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서 해군력과 해군무기는 빈약했다.)내구성도 더 튼튼해서 조선의 판옥선이 배도 훨씬더 커서 대량의 함포들을 배에 실을수 있을 정도로 오히려 무기는 조선이 더 좋았다. 그런데도 당시 일본군이 전쟁초반에 20일만에 조선의 수도 한양을 점령할 정도로 일반적으로 압승을 거두었던 가장 큰 이유는 병사들의 근거리 전투 숙력도가 당시 전문적인 훈련을 배우 일본군이 워낙 압도적이였기 때문이며 당시 이러한 병사들의 근접번 전투력 차이는 전쟁이 끝날때까지 일본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조선의 기록들에서도 당시 일본의 검술에 대한 조선이 호평한 기록들이 많고 (출처: https://namu.wiki/w/%EC%9D%BC%EB%B3%B8%EB%8F%84 자세한건 이 항목참조. 이 항목에 일본도와 검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거기 나온 역사학자들이 당시 전투 숙련도면에서 일본군이 더 월등하다고 묘사했고 임진왜란 이후 30년 넘게지난 이괄의 난에도 임진왜란때 항복했던 항왜들은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때 시점 기준으로 50살 전후의 당시로서는 노인들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의 최정예병력이였던 북방수비군이였던 이괄의군대 내에서도 근접전 전문부대로 관군과 싸우면서 선봉에서 활약했고 조선관군도 이런 이괄의 항왜들에게 큰 피해를 입자 다른 항왜들을 고용해서 이괄의 난을 진압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당시 일본을 상대로 승리할수 있었던 이유는 수군력은 활실히 조선이 오히려 더 강했고 당시 조선은 방어자 일본은 공격자로 조선은 주로 수성을 하는 입장이였고 거기다가 당시 일본이 예상을 못한 의병이란 존재 그리고 그 의병들은 아무래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조선땅에서 전쟁을 하다 보니 일본보다 훨씬더 지리,지형에 능숙해 지리, 지형을 이용한 매복공격을 이용해서 승리를 할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당시 명나라군의 대규모 지원, 그리고 당시 일본은 선조만 잡으면 전쟁이 끝난다고 착가해 무리하게 선조를 잡기 위해서 후방보급을 신경쓰지 않고 진격해서 후방 보급로를 상대히 허술하게 하는 실책을 저질렀는 점 등 이러한 여러 조선에 유리한 요소들이 합쳐서 승리할수가 있었다.

롯본기는 당시 일본의 온갖 장식이 달린 화려한 갑옷을 가지고 애초에 전투에서 갑옷의 역할로 가장 중요한건 효율성인데 당시 일본의 갑옷들은 너무 장식이 많이 달려 거추장스럽다며 일본의 갑옷들을 비효율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롯본기가 말하는 화려한 갑옷들은 일반 무사나 병사가 아닌 애초에 다이묘들이 입는 갑옷인데 다이묘들이야 직접 싸우지 않고 안전한 위치에서 뒤에서 지휘만 하니 역할이기 때문에 굳이 직접 전투용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고 오히려 자신의 상관인 여러 군소 다이묘들을 거느리고 있는 대다이묘나 아니면 쇼군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기억시키게 하기 위해서 저런 화려한 갑옷들을 입고 다닌 것이라 다이묘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갑옷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밖에는 당시 일본이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게 오로직 운빨 때문이며 그저 자신들보다 강한 미국에 겁을먹고 싸우지도 않고 굴복해서 개방을 했기 때문이며 만약 조선이 먼저 서양과 개방을 했더라면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을 거라는 국뽕적인 주장만 하지만 실제로 당시 일본이 메이지 유신에 성공할수 있었던 것은 조선과 달리 이미 메이지 유신 이전인 에도시대 부터 일본은 농업 생산량면에서 조선을 이미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면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상업에 치중해서 조선보다 훨씬더 탄탄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실제로 19세기 후반당시 조선의 경제력은 일본의 10분에 1도 채안되었다.( 출처: https://blog.naver.com/hong8706/220396914193 )
애초에 먼저 근대화를 했더라면 개방을 했더라는 말은 이미 일본보다 먼저 개방을 했다가 식민지로 전략한 동남아등 수많은 아시아 국가들을
사례로 이미 반박이 가능하고 그리고 근대화를 할려면 당연히 철도 구입해야 하고, 신식무기를 사고 공장짓고, 근대식 병원과 학교를 짓고 거기다가
서양과 개방을 하는순간 불평등 조약을 기본으로 깔고가야 하기 때문에 그 모든것을 다 감당할수 있을 정도의 탄탄한 경제력이 필요했는데 일본에
비해 당시 조선은 이미 19세기 후반당시 부정부패로 국가의 경제가 파탄이 난 상황이라 그러한 탄탄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했다.

거기다가 당시 일본은 에도막부는 미국의 요구에 싸우지도 않고 불평등조약으로 개방을했지만 이런 에도막부의 요구에 조슈번과 사츠마번은 크게 반대하며 이후 초강대국 영국의 통상요구에 반발하며 직접 전쟁까지 했고(죠슈번은 시모노세키 전쟁, 사츠마번은 사쓰에이 전쟁당시 영국과 직접 싸웠다.)
에도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세력역시 서양의 통상요구에 반발하며 영국하고 직접 전쟁까지 했던 죠슈번과 사츠마번이였기 때문에 그저 서양에 겁을먹고 싸우지도 않고 굴복해서 개방을 해서 근대화를 했다는 롯본기의 주장역시 전혀 사실에 맞지않는 잘못된 주장이다.(즉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던 주력세력은 사츠마번과 죠슈번으로 메이지 유신을 일으켰던 일본의 세력들은 직접 서양세력하고 전쟁까지 전쟁이후 직접 서양과 전쟁이후 더더욱 서양문물의 필요성을 직접 몸으로 겪고 난 다음에 메이지 유신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또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했던 이유도 보신전쟁 같이 자신들의 전국적으로 일어난 내전을 최대한 서양열강들이 간섭하기 전에 빨리 끝내기 위해 최대한 서로 평화적으로 해결을 해서(항복을 에도 막부 인사들에게 관직을 주면서 최대한 그들을 고용하면서 관대한 처분을 내려 상대의 항복을 유도하는 식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내전을 불과 1년남짓 만에 끝낸 현명함과 (만약 남북전쟁이나 한국전쟁 같이 내전을 몇년씩 끌었다면 일본도 전쟁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이 나서 이후 서구의 식민지로 전략을 하였을 것이다.) 서양으로부터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배워야 하는건 적극적으로 배우는 현명함 자세 때문에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리고 그밖에도 도쿄가 지진판 지형이니 일본이 에도시대 당시 도쿄로 수도를 천도한 것을 가지고 바보같은 일이라고 까는데 당시 도쿄로 수도를 천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애초에 그동안 자신의 본거지가 도쿄가 있는 간토지역 이였기 때문에 그쪽에 자신의 핵심 기반시설과 심복들이 다 있으니 다른 지역의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당연히 자신의 핵심 기반시설과 심복들이 있는곳에 수도를 삼는게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리고 사실 도쿄가 속해있는 간토 지역이 일본내 전체에서 가장 평야가 많은 부유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에도시대 초기부터 간토평야가 적극적으로 개발되어서 일본내 최대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밖에 일본의 대표적인 우키요에 화가인 도슈사이 샤라쿠가 김홍도라는 김홍도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만 애초에 샤라쿠가 그린 그림 중에서
그의 대표작인 3대 오타니 오니지의 얏코에도베 말고 그밖에 다른 그림들에서는 잘만 손모양이 정확하게 그려지는 데다가 설령 샤라쿠와 김홍도처럼 손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고 쳐도 김홍도는 손을 작게 그려서 잘 부각시키지 않은 반면 샤라쿠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그림은 오타니 오니지의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손을 크게 강조를 해서 그리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고 거기다가 그런식으로 손가락 실인증을 가진 사람이 세상이 한두명만 있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샤라쿠의 성에 한자어로 동쪽을 뜻하는 동녘 동이 들어가는 것 역시 사실 샤라쿠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인물인 당시 노가쿠 배우였던 사이토 쥬로베가 에도 동쪽에서 주로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가명에 동쪽을 뜻하는 동녘 동을 사용했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면 그밖에 다른 주장으로도 샤라쿠가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에도를 기준으로 동쪽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문제가 없는 데다가 결정적으로 샤라쿠가 활동했던 1794년 당시 김홍도가 조선내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관료로 일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샤라쿠가 김홍도라는 설은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
(출처: http://www.goesan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0584 )


13. 북한에 대한 찬양[편집]



문재인이 북한에 대한 북한에 호의적인 정책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김정은이 북한의 경제발전에 치중하겠다는 정책을 내세운다고 김정은이 북한 국민을 위하는 애민 군주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김정은은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는데 각종 북한 핵개발 뿐만 아니라 혼자서 수백억짜리 요트 사고, 각종 호화 사치 음식 먹으면서 지내는등의 모순적인 모습등은 전부다 언급도 안하고 외면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런 식의 주장을 하면서 정작 김정은이 한 제대로 한 경제 발전 정책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도 않았다.)


14. 기타[편집]



닉네임부터 자신을 교수라고 자칭하며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을 엿볼 수 있으나, 정작 정교수도 아닌 부교수인데다가, 부교수직을 했던 곳도 주변이 논밭 뿐인데다가 정원 280명에 학부가 단 2개뿐인, 대학이라고 불러 주기도 아까운 지잡대 중의 지잡대인데 그런 곳에서 부교수한 것을 내세울 수 있느냐는 비판도 있다. 거기다가 롯본기는 본인책에서 일본에 살때 일본지인들이 자신을 소개할때 대학교수라고 소개한 것이 아니라 가게주인이라고 소개했다면서 그것을 가지고 일본은 대학교수보다 자신의 가게를 차리는걸 더 대단히 생각한다고 주장하지만 애초에 롯본기는 제대로 된 대학교수가 아니라 지잡대 중에 지잡대의 그것의 정식교수도 아닌 부교수다. 대학교수라고 소개하면 당장 어느 대학의 교수인것부터 먼저 물어볼 것인데 그럴바에는 차라리 가게 주인이라고 소개하는게 낫다.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정과 사랑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근거가 부족하다. 복귀 후 올라온 영상에서도 언제까지나 자기가 겪은 일부의 사례만을 들고와 국민성 운운하며 비하하고 있다. 이건 일부만의 사례를 들어 한국인을 비하하는 일본 혐한과 다를 게 없다.[22] 그리고 롯본기는 일본 문학가 나츠메 소세키 역시 당시 일본에는 사랑한다는 표현 자체가 없어서 사랑한다를 표현을 문학적으로 당신의 다리가 아름답네요라고 표현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나츠메 소세키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문학적으로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표현을 하였다. 그리고 사실 원래 일본은 상대방에 애정을 표현할때 원래 사랑한다는 표현보다는 주로 좋아한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리고 한국이 노벨상을 타지 못하는 이유가 전세계에서 가장 언어단어가 많은 국가가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의 수많은 언어단어들을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해서 한국이 노벨상이 없는 이유라고 정신승리를 하는데 이러한 주장을 할려면 최소한 한국이 만든 발명품중에서 국내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단순히 한두분야가 아닌 거의 대부분의 산업분야에서 널리 응용, 상용화되어서 쓰이는 획기적인 발명품이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한국이 그러한 발명품을 만든적은 없다.







[1] 실제 영상에서도 저딴건 별거 아니라는 식의 말을 하기도 했다.[2] 상술한 경력만 보면 미국계열 회사에 시니어 컨설턴트로 취직한 동안 벌어졌을 일은 적으며 그게 아니면 일본 학교에서 부교수로 일했던 것인데 이걸 '사업'이라 보든 안보든 애매한 부분이 있다. 저걸 '사업'이라 말했다면 교수직을 '사업'으로 치부했단게 되고 저게 '사업'이 아니라면 그게 뭔지도 밝히지 않고 무작정 저리 부정적으로 말했다는 소리이기 때문.[3] 이들은 조선이 이전 시기보다 퇴보했거나 정체되었으며 자생적 변화가 불가능한 지상 최악의 국가였다고 이야기하고 일본의 식민통치 덕분에 한반도에서 모든 방면의 근대화가 이뤄졌으며 조선인들은 억압 없이(혹은 약간의 지역차별 정도로) 제국 신민으로 일본인과 동등한 삶을 누렸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들의 조선 시대에 대한 관점이 롯본기 김교수의 논리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