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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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이야기


1. 개요[편집]


조선 중기의 시인. 다독가이자 노력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노력하는 사람의 표본. 생몰년도는 1604년(선조 37)~1684년(숙종 10) 9월 6일.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공(子公)이며, 호는 백곡(栢谷)·백곡노인(栢谷老人)·백옹(栢甕)·귀석산인(龜石山人) 등이다.

할아버지가 진주 대첩의 명장 진주목사 김시민이며,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金緻)다. 다만 김치는 본래 김시민의 형인 김시회의 아들인데 생후 김시민의 양자입양되어 가문을 이었다. 1604년 충청도 청안현 삼성당(현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내성리 삼성당)에서 태어났다.#


2. 설명[편집]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았으나 다행히 살아남았는데, 그때 손상을 입었는지 심하게 아둔했다고 전해진다. 10살이 돼서야 글을 깨우쳤고 그 기억력이 뒤돌아서면 모두 잊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독려와 가르침[1]으로 극복하여 20세에는 처음으로 글을 지었고, 1642년(인조 20) 39세의 나이에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1위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1662년(현종 3) 59세의 늦은 나이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 19위로 급제했다.# 1669년(현종 10)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르고 안풍군(安豐君)에 봉해졌는데, 얼마 뒤 사직하고 충청도 괴산군 능촌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독서재 취묵당(醉墨堂)을 짓고 시(詩)를 지으며 살았다.

여기서 일반적인 극복이랄 때는 책을 몇 번 더 읽는 수준이겠지만, 득신은 읽는 횟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 백이열전(伯夷列傳) 부분을 1억 1만 3천번 읽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부인이 먼저 죽어 장례를 치르는데 곡은커녕 백이열전 읽는데 여념이 없었다고 했다.[2][3] 참고로 당시에는 '1억'이 지금의 1억(10,000의 1만 배)이 아닌 지금의 10만을 나타내는 단위였다. 곧 현대 기준으로 11만 3천 번 읽은 것.

특히 글을 잘 지었다고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계기는 한문(漢文)의 4대가 중 한명인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극찬 덕분이었을 정도다. 그의 시를 접한 이식은 김득신에게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평했다.

1684년(숙종 10) 9월 6일 도적의 무리인 명화적에게 살해되어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저서는 《백곡집》 등이 있다.

굉장히 오래 살았는데,[4] 그만 마지막에는 재물을 노린 화적떼 손에 피살당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그 화적떼가 사실 집안의 노비로 평소 김득신에 앙심을 품고 일부러 계획했다고 한다. 이 비보를 들은 숙종은 충격을 받고 토포사로 하여금 화적떼를 토벌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묘소는 증평군에 있으며 증평군에서 김득신 백일장과 김득신 기념관 등 그를 기념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3. 이야기[편집]


아버지 김치가 생전 점을 잘쳤고, 민담에서 염라대왕이 됐다는 설화가 있어 김득신도 아버지 관련 설화에 잘 등장하고, 본인도 천연두 후유증으로 건망증이 생겨 그에 대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굉장히 많다.

  • 늙은 마부가 이제 나이들어 은퇴하게 퇴직금으로 먹고 살 전답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김득신은 그 자리에서 가멸차게 거절하고 마부는 실망해 뒤돌아가려던 찰나, 백곡이 다시 불러 퇴직시켜주고 전답을 내려주었다. 주위 사람들이 왜 아까는 안주고 이제야 주냐는 질문에 백곡 왈, 늘 마부가 말을 끌어 뒤통수만 보다보니 정면 얼굴은 잊어버렸다고.

  • 역시 마부에 관한 이야기. 말을 타고 집에 돌아가던 중 시를 읆는데 마지막 문구가 도통 생각나지 않더란다. 그런데 마부가 뒤이어 구절을 읊자 득신은 감탄하면서 "야 니가 말에 타라"며 자기가 고삐를 쥐고 마부를 말에 태우는데 마부가 득신이 늘 읊던 당시(唐詩)가 아니냐며 웃자 이마를 탁 쳤다고 한다. 하인조차 질리게 들어 외울 정도면 반복 학습의 끝판왕이다.

  • 어느 날 굉장한 명시를 하나 우연히 읽게 되었다. 백곡은 그 시를 암송하기 위해 되풀이하며 읽었는데, 친구가 와서 그 시를 지은 사람은 바로 백곡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자신이 쓴 글도 잊어버린 것이다.

  • 친구의 집에서 시회가 열려 백곡은 말을 타고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제를 생각하느라 말을 모는 것을 깜빡 잊었고 말은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리기만 했다. 마침 백곡의 집에 다니러 온 처조카가 말을 몰고 집으로 들어오자 백곡은 부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의아해진 백곡은 "아니, 부인이 왜 이집에 와 계시오?"라고 물었고 부인은 "여긴 영감 집이외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백곡은 "내가 언제 시회를 끝내고 돌아왔지?"라며 황망해했다.

이처럼 그는 노력하는 사람이자 다독가의 표본으로서 천재교육 기준 중등 국어 2-1와 5-2 국어 나 교과서에 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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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설에 따르면 득신이 태어날 즈음에 부친이 자기 집에 노자가 다시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때문에 아버지는 노자의 환생이니 무엇이든 큰 인물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아둔함에 혀를 차면서도 아들을 격려했다고. 이러한 끈기 있는 학업 덕에 김득신은 만년에 시인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2] 그래서 그의 서재 이름은 억만재(億萬齋)였다. 물론 이 숫자가 안 좋은 기억력만으로 나온 숫자는 아니다. 좋은 글은 몇 번 더 읽는 독서광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습관이 겹쳤기 때문이다.[3] 그밖에도 한유의 <사설>은 13,000번, <악어문>은 14,000번, <노자전>은 20,000번, <능허대기>는 25,000번을 읽었다. 그렇게 많이 아니 셀 수 없을 수록 읽었는데 좋지 않은 기억력 때문에 이게 무슨 책이지 라고 생각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여든까지 살아 아내와 딸을 먼저 보냈는데, 장례식장에서도 하라는 곡은 안 하고 책에 푹빠져 읽고 있었다고 했다.[4] 70대 시기에 그 악몽같던 경신대기근 시기를 겪었음에도 생존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 인구의 10%가 사망했을 정도이니 가히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