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혁(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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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남한에는 1926년 평남 양덕 출신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 1935년 6월 27일에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때는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에야 교육을 받아 전후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황해제철소에 배치되었다. 레닌그라드 대학 유학파라는 말도 있는데 북한에서 웬만큼 성분 좋은 인물이 아니면 유학 경력을 밝히지 않아서 북한에서 밝히는 일대기엔 없다. 그런데 1958년에 황해제철소 제1호 용광로 건설장을 확인하다가 사소한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근데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는데 소독약이 개판이라서 부상 부위가 썩어서 결국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하고 다니게 되었다.

1966년, 용광로 종합직장 직장장으로 일하다가 김일성이 소집한 경제부문 책임일군 협의회에 불려가서 김일성의 제철 자력갱생자력갱생론을 적극 지지하면서 김일성의 눈에 들게 되었고, 1967년 12월 정치위원회 결정에 따라 황해제철소 기사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열심히 일하여 김일성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1968년에 김일성이 북한산 자동차인 갱생68호 승용차도 하사하였으며 황해제철소를 방문한 외국 손님들에게 김윤혁을 따로 소개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 1972년 4월 8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1977년 11월,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법안심의위원회 위원 및 정무원 사무장으로 선출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정무원 금속공업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1]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1년 9월, 황해남도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지방으로 내려간 것이 확인되었으며,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86년 6월, 중앙자재총련합상사 총사장을 거쳐 1986년 8월 1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연형묵의 뒤를 이어 정무원 제1부총리 겸 간석지개간, 소금밭건설, 대규모발전소건설 등 5개전선건설 총지휘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8기 1차 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 겸 건설건재공업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8년 2월 1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건설건재공업위원장 자리에서 해임, 조세웅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나 정무원 부총리 자격은 유지하였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에 유임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1일,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리몽호의 뒤를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0년 11월에도 김정일로부터 차를 하사받게 되었다.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3일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서기장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심장병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으며 결국 임기 중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북한에서 상당히 대접을 잘 받은 인물임에도 부고도, 화환 전달소식도 나오지 않았다. 북한에서 공개한 사진이 흐릿해서 확실치는 않지만 2004년 12월 31일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1기 3차 회의에서 최영림이 후임 서기장에 임명되었으며 2006년 4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 직함으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2009년 12월 3일자 로동신문은 <자력갱생의 일군으로 키워준 위대한 사랑의 품: 김윤혁동지가 받아안은 고귀한 믿음과 은정에 대한 이야기>를 게재하여 김윤혁의 일대기에 대해 소개했으며, 김정은 시대에도 소개편집물이 제작되었다.

3. 여담[편집]


김윤혁의 가족들은 지금도 북한 선전물에 나오는 등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윤혁의 황해제철소 재직 시절을 다룬 연극도 제작되었다.


4. 참고문헌[편집]


  • 2005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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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부 자료는 1980년 3월로 되어 있으나 이는 그저 직함 보도 시점을 적은 것이고 로태석 장의위원 서열에 같은 장관인 조창덕과 함께 있는 걸 봐서는 이미 장관에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