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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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평가


1. 개요[편집]


남명 조식이 1555년 12월 12일[1]명종에게 올린 상소문. 단성현감에 제수되었을 때 이를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라서 단성현감 사직(丹城縣監辭職)라 하며, 이 상소를 올린 것이 을묘년(서기 1555년)이라서 '을묘 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도 부른다. 그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명문이다.

1555년에 명종은 조식을 단성현감에 제수했다. 그러나 조식은 역시나 관직을 거부했고 관직을 사양하면서 올리는 상소로 올린 것이 바로 이 상소문이다. 단성소는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에서는 관직을 사양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이 항목의 내용은 후반부이며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단성현(丹城縣)은 당시 경상도에 있던 고을로, 강성현(江城縣)과 단계현(丹溪縣)을 통합한 지역이다. 현대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신안면·생비량면·신등면 일대가 단성현이었다.

2. 내용[편집]


…抑殿下之國事已非, 邦本已亡, 天意已去, 人心已離, 比如大木, 百年蟲心, 膏液已枯, 茫不知飄風暴雨, 何時而至者久矣。

전하께서 나랏일을 잘못 다스린 지 이미 오래되어,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임금에서 멀어졌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먹혀 진이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올 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은 지가 오랩니다.


在廷之臣, 非無忠義之士, 夙夜之良也, 已知其勢極而不可及, 四顧無下手之地。 小官嬉嬉於下, 姑酒色是樂, 大官泛泛於上, 唯貨賂是殖 河魚腹痛, 莫肯尸之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나라의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서 히히덕거리며 술 마시고 즐기는 일에 정신이 없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오직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으는 데 정신이 팔려 물고기의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而且內臣樹援, 龍挐于淵 外臣剝民, 狼恣于野, 亦不知皮盡而毛無所施也。 臣所以長想永息, 晝而仰觀天者數矣, 噓唏掩抑, 夜以仰看屋者久矣。

뿐만 아니오라 조정의 내신들은 파당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 떼처럼 날뛰면서도,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은 시름에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 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 못 이룬 지가 오랩니다.


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沖, 只是先王之一孤嗣。 天災之百千, 人心之億萬,何以當之, 何以收之耶? 川渴, 雨粟, 其兆伊何? 音哀服素, 聲像已著。 當此之時, 雖才兼周、召, 位居鈞軸, 亦未如之何矣。 況一微臣材如草芥者乎? 上不能持危於萬一, 下不能庇民於絲毫, 爲殿下之臣, 不亦難乎? 若賣斗筲之名, 而賭殿下之爵, 食其食而不爲其事, 則亦非臣之所願也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아드님, 고아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강이 마르고 곡식이 내리니, 이 무슨 조짐이겠습니까? 소리는 슬프고 옷은 희니, 소리와 모습에 이미 드러났습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재주가 주공소공을 겸하여 삼공의 위치에 있다 해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온데, 하물며 부족한 소신과 같이 아무 힘도 없는 자야 더 말해 무엇하오리이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실낱만큼도 지킬 수 없으니, 임금님의 신하 되기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임금님의 벼슬을 도적질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치 않습니다.


且臣見近日邊鄙有事, 諸大夫旰食, 臣則不自爲駭者, 嘗以爲此事, 發在二十年之前, 而賴殿下神武, 於今始發, 非出於一夕之故也。 平日朝廷, 以貨而用人, 聚財而散民, 畢竟將無其人, 而城無軍卒, 賊入無人之境, 豈是怪事耶? 此亦對馬倭陰結向導, 作爲萬古無窮之辱, 而王靈不振, 若崩厥角。 是何待舊臣之義, 或嚴於周典, 而寵寇賊之恩, 反加於亡宋耶? 視以世宗之南征, 成廟之北伐, 則孰與今日之事乎?

또 제가 요즈음 보건대, 변방에 일이 생겨 여러 대부가 제 때에 밥을 먹지 못하지만, 저는 놀라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이십 년 전에 터질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서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니, 하룻저녁에 생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조정에서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백성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장수의 자격에 합당한 사람이 없고 성에 군졸이 없어서, 외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 했으니 이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겠습니까? 이번에도 대마도 왜노가 향도와 남몰래 짜고 만고에 끝없이 치욕스러운 짓을 하였건만, 왕의 신령한 위엄은 마치 한 모퉁이가 무너지듯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어찌 구신(舊臣)을 대우하는 것은 주나라 법보다도 엄격하면서[사신주]

구적(寇賊)을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나라보다 더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세종께서 남쪽 오랑캐를 정벌하시고 성종께서 북벌하신 일을 보아도 어디에 오늘날과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然若此者, 不過爲膚革之疾, 未足爲心腹之痛也。 心腹之痛, 痞結衝塞, 上下不通。 此乃是卿大夫乾喉燋唇, 而車馳人走者也。 號召勤王, 整頓國事, 非在於區區之政刑, 唯在於殿下心; 汗馬於方寸之間, 而收功於萬牛之地, 其機在我而已。 獨不知殿下之所從事者, 何事也? 好學問乎? 好聲色乎? 好弓馬乎? 好君子乎? 好小人乎? 所好在是, 而存亡繫焉。

그러나 이 같은 것은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고, 마음과 속의 병은 이보다 더 심각합니다. 이런 나라 형편을 바로잡는 길은 여러 가지 다양한 나라의 법령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께서 한 번 크게 마음먹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홀로 전하께서 하시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아시지를 못합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음악과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그 좋아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苟能一日惕然(驚)[警]悟, 奮然致力於學問之上, 忽然有得於明新之內, 則明新之內, 萬善具在, 百化由出。 擧而措之, 國可使均也, 民可使化也, 危可使安也……。

진실로 전하께서 하룻밤 사이에 깜짝 놀라 새 사람이 되듯 깨달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학문에 힘써 덕을 밝히시고, 백성이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게 하십시오. 착함과 덕을 펴는 정치를 하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흩어진 민심이 다시 전하께로 돌아오고, 위기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평가[편집]


사신은 논한다. 조식은 일사(逸士)로 시골에 있었다. 비록 작록(爵祿) 보기를 뜬 구름 같이 여겼지만, 오히려 임금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정성스럽게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언사(言辭)에 드러났고 간절하고 강직하여 회피하지 않았으니, 명성을 거짓으로 얻은 자가 아니라고 말할 만하다. 어진 사람이다. (원본 해석)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조식은 시골에 편히 있던 자로, 벼슬은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임금까지 그리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이 글에 드러났는데 정말로 간절하고 강직하면서도 회피하려 들지 않았으니, 이 사람이 괜히 세간의 칭송을 듣는 게 아니었네요. (현대식 어법 적용)

명종실록에서 단성소 완독 후, 사관이 쓴 구절. 실록


사신은 논한다. 대개 상소의 내용이 격절하고 강직한 것을 감사가 잘못되었다고 바로잡아 책망하여 물리친다면,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군상(君上)의 과실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여 마침내는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는 화(禍)가 있을 것이다. 대저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 그 영(令)을 따르지 않고 그 뜻을 따르는데, 더구나 정령(政令)에 반포하여 그것을 따르게 하는 데이겠는가. 크게 신자의 체모를 상실했다고 책망하였으니 상의 뜻하는 바를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아, 이것은 성덕에 큰 누가 될 뿐만 아니라 실로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에 관계되는 것이니 어찌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본 해석)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상소는 죄다 아첨으로 가득한데, 그건 임금의 잘못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섬기는 임금을 향해 그 명령을 어기고 본래의 뜻을 말하려 하는데 그걸 어겼다는 죄로 크게 꾸짖고 처벌하려 하면, 누구라도 상소문을 아첨으로 가득 쓸 수밖에 없잖습니까? 이건 나라를 당장 망칠 수도 있는 짓인데 비판이 나오겠습니까, 안 나오겠습니까? (현대식 어법 적용)

실록에서 단성소 완독 후, 사관이 쓴 마지막 구절.

분명 제수를 정중히 거절하는 문장이 되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당대의 국가적 현실과 정치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시국선언문이 되고 말았다. 왕실을 대놓고 비판한 것부터 큰 문제가 될 판이었는데 조식은 아예 "자전은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한 후사에 지나지 않으시니 천백 가지의 천재지변과 만 가지의 민심을 어찌 수습하시렵니까?" 라고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형식상의 예법을 걷어내면 "대비는 과부에 불과하고 주상은 애비 없는 놈일 뿐인데 나라 꼴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라고 왕실에 패드립을 날리는 초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또한 "전하께서는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중략) 전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느냐에 따라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이 문장은 쉽게 말하자면 "전하께서 주색잡기에 빠져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나라 꼴이 왜 이 모양입니까?"라고 대놓고 왕을 비판했는데 이 또한 형식상의 예법을 걷어내면 '차라리 주색이나 여색에 빠져서 나라가 이 모양이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그냥 전하가 골빈 놈에 불과하다.'며 왕을 조롱한 것이다. 명종 때의 정치 상황을 감안하면 죽음을 각오한 발언이다.

이 상소를 읽은 명종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나의 부덕(不德)을 헤아리지 못하고 대현(大賢)을 굽혀 조그만한 고을에다 두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불민(不敏)한 탓"이라고 대놓고 비꼬았다.[2] 사신이 "이 말은 진실로 왕자(王者)가 할 말이 아니다. 옛날의 제왕(帝王)에게 비교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바가 있다. 정원에서는 이를 자세히 알도록 하라." 고 왕을 깠을 정도.[3]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이미 친정을 하고 있던 명종이었지만 아직도 문정왕후의 입김은 강했고 그 위세를 믿고 윤원형·정난정 등이 날뛰던 시절이었다.

상소문을 읽은 직후 명종이 내린 전교를 보면 '비록 간절하고 강직한 듯하기는 하나 자전에 대해 공손하지 못한 말이 있으니, 군신(君臣)의 의리를 모르는 듯하여 매우 한심스럽다', '임금이 아무리 어질지 못하더라도 신자로서 어찌 차마 욕설을 하는가? 이것이 현인 군자가 임금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는 일이겠는가?' 라고 나오는데, 이건 전교로서 다듬은 표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새끼, 왜 갑자기 부모 욕부터 박고 지랄이야! 내가 아무리 무능해도 공경하는 태도라도 보여야지 신하라는 놈이 임금한테 대놓고 쌍욕을 박는데 내가 이 놈 죽여 살려!?" 라고 격앙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명종의 분노에 성수침[4]과 정종영[5], 이헌국[6] 등이 '조식 저것이 학문이 부족해서 지 잘 난 줄 알고 저러니까 전하께서 참으십시오', '저렇게 막말하는 것도 다 주상을 위한 것이니 너그러이 참으십시오'라고 간신히 주청하여 임금을 달랬을 정도니 말 다했다.

어쨌거나 조식은 왕과 왕의 부모를 대놓고 모욕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조식이 벼슬은 안 했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로 불려서 이황에 버금갈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명종 본인의 입지도 완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세간의 반발을 의식해서 죽이지 못한 것.

단성소는 오늘날의 정치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자주 정치개혁을 강조하거나 선거철이 되면 회자되기도 한다. 그만큼 명문장이란 이야기. 명종실록에서도 사관은 조식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고 주석으로 찬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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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1월 19일.[사신주] 아마도 남정(南征)한 장사(將士)에게 형(刑)을 준 것을 지목한 듯 하다.[2] 이를 현대식 어법으로 변형하면 "아이고 내가 너무 멍청해서 이런 훌~륭하신 분을 쬐그만 마을에다 두려고 했네? 이건 내가 재빠르게 일을 처리하지 못한 탓이구나." 정도로 해석된다.[3] 이를 현대식 어법으로 변형하면 "임금이란 인간이 이런 말이나 하다니…옛날의 임금들에게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정원에서는 대체 뭐 하고 있었나?" 정도로 해석된다. 명종은 반어법이라고 한 말이지만 그냥 그게 문자 그대로의 의미라는 것.[4] 성수침의 아들이 바로 이이·정철의 친구였고 초기 서인의 중심 인사였던 우계 성혼이다.[5] 공신 정윤겸의 손자이자 청백리 중 한 사람으로, 놀랍게도 위의 정난정과 서고모-조카 사이이다.[6] 정종의 왕자 진남군의 현손으로, 좌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충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