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구설/팀 이적 및 경질 관련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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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2.1. 충암고-신일고 감독 이적 과정
2.2. 이재홍 건국대 진학 강요 사건
2.2.1. 사건 개요
2.2.2. 선수 끼워팔기 입학, 기회인가 비리인가
3. 프로 시절
3.1. OB 베어스 감독 선임 : 김영덕 삼성 감독 선임 논란
3.2. 태평양-삼성 이적 : 임호균 각서 파동
3.2.1. 김성근 측의 입장
3.2.2. 미심쩍었던 각서와 임호균 인터뷰



1. 개요[편집]


김성근 관련 구설수에 대한 내용 중 팀 이적 및 경질과 관련해서 일어난 사건들을 모은 문서이다.

김성근은 프로야구 구단 중 총 7개 구단을 맡아 신생팀인 NC와 KT, 그리고 롯데를 제외한 모든 팀에서 1군 혹은 2군 감독으로 재직하였다. 동시에 아마추어 팀과 독립리그 팀, 일본 팀까지 포함하면 감독 및 코칭 스태프로 16개 팀에서 활동하였다. 그만큼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오랜 역사를 함께 한 인물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구설수가 있었던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2. 아마추어 시절[편집]




2.1. 충암고-신일고 감독 이적 과정[편집]


1979년[1] 김성근은 충암고 감독에서 신일고 감독으로 이적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굉장히 당혹스럽게 이루어졌다. 제일 큰 문제는 당시 김성근과 충암고의 계약이 3년이나 남아 있었다는 것. 당시 김성근은 절친이었던 김동엽과 만난 자리에서 야구 명문 신일고 감독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는 소리를 돋고, "내가 거기 가볼까나?"라고 말하며 농담했는데, 이에 행동파였던 김동엽이 신일고 이사장과 교장까지 직접 데려와 압박하며 김성근을 신일고 감독에 앉히는데 성공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성근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적이 있을 수 없다, 김성근이 신일고의 전력을 탐냈기 때문에 이적한 것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다만 해당 논란은 좀 오묘한 게, 당시 신일고가 명문으로 자리 잡았다고는 하지만 충암고와 창단 시기가 그리 다르지도 않고,[2] 양쪽 다 황금사자기와 봉황기를 우승한 명문이었다. 무엇보다 계약이 3년이나 남아 있어 계약금을 토해내야 했던 상황, 전력상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 엎치락뒤치락 했다는 것들을 감안하면 정말 별뜻 없이 농담했다가 일이 커졌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충암고는 발칵 뒤집혔다. 당장 급하게 감독을 구해야 할 처지에 놓인 충암고는 신일고에서 경질된 한동화를 급하게 감독으로 영입했다. 동시에 충암고 측은 김성근에게 계약을 파기했으니 계약금 600만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3] 김성근은 "안정적인 기업은행 직장을 그만두고 충암고 감독을 맡았던 것은 600만원의 거액계약 때문이었는데…"라고 하면서 몹시 아까워 했지만, 스스로 계약을 파기한 이상 계약금을 다 토해내는 수 밖에 없었다. 김성근 스스로도 충암고 자체에는 난데없는 계약 파기 통보를 했던 기억[4] 때문에 아쉬움이 없었지만, 당시 안정적이던 기업은행 직장을 그만두고 충암고 감독을 맡은 것은 그 계약금 때문이었다고 아쉬움을 표한 바 있다.

결국 양쪽의 스승이 바뀐 모양새가 되었다. 언론에서도 김성근, 한동화의 맞교환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스승에게 배반당했다고 생각한 충암고 선수들은 신일고와의 경기에 다른 학교와의 경기보다 눈에 띄게 강도 높은 자세로 임했다.


2.2. 이재홍 건국대 진학 강요 사건[편집]



2.2.1. 사건 개요[편집]


김 감독이 그만두게 된 진짜 이유는 연세대와 건국대의 스카웃 싸움 대상 선수였던 이재홍 투수의 대학 진학 문제를 놓고 김 감독이 이재홍의 유니폼을 벗기면서 건국대 진학을 강요한 후유증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 이재홍에 대한 각 대학 팀들의 스카웃 싸움이 치열해지자 김 감독은 4명의 선수를 더 받아주겠다는 건국대 진학을 권유, 이재홍도 이를 받아들이는 듯했으나 9월 들어 이재홍이 돌연 연세대행을 고집하고 나섰다. 김 감독은 "고락을 함께 한 4명의 동료 선수를 위해 동료애를 발휘하라"고 설득하다가 이재홍이 끝내 말을 듣지 않자 황금사자기 서울 예선 때 이의 유니폼을 벗기는 강경 수단을 동원했던 것.

- 경향신문, 1981-10-28


해당 사건은 이러하다. 당시 신일고 에이스였던 이재홍에게 연세대와 건국대에서 동시에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는데, 김성근이 이재홍에게 동기 선수 4명을 같이 데려가겠다는 건국대에 진학할 것을 요구한 것. 처음에는 이재홍 또한 이에 동의하였으나, 9월 이재홍이 뜻을 바꿔 이를 거부하고 연세대 입학을 고집하자 김성근은 이재홍을 경기에 출장시키지 않았다. 결국 김성근의 강요가 관철되어 이재홍은 건국대로 진학하였다.

졸업 후 이재홍은 MBC 청룡에 드래프트되었으나,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 후 소리소문 없이 잊혀졌다. 참고로 이재홍은 프로 4시즌 동안 87경기에서 7승 17패 2세이브 ERA 5.67이라는 그냥 그런 기록을 남기고 31살로 은퇴했다. 프로에서는 8년간 뛰었으나 나머지 4시즌은 1군 기록이 없었다. 당시에 대졸 선수들이 길어야 10년 뛰고 은퇴하는 것을 감안하면 아주 못 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마 시절에 비해서는 한참 실망스러운 성적.


2.2.2. 선수 끼워팔기 입학, 기회인가 비리인가[편집]


야구계뿐 아니라 스포츠계에는 기량이 뛰어난 유망주가 입학하면 주위 대학에 갈 실력이 되지 않는 동기 선수들을 끼워 입학시켜주는 관행이 있다. 한양대로 간 구대성, 아주대로 간 안정환, 중앙대로 간 김영만 등도 그런 케이스이며, 이종범의 건국대행도 이런 경우.[5] 이는 꽤 오랜 시간, 아니 심지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관행이다. 그리고 1981년 이때에도 마침 건국대가 이재홍을 영입하는 대가로 신일고의 다른 동기생도 몇명 끼워서 입학시켜 주겠다고 제의해왔다. 김성근은 동기선수도 입학시킬 수 있는 건국대에 진학할 것을 요구한 것. 이에 대해 김성근 본인은 학생 야구는 인성, 의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의견이 상당히 엇갈리는 관행인데, 한국의 체육 엘리트 문화에서 야구뿐 아니라 고교까지 선수 생활을 지속한 선수들은 사실상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수준이 되는 경우가 많고, 해당 종목에서 조금이라도 더 성장하여 기회가 오는 순간을 연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그 시점에는 대학이든 프로든 지명받기는 모자라도 다시 올 기회를 연장하는 것이 선수들 개개인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순간이며, 이런 소위 끼워팔기 식의 관행이 조금이라도 선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이런 유망주 끼워팔기 식의 입학 관행은 야구에만 전념하다 앞으로의 길이 막막해져버린 선수들을 구원해주는 역할도 하였지만, 동시에 부유층 자제의 편법적인 대학 입학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즉 공부로 인문계 고등학교도 가기 어려운 부유층 자제를 운동부에 거액의 지원금을 내고 특기생으로 입학시킨 후, 운동부에 이름만 걸어놓고 해당 운동부의 유망주가 끼워팔기 조건을 제시한 대학에 입학할 때 끼워서 입학시키는 것으로 악용되었던 것. 특히나 당시에는 체육특기자로 대학에 입학하더라도 보통 경영학과, 정외과, 법학과와 같은 일반적인 학과에 배정이 되는데, 이러한 관행이 선수끼워팔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즉 끼워팔기로 대학에 들어온 부유층 자제들은 다른 운동부 학생들처럼 경영학과, 법학과 등 일반학과 소속으로 입학하게 되고, 입학 후 운동부 활동을 그만두고 일반학과 학생으로 재학하다가 졸업장을 받게 된다. 심지어 이러한 끼워팔기 관행은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어, 2012년 양승호 전 롯데 감독이 고려대 야구부 감독 재임 시절 해당 끼워팔기 관행 과정에서 청탁을 받은 혐의로 체포, 징역 1년 3개월과 벌금 1억원의 징계를 받은 바 있다. https://sports.news.nate.com/view/20121213n35280

동시에 프로야구 시대로 오면서, 동기를 구할 대학교를 가느냐 바로 프로로 가느냐의 문제 과정이 발생했고, 그 결과 희생되는 선수들도 나온다. 대표적인 선수로 강혁이 있다. 1993년 당시 강혁[6] 또한 OB 베어스와 한양대 양측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고, 처음에는 OB로 가기로 계약하고 입단식까지 마쳤으나 한양대 스카우트 시 같이 진학이 약속된 동기들과 부모의 회유에 마음을 돌려 한양대로 입학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OB 베어스가 괘씸죄를 들어 이중계약을 탄원했고, 강혁은 KBO에서 영구제명되어 대학 졸업 후에도 2년이나 지난 1999년에 이르러서야 프로 선수 자격이 복권될 수 있었다.

따라서 학부모로부터의 청탁이나 부유층 자제의 입학을 목적으로 이재홍을 막은 건지, 아니면 같이 한 선수들 중 대학을 가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조금이라도 야구 선수로서의 기회를 연장시켜주려고 한 것인지 당시 상황을 정확히 보지 않는 한 그 진의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이 사건을 계기로 신일고는 그간 학교와 충돌이 많았고[7] 성적도 기대했던 것보다 부진했던[8] 김성근 감독을 해임하였다.


3. 프로 시절[편집]




3.1. OB 베어스 감독 선임 : 김영덕 삼성 감독 선임 논란[편집]


근데 83년 후기리그때 '사건'이 생겼어. 새감독을 영입할 계획이 있던 삼성이 성근이를 살짝 만나 오라고 꼬신거야. 바보같은 성근이는 나한테 이 얘기를 했구. 음, 이후 내가 무슨 수작을 벌였는지는 말 안할께. 아무튼 10월25일 김영덕이 삼성 새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공식발표가 났고, 성근이는 자신으로부터 삼성감독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내가 사전 공작을 통해 자리를 빼앗았다고 믿고 이를 갈았지. OB 애들도 돈 때문에 내가 자기들을 헌씬짝 버리듯 내팽겨쳤다고 생각했고. 마침 성근이가 OB 감독이 되면서…… OB와 삼성은 만났다 하면 패싸움을 하는 사이가 돼버린거야.

김영덕, 한화 이글스 칼럼 #


1983년 10월 14일 김영덕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퇴임하고 김성근이 후임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영덕 감독과 함께 크게 구설에 올랐다.

우선 김성근 감독이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3년 시즌 중 삼성 측에서 김성근에게 5년 계약을 제안하였는데, 김성근은 삼성측에 “투수코치라면 유백만에게 맡겨보라”고 조언한 뒤 김영덕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코치 계약이 아니라 감독 계약이었다. # 당시 김영덕은 그런 자리가 있으면 나한테 양보하라고 말했다 하는데, 당시에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그것이 현실로 닥쳐온 것이다. 실제로 이후 김영덕 감독이 삼성구단에 접촉했고 결국 김영덕이 삼성 감독으로 갔다는 것. 사건이 발생한지 수십년이 지난 후 발간된 자서전 "꼴찌에서 일등으로" 등에서도 삼성이 자신에게 먼저 감독 제의를 했는데 김영덕이 삼성 감독 자리를 가로채갔다면서 분노하고 있다.

한편 김영덕 감독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원년인 82년에 팀을 우승시켰지만, 이듬해인 83시즌에 선수들이 줄부상으로 인해 전기 6위(최하위), 후기 5위, 종합 5위로 마감하자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당시 김영덕은 10월 14일 구단 측에 “박철순이 다친 것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겠다. 1년간 일본으로 건너가 야구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OB 박용곤 구단주는 일본 유학을 떠난다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김영덕 입장은 그것은 선수단을 다잡기 위한 성격이었고 설마 정말로 그만두게까지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구단 측에서 그를 해임하자 새로 감독 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삼성 측에 전화를 걸어 감독직을 타진했다는 것이다.

삼성 구단측은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당시 삼성 노진호 단장이 밝힌 바로는 1983년에 김성근에게 감독 의향을 물어 본 것 자체는 맞지만, 삼성은 당시 김성근 이외에도 김영덕 감독, 김진영 삼미 감독, 배성서 동국대 감독 등에게 감독 의향을 물어보는 등 광범위하게 감독 후보를 타진하던 중이었다는 것이다.

상황을 종합해 보면, 삼성 구단의 말대로 김영덕, 김진영, 배성서, 김성근 등 당시 감독 후보들에게 전반적으로 감독 후보를 타진했던 것이며 그 과정에서 김성근과 김영덕 모두 감독 제의를 받은 것은 맞다고 볼 수 있다. 근데 이 과정에서 김성근이 김영덕에게 자신이 감독 제의를 받은 것을 보고하였고, 이걸 본 김영덕이 재빠르게 자신에게 들어왔던 감독 제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김영덕의 말에는 오류가 있는 것이 10월 14일 감독 사임 의사를 밝혔고, 11일 후인 10월 25일 김영덕은 삼성과 감독 계약을 맺었다. 즉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1일만에 감독 협상이 되었을 리는 없으니 이미 막후 협상을 통해 계약 합의가 끝난 상태였던 것. 심지어 OB 입장에서는 1982년 후기 리그 때 김영덕에게 일본 야구 연수를 따로 보내주기도 했고 1983년 리그 종료 후 사임 때도 야구 연수 지원을 약속했던 만큼, 김영덕 자체를 버리는 카드로 본 것은 아니고 계속 같이 갈 사람으로 인지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즉 이 사건은 김성근의 말대로 김영덕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김성근의 자리를 가로챈 것은 아니지만, 김영덕이 김성근과 OB 베어스의 뒤통수를 친 사건은 맞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감독이 되었으니 서로에게 윈윈인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김성근은 "삼성이 나에게 먼저 감독 제의를 했는데 김영덕이 가로챘다"며 분노했고, 선수들 또한 김영덕을 팀의 배신자로 인식하며 분노가 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김성근-김영덕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OB-삼성의 관계도 4차 대전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앙숙 관계가 되었다.

1984년 시즌 초 3연전 마지막날, 당시 경기 중 OB의 신인 포수 배원영이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삼성 벤치를 향해 김영덕 감독이 가장 싫어하던 별명인 "변태"를 외치며 놀리자, 경기 후 김영덕 감독이 OB 덕아웃을 찾아와 따귀를 날린 사건이 대표적. 그 해 두 팀은 4차례나 신경전[9]을 벌이면서 4차 대전이란 별명이 붙을 만큼 대표적인 앙숙 사이로 자리 잡았다. 이는 결국 시즌 말미에 김영덕 감독이 한국시리즈에서 OB를 피하기 위해서 롯데에게 져주기 게임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3.2. 태평양-삼성 이적 : 임호균 각서 파동[편집]


김성근이 전성기가 지난 투수 임호균의 5승에 감독직을 걸었던 이유는 너무도 단순했다.

"사실 임호균이 없어도 됐지만 그렇다고 지켜만 보는 것은 나를 믿고 따르는 선수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었다."

김성근이 임호균의 5승에 감독직을 건 이유다.

- 김성근,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난다. 오마이스타. 오마이뉴스


태평양 돌핀스 시절 구단이 삼미 시절을 상징하던 베테랑 투수 임호균을 은퇴시키려 하자, 이에 김성근 당시 태평양 감독이 반발하여 각서를 썼다는 내용이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임호균이 5승을 거두지 않으면 자신이 감독직에서 사임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겠다고 버텼으며, 그전까지 쌓였던 감정도 안 좋았거니와 이미 정해진 상황을 되돌리려는 김성근 감독에게 반발한 프런트는 여기에 '선발로 5승'이란 단서를 달았다. 이 과정에서 프런트와 사이와 완전히 틀어진 김성근은 임호균을 단 한 경기도 선발 출장시키지 않았다.[10] 당연히 선발승도 0승. 여기에 태평양의 순위도 5위로 하락하면서, 김성근 감독은 계약 기간을 못채우고 잘리게 된다.

임호균 각서 파동은 당시에도 파장이 컸던 사건이다. 1990년 시즌 내내 이와 관련하여 야구계와 야구팬들 사이에서 각종 의혹과 소문이 무성했다. 시즌이 끝나고 마침내 김성근이 태평양 감독에서 경질되고 며칠 만에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자리를 옮기자 의혹은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고, 스포츠신문들이 앞다투어 임호균 각서 파동과 삼성과 김성근의 밀약설 등 의혹을 지면으로 보도했었다.


3.2.1. 김성근 측의 입장[편집]


우선 김성근 감독이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김성근 前 LG트윈스 감독」 <上> <中> 「기사: 김성근, 그에게서 '사람 냄새'가 난다」

1990년 시즌이 시작하기 전, 태평양 프런트는 노장 투수 임호균을 방출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실을 들은 김성근 감독은 이를 보고만 있는 것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선수들을 이끄는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신동관 사장실로 쳐들어가 '임호균이 90년 시즌에 5승을 하지 못하면 내가 옷을 벗겠다'는 각서를 쓰고 사장실을 박차고 나왔다.

시즌이 시작된 후 '김성근이 감독직을 유지하려고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는 경기에 임호균을 투입하여 승을 챙겨주려고 한다'라는 소문이 퍼졌고 이에 구단은 5승에서 선발 5승으로 각서내용를 수정했다. 김성근은 이에 반발하여 이후로는 아예 임호균을 기용하지 않음으로써 감독직에 미련을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예 임호균을 쓰지 않았지. 당연히 5승은 안 됐고."

시즌이 끝난 후인 10월19일 김성근 감독은 고향인 오사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던 김포공항에서 ‘태평양 김성근 감독 경질’이 적힌 신문을 보게 된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어. 구단에선 나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빛이 변한 걸 알았거든."


3.2.2. 미심쩍었던 각서와 임호균 인터뷰[편집]


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1989년 포스트 시즌의 돌풍으로 당시 김성근 감독은 몸값이 상한가를 치면서 여러 팀의 러브콜을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김성근도 인터뷰에서 대놓고 "삼성 같은 강팀 감독으로 가서 우승 한번 해보고 싶다"면서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김성근 감독은 아직 태평양과의 계약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임호균은 기량이 현격히 쇠퇴하여 1989시즌 동안 승리 없이 단 1세이브(1패)만을 기록했다. 헌데 이러한 임호균이 1990년 갑자기 5승을 거둘리가 만무했다. 실제로 김성근 감독이 각서 내용에도 불구하고 1990년 시즌 중에 임호균을 한번도 선발로 등판시키지 않자 이러한 소문은 더욱 파다해졌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사람들의 예상대로 김성근 감독은 태평양에서 경질되었고 며칠 후에 삼성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주간야구나 스포츠서울 등에서는 삼성과 김성근 사이의 배후 밀약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혹을 제기했다. 결국 김성근이 삼성으로 가기 위해서 태평양에서 일부러 짤릴 구실을 만들기 위해 임호균을 이용했다는 것. 따라서 이 당시에도 김성근 감독이 팀을 옮기기 위한 꼼수로 각서를 작성한 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였으며, 실제로 삼성그룹 수뇌부가 김성근이 삼성의 정신력을 개조할 적임자로 보고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어쨌든 이 각서 파동으로 김성근 감독은 경질되었고, 소문이 사실이건 아니건 며칠 후 김성근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한때 김성근에 열광했던 도원아재들은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김성근을 맹비난했다.

2012년 사건 당사자인 임호균이 MK스포츠와의 가진 인터뷰에서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전설을 찾아] 임호균, “김성근 감독 5승 각서 원하지 않았다” 下」 사실 이 인터뷰는 임호균의 야구인생 전반에 관한 인터뷰였기 때문에 각서 관련 내용은 짧게 다루어졌는데, 임호균은 인터뷰 중에 각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숨을 고른 이후 무거운 표정으로 현재 김성근 감독이 현역 감독으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에 말씀드리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다라고 말하면서 간단히 언급했다.

당시 임호균은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 이미 은퇴를 결심했고 구단에도 의사를 밝혔다는 것. 그리고 이미 유학을 결심했는데 김 감독이 붙잡아 한시즌 더 뛰게 되었다는 것이다. 임호균 본인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태평양 프런트가 임호균을 방출하려 했고 김성근 감독이 이를 반대한 끝에 각서까지 썼다는 김성근 감독의 이야기와는 상반된 내용이다. 이 인터뷰 기사는 큰 파장을 일으켰고 김성근이 삼성 감독으로 가기 위해서 태평양에서 짤릴 구실을 만들기 위해 임호균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재조명되었다.


3.3. SK 감독 경질 :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운동[편집]


SK 감독 경질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과 SK 프런트가 충돌하였고, 이는 한국 프로야구 팬덤 역사상 가장 큰 사건 중 하나였던 문학구장 소요 사태와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해당 사건은 KBO 역사상 프런트의 불합리한 행보에 대해 야구 팬덤이 집단 행동으로 대응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기록되었다.

다만 이 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흐지부지해지고, 그 결과 SK 와이번스 팬덤은 그래도 선수들이 있으니 응원하자는 온건파와 감독에 대한 절대 충성으로 뭉친 강경파로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강경파는 이후 노리타라고 불리는 김성근 감독의 맹목적인 추종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학구장 소요 사태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운동 참조.

[1] 기존 대건고와 철도고에서 뽑아왔던 선수들이 1학년까지 다 졸업했단 이야기다.[2] 신일고 야구부 창단이 1975년, 충암고 야구부 창단이 1970년으로 오히려 충암고가 더 빠르다. 4대 기전 기록을 보면 당시 신일고는 2회 우승, 2회 4강 진출을 기록했으며, 충암고는 1회 우승, 1회 준우승, 1회 4강 진출을 기록했다.[3] 김성근이 받았던 600만의 계약금은 당시 기준 집 한 채 수준의 값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김성근의 별명이 '600만원의 사나이'였다.[4] 1977년 봉황대기 우승 후 3개월 후 일어난 사건이다. 몇몇 선수가 한양대로 진학하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스카우트 비용이 공중으로 사라진 것. 당시 해당 인사가 김성근 감독에게 이를 건넸다고 둘러댔고, 충암고에서는 이를 믿고 김성근 감독의 파면을 통보했다. 결국 스카우트 비용의 배달사고 주인공은 김성근이 아니라 한양대 인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성근은 계속 충암고 지휘봉을 잡을 수 있게 됐다.[5] 이종범은 당시 자신이 그렇게 결정한 것을 자랑스러워한 인터뷰 사례도 있다. #[6] 아이러니하게도 강혁 또한 신일고 출신이다.[7] 같은 해 5월에는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김모 선수가 주전으로 기용되지 않은데 불만을 품자 김성근이 그를 야구팀에서 쫒아낸 사건이 있었다. 이후 학부모들이 학교로 찾아와 “아들이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정하는데도 김성근이 이를 계속 거부하면서 학교 측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8] 신일고 야구부는 75년에 창단된 직후 76년과 78년 황금사자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단번에 야구 명문고로 떠올랐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79~81년 동안 신일고는 4대 고교야구 대회인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은 커녕 결승에 단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으며, 4강만 2회 기록하였다. 그리고 임기 마지막해인 1981년 메이저 대회는 아니지만 화랑기에서 우승했다.[9] 4월 12일 따귀 사태 이후 5월 12일 맞붙었을 때는 OB 계형철과 삼성 김일융이 각각 상대에게 빈볼을 던지며 난투극이 발발했으며, 5월 14일 OB 양세종이 삼성 천보성의 머리를 태그하자 이를 무례한 행동으로 생각하고 반발한 삼성 측이 크게 항의하고, 삼성 팬들도 OB 선수들에게 병과 깡통을 집어던지면서 OB 구천서 선수가 그에 얻어맞아 이마가 붓고 코가 찢어져 병원에 실려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6월 2일 OB 1루 주자 이홍범이 삼성 유격수 오대석에게 달려들어 쓰러뜨렸다.[10] 아예 출전시키지 않은 것은 아니고, 중간계투로 7경기 등판, 승패 없이 평균자책점 4.60의 성적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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