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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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윤택.jpg
1922년 12월 20일~1950년 6월 30일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군인. 6.25 전쟁 중 전사했으며, 1954년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으나 국내에 유족이 없어서 전달받지 못하다 2009년 미국에 살고 있는 여동생이 전달받았다.#


2. 생애[편집]


김윤택은 1922년 12월 20일 함경북도 경성군[1]에서 태어났다. 1944년 형인 김용택과 함께 광복군에 들어가 김문택과 함께 제3지대에서 활동했다. 건국훈장을 받지 못해 공적조서에서 확인할 수는 없으나 김문택 수기에 광복군 당시 활동과 수감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문택의 수기에 따르면 난징으로 초모활동을 하기 위해 반부로 갔고, 그 곳에서 여러 명의 청년들을 초모해 광복군에 입대시킨 뒤 반부역에서 남경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다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김문택의 수기에서는 1945년 3월 경에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무공훈장 전달식 관련 기사에서는 1944년 8월 경에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의 패망 후 석방되었고, 서파[2], 윤창호, 안춘생과 남경잠편지대에서 활동했다. 1946년 귀국 후 고향에 돌아갔으나 1947년 월남해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했다.

1948년 5월 임관 후 육군사관학교 생도대 체육교관이자 스케이트 선수로 활동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생도대대 제1중대장으로 생도 1기, 2기를 이끌고 북한군과 교전했다. 1950년 6월 30일 판교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금곡지구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막으며 진지를 지키다가 인접부대의 갑작스런 철수로 적의 포위망에 들었다. 적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던 중 복부에 중상을 입었고, 그를 떠안고 가려는 생도에게 포로가 될 수는 없으니 자신을 쏘고 가라고 하여 자결하였다.

1954년 6월 20일 김윤택의 전사과정이 경향신문에 소개되었고, 화랑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김윤택의 유족들이 국내에 없었고, 여동생은 휴전 전에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훈장이 전달되지 못했다.[3] 김윤택의 여동생 김채운은 김윤택의 훈장 추서 소식을 듣지 못했고, 건국훈장 공훈 신청 등의 정보를 접하지 못하다가 2009년 육탄용사호국정신선양회[4]으로부터 훈장 추서 소식을 듣고 귀국해 훈장을 전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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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사편찬연구소 전몰장병 DB에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오지만, 여동생 김채운의 증언에서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온다.[2] 김학규의 사위로 광복군이자 국민혁명군 대령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해방 후 중국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국공내전에 참전하다가 국민당군의 패배 후 포로가 되어 10여 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3] 독립유공자들의 건국훈장 수여는 1962년에 시작되었고, 김윤택의 유일한 유족인 여동생은 미국에 살고있어 건국훈장을 받기 위한 공적조사 신청 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한다.[4] 당시 이사장은 전직 기무사령관인 허평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