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들로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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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dlow Massacre
1. 개요[편집]
1914년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소유의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과 그 가족이 가혹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이자 콜로라도 주방위군과 회사에 고용된 민병대가 이들을 공격해 수십명의 광부와 그 가족들이 사망한 사건. 1913년 가을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이어지던 일명 콜로라도 석탄 전쟁(Colorado Coalfield War)이 정점에 치달았을 때 벌어진 참사다. 록펠러의 업적에 가려져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아는 미국인이나 외국인들은 록펠러를 악덕 자본가라면서 비난하기도 한다.[1]
2. 전개 과정[편집]
2.1. 파업과 천막 농성[편집]
콜로라도주 남부의 러들로 지역에는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가 소유한 '콜로라도 퓨얼&아이언 컴퍼니'(Colorado Fuel Iron Corporation)가 운영하던 광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그리스, 이탈리아, 세르비아 등 11,000명의 외국인 광부들이 일하고 있었다. 이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은 오랫동안 비참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을 강요당했다. 1800년대 후반부터 광부들은 회사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했으며 1913년에는 '광산노동자연합'의 지원 하에 노동조합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회사는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탄압하기에 급급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들은 1913년 9월 회사에 7개의 요구조건을 내걸어 속히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1. 교섭대표로서의 노동조합 지위 인정
2. 2,000파운드 기준 노임 계산[2]
3. 8시간 노동제 시행
4. 채광 이외의 일에도 임금 지급
5. 공정한 석탄 무게 측정을 위한 무게 측정인 직선제 실시
6. 가게, 하숙집, 병원을 임의로 선택할 권리 보장[3]
7. 콜로라도주의 법률 준수 및 회사의 감시 시스템 철폐
그러자 회사는 광부들의 요구 조건을 거절하고 대대적인 해고를 단행했는데 10,000~20,000여 명의 광부들이 직장에서 잘림과 동시에 사택에서 쫓겨났다. 울분에 찬 광부들이 가족을 대동하고 탄광 부근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가자 회사는 민병대를 고용했고 텐트촌이 있던 러들로로 파견했다. 민병대는 곧 천막촌을 포위했고 노동자들과 대치했다. 이후 기나긴 대치와 조그마한 충돌들이 해를 넘겨 1914년 봄까지 이어졌다. 그러자 콜로라도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2.2. 학살[편집]
1914년 4월 20일 주방위군 2개 중대가 천막촌 근처에 진을 쳤다. 이들은 대략 1,000여 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살고 있던 러들로의 천막촌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주둔해 있었다. 이 날은 사측과 광부 측에서 최종 협상이 있었는데 그 사이 민병대와 주방위군이 개틀링 기관총을 천막촌이 보이는 산 측면에 설치했다. 곧이어 광부들과 군인들의 충돌이 발생하자 오후 7시 천막촌 곳곳에서 군인들에 의해 화재가 발생했고 동시에 민병대와 주방위군의 무차별적 발포가 시작되었다. 천막촌은 전소되었고 천막촌 안의 굴에서 생활하던 광부들의 가족들까지 불길 속에 갇히고 말았다. 11명의 어린이들과 2명의 여자가 그 굴 속에서 목숨을 잃은 채로 다음 날 전화 가설공에 의해 발견되었다. 죽은 아이들은 11살이었던 1명을 빼고 모두 10살 미만이었다. 이 날 천막촌 주민 19명, 주 방위군 3명, 민병대 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들을 돕기 위해 적십자에서 구호 작업을 벌이고자 했지만 군인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 사망자 명단
이 소식은 전미에 신속하게 퍼졌고 콜로라도의 주도인 덴버에서는 전미광산노조가 '무장 호소문'을 발표했다. 다른 천막촌에서는 300명의 무장한 파업광부들이 러들로 지역으로 행진하여 전화선과 전신선을 끊고 전투를 준비했다. 이러한 학살 행위에 분노한 광부들은 함께 무장하여 투쟁할 것을 촉구했고 광산 소유의 재산들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광부들은 민병대와 주방위군과도 격렬하게 충돌했고,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결국 연방군이 투입되고 나서야 상황을 겨우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파업을 일으킨 광부들과 사측 임원들은 법정에 서야 했다. 하지만 광부 측에서는 체포된 332명 대부분이 유죄 판결이 나온 반면 사측에서는 민병대 장교 1명만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충돌 기간 동안 66명이 살해되었지만 민병대원이나 광산 경비원은 한명도 기소되지 않았다.[6]
그러자 덴버의 주정부 청사 앞 잔디밭에서는 5,000명이 시위를 벌이면서 러들로에 있던 주방위군 장교들을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고, 주지사는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전국 각지에서도 집회와 시위가 일어났으며, 뉴욕시 브로드웨이 26번지에 있는 록펠러의 집무실 앞에서는 피켓을 든 행진이 이어졌다. 어떤 목사는 록펠러가 가끔 설교를 하던 교회 앞에서 항의하다 경찰에게 곤봉세례를 당했다. 뉴욕타임스도 국제적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던 콜로라도 사태를 사설로 다뤘지만 이 신문은 잔학행위가 아닌 전술상의 실수를 강조할 뿐이었다.[7]
3. 사건 이후[편집]
미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요 가수인 우디 거스리는 1946년에 이 사건을 묘사한 동명의 노래를 작곡해 불렀다.
학살이 일어났던 곳에서는 전미광부노조가 세운 추모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추모비에는 러들로 학살 당시에 목숨을 잃은 19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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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록펠러의 잘못이라고 하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사자인 록펠러 본인은 사건이 벌어지기 몇 년 전부터 건강 문제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록펠러나 그의 회사가 직접 강제진압 명령을 지시하거나 유도했다는 정황은 현재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지시했는 가에 대한 여부를 떠나 소유자로서 도의적 책임은 피할 수 없었다. 사건이 일어난 일어난 이후에 건강을 회복한 록펠러는 이를 크게 뉘우쳤고, 그가 자선사업가로 변화하는 계기 중 하나로 본다.[2] 이는 미국 톤으로 1톤에 해당하며 파업 전에는 2,200파운드 기준으로 미터법 톤 당 노임을 계산했다. 사실상 미국 내 자원 거래에선 미국 톤이 표준으로 쓰이는 만큼 노임을 적게 주기 위한 꼼수로 미터법을 사용한 것.[3] 당시 광부들은 회사 소유의 상점만 사용이 가능했다. 제애그룹 지하노역장의 페리카마냥 현찰이 아닌 해당 상점에서만 쓸 수 있는 교환권을 임금으로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사측에서 이는 임금이 아닌 차후 있을 노동에 대한 선지급금이라는 명분으로 환전까지 금지했기 때문이었다.[4]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제목이다.[5] 파업 지도자였던 그는 군인들에 의해 난타당하고 수십 발의 총알이 박힌 처참한 상태로 발견되었다.[6] 미국 민중사 I, p.608[7] 미국 민중사 I, p.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