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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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
金祐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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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정로생

원강(元剛)

수산(水山)[1], 초성(焦星)[2]
본관
신 안동 김씨[3]
출생
1897년 9월 19일
전라남도 장성군 읍서면 성산리 관아
(現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
사망
1926년 8월 4일 (향년 28세)
대한해협?
직업
작가, 사업가
활동
1914년 ~ 19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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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목포공립보통학교[1] (졸업)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2] (졸업)
현립 구마모토농업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문학부 문학과 영문학전공 / 학사)
부모
부 : 김성규(金星圭)
모 : 순천 박씨
형제자매
김철진(金哲鎭)[3]
김익진(金益鎭)[4]
배우자
정점효[5]
자녀
아들 김방한(金芳漢)[6], 딸 김진호(金辰浩)[7]
며느리
고창희[8]
손자
김인동(金仁東)[9]
김의동(金義東)[10]
김예동(金禮東)[11]
김지동(金智東)[12][13]
종교
유교무종교(무신론)


1. 개요
2. 생애
3. 작품 세계
4. 사상
5. 정사(情死)?



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목포에서 활동한 작가로, 시 50편과 희곡 3편 등을 발표하였으며 1926년에 대한해협(현해탄)에 몸을 던져 윤심덕과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고대 한국어에 대한 비교언어학적 연구로도 저명한 언어학자김방한 교수의 생부이다.

2. 생애[편집]


1897년 9월 19일 전라남도 장성군 읍서면 성산리(현 장성군 장성읍 성산리)의 관아에서 당시 장성군수였던 아버지 김성규(金星圭, 1863. 12. 6 ~ 1936. 10. 29)와 어머니 순천 박씨(1864 ~ 1901. 8. 4) 박명화(朴明華)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4]

1904년 부친 김성규가 강원도 순찰사(巡察使)에 부임했다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폐단을 가중시킨다는 조정 권신들의 모함으로 파직되어, 그 직후 가족들 전체가 당시 개항장이었던 전라남도 목포부로 이사하였으며, 여기서부터 김우진이 자라기 시작하여 별세 전까지 자리잡게 된다.

그는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와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목포유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농업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의하여 현립 구마모토농업학교에 진학하여 인문계 과목에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이때 즈음에 하동 정씨 정봉현(鄭鳳鉉)의 딸인[5] 정점효와 혼인하게 된다.

그 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와세다대학 고등예과[6]에 진학하여 수료한 후 본과 문학과에 진학하여 영문과를 전공해서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7] 졸업 후 귀국하여 곧 목포로 와서 상성합명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업가를 겸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죽기 몇 달 전까지 목포에 계속 머물면서 정오, 이영녀, 난파, 산돼지 같은 작품들을 내놓았다. 1926년에 일본으로 가는 부관연락선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라는 설이 있다.

3. 작품 세계[편집]


한국 문학사에서 한국 연극의 개척자이다. 서구의 연극을 연구한 덕에 근대적 극을 창조하였으며, 신파극이 주류였던 조선의 연극 및 극계에 파장을 일으켰다고 평가받는다.

김우진의 '시'는 당시 주류 시적 사상이었던 낭만주의와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 또는 투쟁에 관한 시가 아니라 표현적 자유와 표현의 창조를 강조하면서, 다른 길을 걸었다. 한 개인의 삶 속 절망적인 내면적 상황을 낭만적이게 노래하는 듯이 표현하였다.

희곡은 조지 버나드 쇼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받아 표현주의 기법을 굉장히 많이, 잘 사용하였다. 특히 대표 작품인 '산돼지'나 '난파'는 한국문학사에서 표현주의 문학론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김우진의 희곡은 사실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이 3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4. 사상[편집]


김우진의 사상은 자유주의로 구별될 수 있다. 특히 표현의 자유를 계속해서 주장하고 작품 내부에 포함시킴으로서, 문화적 자유주의에 대하여 강력한 신념을 가졌으며, 이로 인하여 작품내에서 보수적인 유교 가족관에 대하여 거부감을 표했으며[8], 실제로 가족과 깊이 충돌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이후에는 사회주의사상에도 어느 정도 공감을 가지게 된다. 그의 주류적인 사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한 것이었다.

5. 정사(情死)?[편집]


김우진이 자살했던 날에 윤심덕도 함께 사라지면서, 둘의 자살설이 신빙성 있게 제기되어 지금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일명 조선 최초 정사 사건)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김우진과 윤심덕의 정사설이 점점 부정되고 있는데, 당시에도 김우진의 죽마고우였던, 조명희는 풍문이라며 강력히 부정했다. 특히 정사가 아닌 근거로는 김우진이 출가하기 전에 아들 김방한(金芳漢)[9][10]교수를 굉장히 좋아했다는 점과 윤심덕과 김우진이 만난 적은 있지만, 사랑했다는 증거도 없을 뿐더러, 당시의 이혼이라는 제도가 분명히 있다는 점으로 비춰 보아 정사가 아닌 김우진의 자살 혹은 사고사로 생각될 수 있다. 참고로 승선명부에는 김수산이라고 적혀있는 김우진과 거주지와 나이가 똑같은 이름이 있는데, 수산은 김우진의 '호'일수도 있다. 목포에서 본 딴 호가 바로 수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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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시절을 보냈던 목포를 생각해서 지었다.[2] 프리드리히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그을린 별'에서 따왔다.[3] 승의랑공파 26세 진(鎭) 항렬.[4] 어머니 순천 박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으로 슬하에 김우진 본인과 첫째 남동생 김철진(金哲鎭, 1900. 12. 30 ~ ?)을 두었다. 첫째 부인 풍산 홍씨(1862 ~ 1891. 11. 3) 홍성모(洪聖謨)의 딸은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하고 별세했으며, 셋째 부인 김해 김씨(1885 ~ 1962. 7. 4) 김연배(金涓培)의 딸은 슬하에 여동생 한 명을 두었다. 넷째 부인 김해 김씨(1886 ~ 1964. 12. 12) 김이호(金履鎬)의 딸은 슬하에 여동생 한 명을 두었으며, 다섯째 부인 동복 오씨(同福 吳氏, 1887 ~ 1946. 12. 24) 오윤상(吳允相)의 딸은 슬하에 둘째 남동생 김익진(金益鎭, 1906. 4. 18 ~ ?)과 여동생 세 명을 두었다.[5]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김우진 일가 족보 1.png[6] 1920년에 와세다제1고등학원과 와세다제2고등학원으로 개편되어 사실상 이 두 교육기관이 와세다대학의 예과기관 역할을 전담하게 된다. 옛날 와세다대학 출신자들중에 이 1고등학원이나 2고등학원 졸업전력을 갖고 있는 이들은 우리가 아는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예과 과정을 거친 거라고 보면 된다.[7] 와세다대학에서 직접 출간한 와세다대학일람(早稲田大學一覧)에 따르면 1924년(다이쇼 13년)에 졸업했다고 기록되어있다.[8] 난파에서 잘 나온다.[9] 다음은 출처 사진이다. 파일:김우진 일가 족보 3.png[10] 참고로 김방한고대 한국어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언어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