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초/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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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가 웅(熊)씨
2. 주요 명가
2.1. 소(昭) 씨
2.2. 경(景) 씨
2.3. 굴(屈) 씨
2.4. 장(莊) 씨
3. 기타


1. 왕가 웅(熊)씨[편집]


역사대로 산적에게 죽은 것이 등장의 전부인 스레 시작 시점의 초왕...

스레 시작후 두 번째 초왕.
아버지가 산적에게 죽어버렸지만 자신의 기량만으로 이로써 야기되었어야 할 혼란을 진정시키는데 성공한 걸물이다. 그러나 국운을 걸고 월나라의 귀족들과 합세하여 월의 내전에 개입했는데, 이것이 제-노-송-월 연합[1]이 참전한 국제전의 양상이 되버리며 일이 틀어졌고, 이 결과로 사로잡혀 낙양에 유폐된다.

스레 시작 후 세 번째 초왕.
어머니 시절에 말을 잘 듣던 지방세력이 자신의 말을 안 듣는 것 때문에 이릉으로 천도한 이후 멘붕한 즉위 초기를 보냈었지만 무산 탈환을 계기로 어느 정도 정신차리고 정무를 돌보았으나, 하필 지방 순시 중 무산에서의 일정을 소화하다가 마침 쳐들어온 파나라 군대에게 사로잡히는 결말을 맞았다. 이후 초나라는 귀족들에게 애초에 군주로 더 적합하다고 여겨진 웅량부가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한다.[2]

스레 시작 후 네 번째 초왕.
역사와는 다르게 웅장을 최대한 끝까지 지켜보려는 태도를 보였지만 순시 중에 파나라에 붙들린 것을 계기로 형 대신에 초의 왕좌를 차지한다.[3] 국가 자체가 실질적 공중분해 상태였던 초나라를 대초의 기상으로 어떻게든 원상태로 재건한 인물. 그러나 말년에 제후 전인제의 기에 눌린 것을 시작으로 진을 치는 등 갖가지 추태를 보였는데, 그 원인을 알아보니 노망이었다(...) 결국 초위왕 웅상과 경사에 의해 의도적으로 늦은 지원이 원인이 되어 파왕의 친정군에게 휩쓸리듯이 전사.

스레 시작 후 다섯 번째 초왕.
웅량부가 후방 개척에서 실책을 내고 이때 실질적으로 상실할 인력을 방관하였을 때 최초로 등장하였다. 점점 총기를 잃어가는 판단을 보이는 웅량부를 보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판단 끝에 그를 없애고 자신이 초왕이 될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파나라의 진공을 기회로 하여 초왕을 일부러 방치한 뒤, 뒤늦게 달려와 그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이었지만, 진짜로 구원전이 될 상황까지 초왕이 밀려버렸고, 결국 왕을 척살한 파군을 쳐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파나라 군도 친정에다가 초왕을 노리는게 가능할 정도의 정예병으로 파고든 공격이었기에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수준의 피해를 본 찝찝한 성공을 거두었다.
다만 이 아비규환에 뛰어들어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온 점이 초의 대소신료와 민중의 마음을 사서 인정받았고, 이후 소해휼과 오랜 악연이 있는 강을의 목을 쳐서 소해휼과 그 딸 소양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전대 초왕이 벌였던 진나라 방면 공세의 사후 처리를 하고, 웅량부가 잃어버린 개척민들을 다시 초의 휘하로 되돌리는 등의 활동을 보였다.
진나라의 서하 병탄 전쟁의 소식을 듣고 제나라의 패권이 별 볼일 없다는 판단을 내렸으나[4] 이후 고토 회복을 인정하지 않는 패자 전인제에게 단단히 분노하여 대 초나라 합종군을 맞게 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사실상 전통적인 관계였던 북쪽의 국가들을 거의 홀로 맞상대하는 처지를 극복하는데 여생을 쏟았고, 이 비원은 그녀의 사후 전인제와 패자 체제가 주를 배후에서 조종한 초의 적절한 공작으로 파괴되면서 일부 달성되게 된다.
메타적으로 이때부터 소,경,굴의 삼대세가와 왕실의 결속이 강해져 거의 무조건적인 충성을 받아내지만 동시에 그외의 인재들은 소외당하는 풍토가 만들어져 명암이 갈린다

스레 시작 후 여섯 번째 초왕.
어머니가 악전고투한 것과는 달리 어장 내에서 달라진 역사의 수혜자라면 수혜자이다. 그리고 좋게도 나쁘게도 이 어장에서 손꼽히는 바보다.[5] 참치들과 조선에 불리하게 흘러갈 때마다 펌블을 내서 상황을 일변시켜주는 덕분에 조선제이외교관이란 별명도 존재한다(...) [6]
하지만 실적을 보면 파촉을 굴복시키고, 제, 송, 한의 지원을 받은 월나라 유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플레이어 조선도 탐탁찮게 생각했고, 어머니의 숙원을 이어받아 제나라 체제를 끝내는 등 상당히 굵직한 업적들을 많이 세운 왕이다. 또한 감정적인 면모는 중앙집권화가 지형상 힘든 초나라에서는 오히려 플러스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반란의 상흔이 낫지도 않았는데 사신을 죽이는 모욕에 눈이 뒤집어져서 초진전쟁을 일으키고 이후 몇십 년 가까이 강동을 방치하는 등 내치에서는 불리한 성격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는 명암이 확실하게 갈리는 인물.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장 내 초왕 중 가장 초를 강대하게 만든 왕. 덕분에 원역사와 달리 성왕이라는 최고급의 선시를 받았다.
죽고나서 얼마 안가 조선이 대대적으로 반격을 개시하고 합횡을 뒤흔들어서 죽는 것까지 운이 좋았다는 평가도 받는다.

  • 초양왕 웅횡(AA: 다크니스(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7]알트리아 펜드래곤[8])
스레 시작 후 일곱 번째 초왕. 웅괴에 비해 더 호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세력을 강화하는 조선을 견제한다. 이를 위해 상구 전투를 계획하였으나 경취가 패배하며 실패. 다음 다시 한 번 관중과 임치 양 쪽으로 쳐들어가며 양면전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 종횡대전에서도 큰 성과없이 패배하여 사상 처음으로 어전에서 경씨가 완전히 경질되고 초왕의 발언권을 비롯한 권위가 손상이 있었기에, 그리고 어머니 대에서부터 조짐이 보인 대초의 기상의 한계점이 그녀 대 들어 점점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치세에 먹구름이 끼는 건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결국 장교의 난이 초기진압에 실패하며 왕족분봉의 형식으로 강동후라는 휘하 자치 세력을 신설하게 되었지만, 본래의 초나라 기풍대로라면 굴씨가 그 잘못을 뒤집어 쓸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굴씨의 마음을 얻었... 긴 한데, 장교의 난을 시작으로 난이 툭하면 일어나는 수준으로 빈발하는 통에 나라의 모든 여력이 갈 수록 날아가고 있고, 특히 군사력이 상잔을 거듭한 끝에 일개 한중 군수의 그것이 중앙군과 맞먹어가고 있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다가 거양 전투에서 초군이 패배한 것도 모자라 뒷수습을 위한 연종에서 초나라가 송나라에게 거양을 돌려받는 대신 사죄하는 사절을 보내라는 판정이 나오자 이도저도 못한 대응을 보인 끝에 초의 또다른 정예군이 주둔하던 남양 일대가 외교적 실추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켜 일시적으로 수도를 포기하고 파천하는 상황에 이르렀고[9] 반란 진압 이후 가장 큰 공을 세운 한중군을 오히려 홀대하고 측근세력이라고 소경굴 삼대세가만 챙겨주는 어처구니없는 논공행상을 하는 것도 모자라 한중군에게 수도 인근에 남아 있던 반란군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리자[10] 결국 폭발한 황헐에게 유폐당하게 된다.[11]
결국 황헐의 마지막 배려로 독이 든 곰 발바닥을 먹고 왕으로서 자결에 가까운 형태로 사망. 공식적으로는 병세 악화로 인한 사망으로 발표되었다.

웅횡의 장녀로 스레 시작이후 여덝번째 초왕이자 원역사의 고열왕이다. 어머니인 웅횡이 병사[12]하자 왕위에 오르지만 실권은 숙모인 황헐에게 있기에 사실상 허수아비 신세다.
이런 이유로 함양회맹 당시에는 상주로써 불참했다.

2. 주요 명가[편집]



2.1. 소(昭) 씨[편집]


  • 영윤 소해휼[13](AA:하고로모기츠네)
초나라의 재상. 초선왕 웅량부의 최측근이자 명문 소씨 가문의 당주다. 웅량부 시절 강을과 역사대로의 앙숙관계를 형성하였는데, 대표적인 예로 월나라의 조선을 겨냥한 2번의 무례 끝에 초선왕이 제나라와의 거의 성사 직전이었던 동맹을 재고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친위 성향이 잔존하였던 강을이 초선왕 량부의 신임을 얻는 것을 방지하고자 조선이 동맹 제의를 위해 공손기를 보냈을 때 선수를 쳐 대접하고 량부에게 데려갔을 때는 의견이 강을과 동일해졌음에도 벌인 행동일 만큼의 사이였다.
초선왕 웅량부의 판단이 점점 영민함을 잃어갈 때에도 그 덕분에 완전히 산산조각났던 초나라가 다시 제 모습을 찾았음을 이유로 가장 끝까지 량부를 신뢰해준 신하이나, 결국 진나라의 상 지역을 친정하려는 것을 극단적인 발언까지 써 뜯어말린 뒤 총대를 매고 뛰어들어가 영거량-손빈 콤비를 상대로 공성전을 벌여 대략 40%에 해당하는 숙련된 징집병을 잃고 살아돌아오는 선전(?)및 이를 문책당한 파직을 끝으로 웅상의 반역 행위에 다른 소귀족들과 함께 방관하게 된다.[14]
이후 웅상으로부터 앙숙이었던 강을의 목을 선물받은 것을 계기로 자신과 그 딸 소양이 웅상에게 충성할 것임을 선언하고 웅상이 사망하기 전에 사망한다.

  • 영윤 소양[15](AA:타마모노마에(Fate 시리즈))
소해휼 다음 대의 소씨의 당주로 웅상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녀의 최측근으로써 활약하였다. 주로 외교부문에 활약하였지만, 군사적 재능도 있어 월나라와의 전쟁때 수군을 이끌고 월수군과 연이어서 접전을 펼치고, 최후에는 월수군을 격파하여 도하중이던 월육군을 물고기밥으로 만들어 월이 멸망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웅상의 죽을때 태자 웅괴를 부탁받은 고명대신으로 웅괴가 어렸을때 섭정역할을 맡았다.[16][17] 남양대전의 교훈으로 단독으로 화북의 모든 국가들과 상대할수 없음을 깨닫고, 패자체제의 전인제를 패자의 자리에서 끌어내기 위해 마찬가지로 전인제를 경계하던 영사와 모의하여 주나라를 통해 전인제에게 모욕을 주어, 이에 분기탱천한 전인제가 스스로 패자체제를 분쇄하게 만드는 위업을 달성한다. 그러나 이후 화남대전이 터지면서 고생했고, 왕과 너무 친하던게 독이 되어 결국 초의 여력을 깎아먹을 전조가 된 무관할양 요구를 막지 못했고, 굴원이라는 자기의 후계자격 인재를 잃었다. 산동대전 직전에 초의 힘을 많이 쓰는 방향으로 두혁이 협상을 해오자 격분한여 화를 내다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사리에는 맞지만 아무도 안 지킨 초의 본체인 강한의 여력이 없으면 나라를 걸어잠그고 쉬어라는 말을 남겼지만, 후임인 경리부터 깔끔하게 무시했다(...).[18]

소씨 일족의 일원. 월 멸망후 말릉을 담당 월 부흥군의 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있었지만, 평소 그녀를 시기하던 소관성주가 그녀의 지원요청을 도중에 묵살해버린 탓에 외부지원없이 싸우게되고 결국 말릉을 내주고 후퇴하게 되었다. 뒤늦게 월부흥운동을 알게된 초조정에서 굴개를 급파하고 굴개와 더불어서 월부흥군에게서 말릉을 되찾지만 한낱 반란군에게 말릉을 내주었다는 죄목으로 어전에서 당주 소양에게 죽기직전까지 얻어터지고 굴개와 굴원이 말려주어 간신히 살게된다.[19] 소양은 소어를 삭탈관직하고 지방으로 유폐보낼 생각이었지만, 굴원이 변호를 해주어서 최전선 기사로 발령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때 굴원에게 쫗겨나 오갈데없던 장의를 고용하여 함께 기사로 향하였고, 훗날 굴개가 수춘성을 공략할때 부관을 맡아 혁혁한 공을 세워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장의를 웅괴에게 소개하였는데, 이탓에 굴원이 진나라에서 죽고 진초전쟁이 벌어져 장의를 추천한 죄로 수춘현령을 맡게되었다. 이후 주욱 수춘을 담당하였고 상구대전때 은퇴... 하였지만 장교의 준동에 현지에서 자체 대응이 불가해지면서 본국에서 파견된 진압군을 맡게 되었으나, 기적에 가까운 장교의 선전[20]으로 결국 초기진압에 실패하는 불명예로 끝나고 말았다.
남양의 난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떴다.

소위 사자신중충의 소활. 수춘을 직할령으로 만들던 굴원에게 불평하는 모습으로 등장, 무관성주의 배신을 이용해 무관을 점령하고 상까지 점령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진나라 내전 때 4만의 병력을 이끌고 2만의 조선군과 맞붙는 중 조옹의 우군 몰빵이라는 초원식의 변칙적인 전술과 조선 기병과 흉노의 창기병의 엄청난 성능에 휘말려 대패, 본인도 그곳에서 죽었다.
이후 초나라에서 조선 기병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남았는지 조선 기병에 대한 대비를 말하면서 자주 언급되기도 했다.

초나라의 상식인. 자주 감정적으로 급발진하는 여러 대신들을 말리는 일을 도맡아 했다. 굴원 등의 유망주 사후 굴씨가 소강상태에 있는 동안 경씨가 군부를 장악하는 동안 내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입장과는 별개로 종횡대전에서는 아무 성과도 없이 가능성 있는 관중전선을 포기하면 누가 초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냐는 논리로 경씨와 왕을 설득했다. 두 갈래의 합횡군 중 관중침공군을 경취와 함께 이끌고 갔으나 촉의 배신으로 참패하여, 그 책임으로 어전에서 자리를 잃었다.

신세대 소씨. 상구대전에서 경취가 패하자 경씨가 무관을 소씨가 문관을 장악하던 상태에서 불만을 품고 소씨도 무관의 일을 할 것을 말하며 등장. 그런데 어째 합종대전의 여파로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조선행 사신으로 임명되고, 연종회맹에서 초왕의 보좌로 낙점되는 등 기존부터 가문의 담당영역이었던 대외정책이나 중앙 내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족이지만 여우 수인판인 소씨들 중에 유일하게 인남캐다
장교의 난 당시에는 추가 진압병력 편성에 즉시 난색을 표하면서 초의 내부상태에 대한 적나라한 지표가 되었다.

2.2. 경(景) 씨[편집]


  • 주국 경사[21](AA:누라 리쿠오)
월나라가 돈으로 사들인 강역을 초선왕이 되찾을 때 쯤에 처음 등장하였다. 이때 기책이고 뭐고 초나라의 힘 그 자체를 믿는 구석으로 하는 방침, 일명 대초의 기상을 딱히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는 등의 초나라 군주의 자질에 대한 자신의 철학도 드러낸다.
점점 맛이 가는 듯한 웅량부의 행보에 가장 빠르게 불만을 키웠으며, 자연스럽게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당시 태자 웅상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웅상 시절에 크고작은 전투에서 장군으로 활약하였으며, 소해휼과 함께 웅상이 죽기 전에 명을 다하였다.

통칭 중원제일명장.
처음에는 전반의 위험성을 말할 때 등장해 자신이 전반을 꺾어보겠다는 호기로운 인상을 남겼다. 이후 강동의 대부분을 점령당하는등 상당히 화남대전에서 몰려있던 초나라를 멱살 잡고 캐리해서 초나라 서쪽 끝 부분인 완에서 강동 끝까지 움직이며 초나라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다 초진전쟁에서 무관을 점령하고 함양의 코앞인 남전에서 네임드인 영질을 몰아붙이고, 제나라의 지원으로 제나령이였던 음진에서 나온 전반도 후퇴시킨걸로 모잘라 후퇴한 전반을 추적해 무찌르는 쾌거를 세우며,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된다.[22] 합종군 때는 신들린 운용으로 흩어져있던 수춘 일대의 병력을 집결시켸 도도를 패퇴시키는등 군사면에서는 엄청난 위업을 세웠다.
하지만 한을 공격할 때 아슬아슬하게 위장의 페이크에 속아넘어가는 굴욕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군사면에서 최고의 성과를 보이고 호전적인 면모도 있지만, 진나라 왕위 계승전쟁에서 군대를 더 보내는걸 말리고 한타를 걸어볼려는 웅괴를 말리는등 의외로 신중한 면모도 있다.[23]
이후 하남대전에서 대활약, 곽전이 주장, 염파가 부장으로 있는 조선 최정예군 14만[24]을 합종군 17만으로 요격했는데, 서전에세 조선기병의 기세에 밀려 피해를 보았지만, 작은위가 이반하여 합횡측에 붙었다는 소식에 조선군이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반격하여 대승을 거둔다.[25] 이 엄청난 위업으로 중원제일명장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고 열국에서 이를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26]
2차 중원대전때 한나라의 배반으로 소식이 끊겨 무슨일이 일어난지 모르고 있었을때 오직 경취만이 감으로 심상치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서 개인적으로 첩자들을 풀어 사태파악에 나섰다. 이후 위의 전령을 통해서 전쟁을 확인하게 되지만 이때 사실상 대전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기에, 증원보다는 합횡 가맹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다독여야 한다고 진언하고 스스로 송과 제로 향하여 이들이 이탈하지 않게하였다.[27] 이후 웅횡의 명으로 배신한 한을 응징하기 위해 거양과 상채를 점령하였다.[28]
이후 다시 조선군을 유인하여 타격을 입힐 목적으로 계획된 상구전투에서 초제연합군을 이끌고 조사가 이끄는 조선군과 격돌했으나, 접전끝에 패배하고 만다. 자신이 졌다는 사실에 웃으면 안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호쾌하게 웃으며 적장 조사를 칭찬하며 물러났다. 경취의 첫패전이었고[29] 이 여파는 대단하여 초조정이 패전 소식에 패닉에 빠졌다.[30]
남정군수 장신이 독단적으로 진창을 점령하여 초조정에서 어떻게 움직여야할때 평화를 주장하였지만, 대부 소서의 설득에 전쟁쪽으로 의견을 바꾸고 소서와 더불어서 관중침공군을 맡게되었다. 위수에서 사마착과 신차가 이끄는 진한연합군을 대파하였지만, 때마침 등장한 악의의 조선군때문에 추격하지 않고 위수 남쪽 지역[31]으로 퇴각한다. 이때 형세가 초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총사령관인 소서에게 연종과 협상할것을 진언하지만, 소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리한 형국에서 벌어지는 전투였던 만큼 경취가 온 신경을 전선에만 집중한탓에 촉에 대한 감시가 느슨해졌고, 결국 2차 위수전투에서 전투시작과 동시에 촉군이 배반하여 후방을 공격하고 진과 조선군의 협격을 받아 큰 피해를 받으며 남정으로 퇴각하였으나 그러면서도 최대한 여력을 남기기 위해 난전을 이용해 최소한의 피해로 전장을 빠져나오고, 진창을 지키던 항연에게 산관도 포기해도 된다 말하는등 저력을 보여주었다.
상구에서 연이은 대패로 임치전선을 맡고 있던 영윤 경리와 더불어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32] 자택에서 근신하고 있었지만, 곧 황헐에 의해 복귀하고 남양일대를 담당하게되었다.[33] 그러나 복귀한지 얼마 안있어 기원전 288년 자신의 집무실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죽기전 굴원이 남긴 시 천문(天問)을 읽은 후 천하의 패권을 잡은 조선과 조국 초를 비교하며 무엇이 다르기에 하늘이 조선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스스로 묻고답하며 남긴 말이 있으니
余甚惑焉(여심혹언), 나는 심히 당혹스러우니
儻所謂天道(당소위천도),만일 이것이 하늘의 도라고 하는 것이라면
是邪非邪?(시야비야) 정말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34]

경씨 일족 일원으로, 첫등장은 소어가 수춘지역 전봉시 자신을 보좌해줄 인재를 찾을때 등장하였다. 수춘에서 소어를 보좌하고 있다가 조정에서 동쪽방면에 큰일이 없으니 수도와 서북쪽에 집중할 생각으로 그를 방릉에 부임시켰다. 같은 일족인 경결이 지키는 상용이 위험해지자 방릉에 주둔하고 있는 5천을 이끌고 허장성세를 부려 진장 사마착을 물러나게 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경씨 일족 차원에서 천거한 소진이 대 진나라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자 가문의 근신이 풀려 명을 달리한 경취와 사실상 실각한 경리를 대신해 어전에 들어왔지만, 이러한 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에 스스로 발언권을 잃었다(...)[35]
명문 무인가문인 경씨 출신이지만 상용전투 이후 보여준 행보는 꽤나 무능했다. 2차 장교의 난 당시 보인 기벽[36]에도 불구하고 장교를 패망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민월과의 협상이 결렬되는 과정에서 민월마저 제압하려다 전염병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패퇴하였고 남양의 난 막바지 잔존 반란군 제압을 위한 경릉성 전투에서 반란군이 수성을 택하자 자기들이 이겼다며 자신만만해 하지만 끝끝내 성을 점령하지 못하는 추태를 보였다.
이후 황헐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을때 소씨와 더불어 협조하였으나, 조선의 분국 제안에 황헐이 군말없이 받아들이것에 반발하여 폐위된 웅횡을 복권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소씨와 경씨를 감시하고 있던 황헐에게 발각되어 실각하였고, 이후 경씨는 분국할 절나라의 왕씨로 살아가게 되었다.

경씨 일족 일원으로, 첫등장은 소어가 수춘지역 전봉시 자신을 보좌해줄 인재를 찾을때 등장하였다. 진이 순양을 점령하면서 상용이 위험해지자, 이를 보강하기 위하여 상용으로 부임한다. 초가 순양의 진군을 유인할 전략을 수립하고 경결은 상용에서 일군을 이끌고 서성을 공격하여 순양을 방위하고 있던 사마착을 유인하였다. 진군을 상용으로 유인한것 까지는 좋았지만, 사마착의 빠른 기동과 맹공으로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고 상용도 함락직전까지 갔었으나 다행히 같은 일족인 경양이 지원을 와줘 간신히 상용을 지킬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작전이 실패하여, 파직당하고 집안에서 백수신세가 되었다.
오랫동안 등장하지 않고있다가 종횡대전 이후 다시 등장하여 경씨가 가문 단위의 근신처분을 받은 관계로 자신의 국내 출사길이 막혀 한나라에 임관을 시도했지만 사마착에게 거의 밀릴 뻔한 것을 구원받은 게 전부였던지라 반려되었다.[37]

소양이 말하기로는 수성의 인재지만 창성애는 약하다고 한다. 이때문에 굴평의 대타로 들어왔을 때 질투의 감정을 내뿜으며 산동대전에 참여를 독려했다.
진나라 내전에서 경취를 대신해 영윤이 되고[38], 하남대전에서 승리한 후 고토를 찾을 방법이 없다고 소양의 묘에 가서 한탄해서 소수를 당황하게도 만들었다.
종횡대전에서는 임치방면침공군 사령관을 맡았지만[39], 치수전투에서 염파의 돌격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초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안평전투에서 조선군의 전력을 깎아내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지킬 수 있던 안평을 놓치기도 했다. 하필이면 경취는 반대로 힘을 아끼려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본인까지 이 책임으로 어전에서 자리를 잃으면서 웅상 이래 처음으로 어전에 경씨가 전무한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2.3. 굴(屈) 씨[편집]



원역사적으로 오기와도 동시대 사람이지만, 여기선 그 오기가 위나라에 남은 탓에 등장이 한참 뒤인 한나라의 초나라 영역 이반시도 때가 되었다.[40] 이반하려는 지역을 다독여 피해를 최소화 하였고, 이후에도 조용히 활약하였지만 남양대전 당시 합종군을 맞이하는 장성전투에서 지휘중 송나라 공자 대언에게 전사한다.

초나라 장군으로 경취의 한세대 위의 인물로 오랫동안 초를 위해 싸운 숙장이다.[41]. 웅상의 제위기 남방개척 전투때 등장. 이전 남양대전으로 숙련병을 대거 잃은 상황이었기에 굴개가 지휘하는 병사들의 훈련도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전하여 남방 이민족들에게 승리를 거두지만, 지역유지에는 실패하여 본국으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크고작은 전투에서 활약하였으며, 기원전 332년 수춘전투[42]에서 수춘성 내부의 송군과 지원온 한군을 거짓퇴각으로 유인하여 포위에 성공 송한연합군에 큰피해를 입히는 공훈을 세웠다.[43]
월 부흥군이 말릉 및 구 월지역을 장악하자, 중앙군을 이끌고 이를 무사히 진압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공으로 삼려대부자리에 오른다.[44]
그리고 제위왕 전인제가 죽은 직후 벌어진 7차 수춘전투에서 난공불락의 수춘성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여 초나라가 화남 전역을 수복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런듯 굴개의 앞길은 꽃밭과도 같았다.
그러나 일족의 기린아 굴평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참살되는 사건이 벌어진 후 굴개는 내리막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일족의 복수에 눈이 뒤집혀 굴평을 죽게한 장의를 노리다가 장의가 진나라 사신으로가서 죽자 이번에는 굴평을 죽이도록 명령을 내린 영질을 노렸다. 경취가 남전전투에서 진제연합군을 격파하고, 다시 두현전투에서 전반을 꺽은 후 영사와의 협상을 통해서 영질을 초나라로 압송하는 과정에서 평소 굴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병사들까지 대동하여 호송군을 급습. 본인도 경취와 칼을 나누었고, 방어선을 돌파하여 영질 앞에 다다랐다. 이 광경을 지켜본 영질은 자신이 죽인 굴평의 시[45]를 부르며, 비꼬자 그자리에서 영질을 참살하였다. 초왕의 명령에 의해 중앙으로 압송 중이던 사람을 강제로 탈취해 베어버린 지라 본인 또한 그 죄의 무거움으로 인하여 기원전 316년 영성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46]

굴씨가문의 일원으로 당시 영윤이었던 소양이 일찍이 후계자로 점찍을 정도의 뛰어난 인재였다. 인망이 좋아서 초나라내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고,[47] 시문에 능하여 여러 작품을 남겼다.[48] 조선과 제의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하여 둘사이의 이간질을 시도하였고, 강동평정 이후 일부지역을 군주 직속지역을 만들어 초나라를 삼대세경가의 연합정권이 아닌 왕이 지휘하는 중앙집권적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장의의 세치혀에 놀아난 웅괴가 동맹국 진나라에게 무관을 요청하는 사신자리에 스스로 자원하여 진나라에 갔지만, 마침 제나라의 동맹요청을 거절하고 초와의 의리를 지킨 진 조정 입장에서 초의 요구는 배신과도 같았다. 결국 화가 극도로 오른 영질의 명에 의하여 기원전 318년 함양에서 참수당하게 된다.

대초우월주의가 만연한 초나라 내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이를 추종하는 성향을 보이는 이로, 초인 외의 모두는 다 개개의 차이에 상관없이 하등종족(...) 취급을 하기에 능력과는 별개로 동초(구 월나라령) 정무에서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신진파 굴씨. 경씨가 군사를 소씨가 내정을 돌보는 현 초나라의 상태에 불만을 품고 소서와 함께 등장.
오랜만에 나온 굴씨 신인재이다. 안 그래도 굴평 때부터 이어진 오랜 기간의 주요인사 부재와 본래 초나라에서 해왔던 역할 때문에 상대적으로 세가 약하던 것을 이 기회에 끌어올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굴위의 의견에 편승해 강동의 지원을 주장했고 이루어냈지만, 초나라 조정이 경취의 죽음으로 인해 남양 방면 경계에 힘쓰면서 본의 아니게 강동이 완전히 끓어오르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일로 본디 굴위를 비롯한 굴씨에게 그 책임의 화살이 쏟아질 것을 초왕이 몸소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며 그러한 왕과 함께 걸어가줄 걸 호소한 것에 기꺼이 응하였다.
이후 초왕 웅횡의 근왕세력으로서 반란이 난립할 때 수도까지 위협한 베이더의 반란군을 격파하는 등 제일 큰 충성심을 보였지만 동시에 폐쇄적인 삼대세가 체제를 지키려는 면모를 보였고, 황헐이 쿠테타를 일으켜 초왕을 유폐하자 다른 삼대세가와 달리 반발하여 숙청당한다.


2.4. 장(莊) 씨[편집]



초 장왕의 후손. 방치된 강동을 도맡아 돌보던 인재.
처음 등장부터 삐딱한 태도를 보이며 무언가 야망이 있음을 눈치챈 경취가 경계하기도 했고, 왕족임에도 굴/경/소가 다 해먹는 바람에 비집고 들어가 활약할 기회가 없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이후 중앙에서 온 군수와 갈등을 빚다가 일방적으로 파직당하자 뜻을 펼치지 못하던 서러움이 폭발, 자기가 섬멸한 도적단에 들어가 강동에서 초를 전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49]
기원전 288년에는 기다린 끝에 경취가 죽고 오랜만에 강동으로 보내지던 지원이 끊겨버리자 천시가 갖추어졌다며 대대적인 반란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듬해 기원전 287년 강동에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켰다.[50]
기만술의 달인으로 봉기 즉시 강동전역에 역정보를 살포하여 토벌군 지휘관 소어가 상황은 오판하게 하였고, 금릉에서 오합지졸의 농민군을 이끌고 소어가 이끄는 정예군을 맞이하여 회전에서 큰 피해를 주어 무승부로 이끌었다.[51]
이후 초조정에서는 소어가 반란군 진압에 실패하고 장교가 협상을 요청해오자 장교를 강동후에 봉함으로서 봉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 지만, 봉기군 성격상 하필 내부사정이 열악할 때 외정을 중시하려 들었던 게 안 좋게 소문이 나면서 고립상태가 되었고, 물자를 공급받을 수단이 강남 자체에서는 거의 막혀 제나라 쪽에서 오는 장사치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기가 일으키지도 않은 반역 혐의를 중앙이 인식해 발발한 2차 난에서 경가군에게 패망하고 이후 강동을 떠나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장교와 같은 장씨 사람으로 장교처럼 소/경/굴이 다 해먹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았고, 상구대전에서 경취가 패배하고 경씨가 군사 쪽 임무에서 조금 밀려나자 기회라고 여겼다. 마침 진나라 친초파들이 서부에서 대대적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이끌고 침입, 진나라의 1선 방어선인 진창을 얻고, 수도로 가는 통로인 미현까지 위협했다. 조정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이 행동으로 인해서 초나라는 물러나기도, 계속 관중에 진공하기도 애매한 포지션에 놓였고, 결국 계속 진공을 선택하며 종횡대전의 시발점이 되었다.
강동에서 봉기를 일으킨 장교와는 같은 장씨 일족으로 이전에도 면식이 있어 장교가 정식으로 강동후에 봉해지자 친교를 맻고 삼대세경가의 독주 체제의 도전장을 내밀었으나 2차 장교의 난 당시 중앙이 강동후 장교가 반역했다고 간주하자 핏줄이 같은 게 빌미가 될 것을 피하기 위해 이에 맞장구쳤으며, 난이 끝난 이후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촉과 연합해 독립한 파나라와 대치하고 이전 진나라때 처럼 단독으로 개전하려 하였으나 왕제 황헐이 눈에 불을 키고 감시하고있어 무산되었다.
이후에도 계속되는 난의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공적을 대우받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지만 근왕 노선 방향으로 참전했으나, 정작 돌아온 것은 가장 공훈이 명백한 본인을 놔두고 갖은 명목을 만들어서 다른 이들과 공적을 엇비슷하게 맞추어 포상을 줄이는 중앙의 결정 뿐이었다.[52]
그러나 황헐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후 영윤에 임명되어 현재 중앙으로 올라왔고 후임 한중군수는 임명되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3. 기타[편집]


  • 강을[53](AA:패리스톤 힐) 대부 → 객경
순우곤의 이해득실을 교묘히 가린 교섭에 초나라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이에 태클을 걸면서 등장. 여기서는 본디 위나라 출신의 사람이라서인지 초나라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만 동시에 가급적 위나라와 충돌하지 않게 하려는 행동방침을 보였고, 이를 간파한 소해휼과 역사대로의 앙숙관계를 시작한다.
그 중 증공의 반란에 소해휼이 연루되어 있던 것을 빌미로 소해휼을 끌어내리려 했으나, 초선왕 량부가 오랜 기간동안 곁을 지켜온 귀족 집안인 소씨가 반역을 꾀했을 리가 없다는 논리를 들어 약간의 강등에 그쳤던 일 이후 아주 작정하고 간신의 행동을 보이면서 눈에 보이지 않게 초선왕의 기량을 갉아먹다시피 하였다.
최후도 이에 맞게 소리소문 없이 왕위를 전장에서 계승받은 초위왕 웅상에 의해 목이 잘려 소해휼에게 선물로 바쳐지는 결말이 되었다.

작중 초나라의 위상이 상당히 떨어졌던 초선왕 제위 중기 시절 근처의 지방세력과 함께 이반하여 증나라를 세웠던 이력이 있는 가공의 인물이다.
이후 속국 상태이나 국가의 기틀을 갖추고 있었던 송나라에게 영토를 상실한 것을 기점으로 증나라는 와해되고 간접적이지만 초나라에 다시 복속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연줄을 만드느라 소해휼에게 예물을 들고 접근한 것이 강을에 의해 와전되어 반역자로 낙인찍히고 토벌당한다.


회남대전 당시 회계태수로 민월의 절강으로 진격하자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월부흥군에게 빼앗긴 오성을 되찾는등 공을 세우지만 오 수복 이후 지킬여력이 없자 오성을 불태워 전소시키니 휘하 병사들의 인망을 잃었다. 종국에 민월과의 싸움에서 패전하자 수하들이 반기를 들어서 그의 목을 베고 민월에 투항한다.

연횡책의 그 장의.
처음에는 위나라에서 식객생활을 했으나,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에는 위사와 위신 모두 수준 미달로 보고 조선으로 갔다가, 고질을 충동하였던 것이 빌미가 되어 고씨 문중의 소수파에 의해 진나라까지 도주하였다가 거기서도 일이 잘못되어 초나라까지 도주하였다. 이후 안 그래도 휩쓸리기 쉬운 성격인 초왕 웅괴의 밑에서 별 일을 다 겪었다가 굴평이 죽은 것을 계기로 진나라를 설득[54]하러 떠났지만, 이미 자신의 신뢰는 바닥이 된 진나라에서 붙들려 처형된다. 유언은 망진필의.(진을 망하게 하는 것은 장의다)
그러나 굴평에 이어 어쨌건 초의 사신으로 보내졌던 장의의 목까지 친 결과, 반쯤은 그의 의도대로 진과 초는 충돌하기에 이른다.

부모가 각기 초와 주나라 출신인 상인으로 소양이 주나라에 공작을 펼칠때 첫등장 주상방을 부채질하여 패자 전인제가 스스로 패자체계를 무너뜨리는데는 일조하였다. 이후 초진전쟁에서 초나라가 승리하고 진나라에 영향력을 사하기 위해 잠시 진 대량조를 맡았지만 산동대전때 진나라의 참가를 끌어들이기 위하여 반납하고 이후 친우 경취의 측근 역할을 맡는다.[55] 경취가 죽을때도 곁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 이후는 등장하지 않는다.

  • 악군 계
주요가문은 아니지만 나름 상업을 중시하는 초나라의 대귀족. 2차 중원대전 이후 당시 상행을 점검코자 진나라를 방문했는데, 승전과 성과에 취한 하급 귀족과 현지 백성들의 폭동에 휘말려 일행과 함께 약간의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의 대귀족들이 당시의 승전 분위기를 자중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그녀의 삶이 다한 지 좀 후에 악군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민월 출신으로 원릉에 자리잡은 의적단 두목. 협과 의를 중시하며 어려운 이를 돕는 의적단 일원으로 회계 태수에게 뇌물을 바치며 광릉의 감시를 피하고 있었지만, 태수가 교체되면서 회계로 넘어온 광릉군수 장교에게 토벌당한다.

초나라 출신으로 원릉에 자리잡은 의적단의 부두목. 광릉군수 장교의 토벌전에 소수의 형제들과 살아남아 재기를 노리던중 자신들을 토벌한 광릉군수 장교가 억울하게 파직당하자 과감히 그녀를 의적단에 끌여들였다. 훗날 장교가 일으킨 난에서도 활약하여 강동후령 고위직에 자리하였지만, 뒤이어 일어난 2차 장교의 난에서 초군에게 토벌당한다.

강동 하층민을 대표하는 AA로 딸을 가진 어머니다. 장교에게 합류후 키루오와 더불어 그녀의 최측근이 되었고 훗날 장교가 일으킨 난에서도 활약하여 강동후령 고위직에 자리하였지만, 뒤이어 일어난 2차 장교의 난에서 초군에게 토벌당한다.

초나라 대부로 기원전 305년 촉이 파의 수도 지를 공격하자 초의 원군을 지휘하는 장군으로 등장한다. 지 공방전에서 공성에 집중하던 촉군을 포위하며 괴멸시키고, 파촉지방에서 판순만을 괴멸시키며, 남양의 난에서 수도 영릉 앞에서 3천의 군사로 반란군 4천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초나라 무장 중 무패를 견지하고 있는 숙장.

초왕 웅횡의 친족으로 중앙집권화를 위해 꾀를 내다 삼대세경가의 견제를 받고 구인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다가, 이를 뒷수습하는 과정에서 중앙에서 보낼 사신으로 선정되어 무군수라는 직책을 받는다.[56]
이후 황헐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였고, 쿠데타를 일으킨 황헐을 지지하였고 폐위된 웅횡의 독살에도 관여하여 황헐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원 역사 상의 춘신군. 이름이 이래 봬도 초왕 웅횡의 동생이다. 사실상 초왕이 최종 결정을 내리고 참패한 합종대전 이후로 유구무언 상황이 된 초왕을 대신해 국정을 이끌며 곧바로 대책을 준비하였다. 종횡대전의 패배 이후 장교의 난을 시작으로 내부에서는 잦은 반란과 삼대세경가의 권력 독점, 외부에서는 공세에 나선 송의 압박으로 혼란해져 가는 초를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고 하나 초왕 웅횡이 즉위 초에 보여준 총기를 잃고 삼대세가에 의존하며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유유부단하고 결단력을 보이지 못하다가 급기야 남양군의 반란 수습에서 측근세력인 삼대세가에게 상을 퍼주는 것도 모자라 논공행상에서 외면당해 불만이 쌓인 한중군을 동원해 영도 인근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정에 결국 폭발, 웅횡을 유폐하고 사실상 초나라의 1인자가 되어 장신을 포섭하기 위해 영윤으로 임명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하지만 앞날이 밝지는 않다.[57] 결국 자신의 손으로 폐위시킨 언니 웅횡을 몰아세워 독으로 자결시키고 태자 웅완을 왕으로 올렸다.

영직의 이탈로 일어난 진나라의 친초파 항쟁 사태에서 미현에서 등장. 원역사보다는 훨씬 이른 등장으로 원역사 시대까지 산다면 근 90세 이상 산다고 봐야할 정도. 소/경/굴이 아니면 출세하기 힘든 초나라에서 미성도 아니고 희성이라는 불리하기 짝이 없는 조건을 타고 태어났다.
미현에서 백기와 사마착을 몰아붙였고, 종횡대전에서도 옹을 함락할 뻔 했지만 돌궐의 기습으로 퇴각했다. 경취가 물러나자 산관까지 요구한 조선의 요구에 촉군의 안전과 진창을 댓가로 주는 것으로 타협하고 안전히 후퇴하는데 성공한다.
장신의 최측근으로 장신의 출세지향적 태도에 찬동하면서 자신도 보이지 않는 벽[58]을 깨고 싶어한다. 남양의 난때 한중군을 이끌고 남양군과 맞서싸워 승리하였지만 상대가 초군 양기둥중 하나인 남양군이었던 만큼 한중군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이후 남양에 주둔하여 안정화에 주력하고 있는 중이고 정권을 잡은 황헐이 장신의 추천해주어서 남양군수에 임명되었다.

점성술사. 웅횡 재위기 어느 사이에 죽었다. 수차례 이어지던 반란 중에 그녀의 분석자료가 실제 기상현상을 초 근왕파 수뇌부가 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팽택의난 주모자로 묵가소속의 평민이다. 팽택에서 봉기하여 악군을 끌어들여 무려 3만이라는 봉기군을 이끌고 영도로 진격하여, 영도 외곽에서 굴서가 이끄는 정규군을 상대로 선전하였으나, 봉기군의 한계[59]와 사방에서 몰려온 근왕군에 의해 저지. 본인은 측근 70여명과 함께 본진에서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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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제와 노-송-월은 적대 관계였지만, 이번 전쟁에 한해 서로 간의 감정을 잠시 접어두고 초에 맞서 싸웠다.[2] 사실 웅량부 본인도 웅장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를 생각이 초기만 해도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더 지켜보자'고 생각하다가 당시 시점에서는 찬탈할 생각을 접은 상태였다.[3] 파나라 측에서는 웅량부를 찬탈자로 규정하고 언플을 시전했으나 파나라로 돌아선 상용, 찬탈자 타이틀이 붙어서 망설인 언을 제외하면 전부 웅량부를 지지했다.[4] 이외에도 초위왕 당시의 진나라와 초나라 공/왕실은 사돈지간이기도 하였다.[5] 머리가 나쁜건 전혀 아니지만 원 역사에서처럼 상당히 감정적이다.[6] 제이외교관인 이유는 합종군으로 가는 스노우볼링을 굴려주고 본의아니게 영탕런도 도운 제일외교관 영사가 있기 때문.[7] 코노스바의 카즈마 파티 중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사토 카즈마는 악조, 메구밍은 악구, 아쿠아는 위에 써놓았듯 웅괴로 등장했다.[8] 판정 중에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서 AA 체인지와 관련된 판정까지 한 결과 바뀐 AA.[9] 황헐이 내부에서 반조정 세력을 진압하고 한중군이 반군을 혈전 끝에 격파하여 수도가 점령당하는 건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10] 아직 남양 일대가 진압당하긴 했어도 안정적인 상황도 아니었던 데다가 이는 반란 세력과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한중 세력을 동시에 숙청하는 빌미를 잡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초의 두 정예군이 반란을 일으킨 남양과 그걸 진압한 한중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나라를 말아먹을 결정이었다.[11] 사실 이건 웅횡이 영도에서 도망친다고 전권이 황헐에게 넘어간지 1년도 안 된 시점인 덕이 컸다. 아직 반란이 끝나지도 않았었고, 영도 경비는 실제로 반란 진압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황헐의 관할이었다.덕분에 웅횡은 판정 기회도 없이 허무하게 유폐당했다.[12] 겉은 병사지만 실제로는 황헐의 협박에 스스로 독이든 음식을 먹고 자결[13] 아래의 강을과 함께 호가호위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14] 표면상으로 소해휼은 웅량부에 대한 충성을 지켰다.[15] 초나라의 재상으로 장의가 거지꼴로 돌아다니던 시절, 그를 문객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16] 굴개의 증언으로 웅괴가 어린시절부터 소양이 업어서 길러왔기 때문에 웅괴에게 있어서 소양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17] 때문에 웅괴가 친정을 할때도 그녀의 뜻을 꺽을수있는 사람은 오직 소양뿐이었다.[18] 굴원이 살아있을적 소양이 경리를 굴원과 비교하며 능력을 폄훼한탓에 경리는 소양에게 매우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경리 역시 강한의 중요성을 알고있었지만 이탓에 소양의 유언을 일부러 무시하였다.[19] 이때 소양을 말리지 않았으면 소어는 진짜 맞아죽었을 정도였다.[20] 주로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말해도 믿게 할 기세로 철저히 뿌려진 기만정보에 대차게 당하고 말았다.[21] 초선왕 대의 초나라 귀족으로 주로 외정을 많이 다녔다.[22] 메타적으로 통솔이 100까지 상승했다. 원래는 한거와 마찬가지로 80대였다고 추정.[23] 다만 이탓에 웅괴의 분노를 사서 영윤자리와 상집규 작위를 내려놓게 되었다.[24] 숙련도가 딱 100, 최대치였다.[25] 이때 전투에서 다이스에게 말 그대로 사랑을 받으면서 이기자, 참치들이 리롤권을 소모하며 다시 전투를 벌였으나 조선의 크리 후 필승 보정이 사라진 상황에서 기어이 합종군의 승리 다이스가 뜨며 조선군까지 패퇴시킨다.[26] 이전에 빼앗긴 상집규작위도 이때 되찾았다.[27] 제나라가 조선의 공격에 두려워할때 이를 다그치고, 태산을 장악하여 방어선을 갖추고 자신이 수춘에 주둔하여 이를 돕겠다고 약속하자 제조정 모두가 안심하였다.[28] 이후 꿈에서 장자를 만나 서민의 검과 제후의검을 받았지만 마지막 천자의 검은 받아내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났는데 자신의 애검이 반토막 나있는것을 목격한다.[29] 이전 위장과의 싸움에서 위장의 꾀로 군사를 물린전이 있었지만, 전투에서 지지는 않았다.[30] 이 패전에서 예전에 받았던 상집규작위를 또다시 내려놓게 되었고, 경취는 자신은 상집규작과 인연이 없다며 쓴웃음을 지었다.[31] 훗날의 오장원[32] 이때 사실상 경씨가 완전히 밀려나는 형국이 되었다.[33] 말년에 조정의 지원이 적다고 불평하는 남양유력자들을 달래고 있었다.[34] 맹자는 경취의 이 말을 전해듣고서는 전국시대에 군사를 이끌고 명성을 쌓아왔으면서 그런 말이나 하는 것을 보니 경취가 천도란걸 깨닫지 못한 것은 알겠다고 디스했다. 그러면서 "무릇 도라는 것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이 구하려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라 평하였다.[35] 경씨의 근신이 풀리기 까지 무려 5년이 걸렸다. 자중하지 않으면 처벌이 가중될 수도 있었으니 별 수 없었던 것. 같은 이유로 장교의 난 당시에는 근왕-초강경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다.[36] 말이 기벽이지 지역 유지의 입장에서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을 중앙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으로 간주해 없을 수도 있던 저항을 만들었으며, 그들이 선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제압되었을 때 분을 이기지 못해 죽은 것도 혼자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난자해 죽였다.[37] 당시 한나라는 대부 신차가 초의 첩자로 밝혀저 그 측근들까지 즉결처분 받은 이후 연종군의 전과가 좋아졌다는 것 때문에 이를 사실로 보고 있었으며 조선에 빚을 진 셈이 되었다. 때문에 능력이 입증되었다면 모를까 그마저도 아닌 가상적국 초의 명문 무가 출신을 영입하기에는 대외신뢰도에 대한 우려가 부각되었다.[38] 웅괴의 무리한 전쟁요구를 경취가 영윤자리 걸면서 막아서자 웅괴는 즉시 경취를 영윤에서 해임하고 그자리에 경리를 앉혔다.[39] 스스로 군사적으로 재능이 있다고 자평하였으나 이후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군사적 재능이 좋은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40] 원로중의 원로라 당시 삼대세가의 대표급인 소해휼도 아기취급한다.[41] 경취가 S급이라면 굴개는 A급내지 A+급[42] 6차 수춘전투[43] 그러나 도망친 송군 상당수가 수춘성에 들어가서 성을 취하지는 못하였다.[44] 삼려대부 자리를 본인이 원하였는데, 삼대세경가의 일은 반드시 삼려대부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45] 천문(天問) 그 중에서도 어찌하여 살찐 제사육을 바쳤는데 천제는 달가워하지 않았는가?라는 부분을 인용했다.[46] 굴개 본인부터 각오하고 저질렀기에, 영질을 벤 후 군말없이 무기를 버리고 경취에게 잡혔다.[47] 예외로 장의와는 절대로 사이가 좋아질수 없다고 본인이 단언하였다.[48] 훗날 그녀의 시 천문을 영질과 경취가 부르며 죽었다.[49] 겉으로는 굉장히 냉혹한 성향을 보이며 도적단을 운용했지만, 그것을 넘어설 정도로 정이 많은 성격이었고 이는 전략적으로 이미 짠 판을 반쯤 스스로 엎는 결점이자 인간적인 면이 되기도 하였다.[50] 라고는 해도 동초 전체가 2차례에 걸친 기존 봉기와 이후 방치이자 사실상의 일방적인 수탈과 동원이 이어지면서 해당 지역은 고작해야 3만여의 잡병과 수천의 관군이 동원력의 최대가 될 정도로 황폐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유사시 인근 지역에서 준비한 진압병력도 1만 7천여가 다일 지경으로 초나라의 내부는 여력이 고갈 상태였다.[51] 이때 소어가 이끄는 초군은 와해직전이었으니 사실상 장교의 승리라 봐도 무방하다.[52] 남양의 난 진압을 위해서 동원한 한중군에서 사상자만 6천이고 경상까지 합하면 1만의 피해를 입었다.[53] 위의 소해휼과 마찬가지로 호가호위로 알려진 인물. 전국책에 따르면 무려 6번이나 소해휼을 참소한 적이 있다.[54] 설득은 설득인데 그게 초나라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55] 세운공이 많아서 경취가 높은 자리에 올려줄것을 요청했지만 외지인이란 이유로 번번히 반려되었다.[56] 남양의 난 당시 진압에 공훈이 가장 컸던 한중군의 지분을 강한 사람들과 중앙의 삼대세경가와 동등하게 맞추게 되었다. 자칫하면 당시의 일을 재조명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57] 당장 거양 반환건도 반란으로 인해 연종이 다시 미뤄진 데다 조선이 잦은 반란으로 초의 통제력을 의심하고 있고, 왕까지 유폐당한 상황이라 외교적으론 궁지에 몰린 거나 마찬가지고 내부적으로도 본인이 끝끝내 피하려고 했어도 결국 신하가 왕에게 칼을 들이대고 권력을 뺏은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찬탈 소리가 나오기 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58] 가문이 희성이라 잘해봐야 군수가 끝이었기에 공을 세워 그 이상을 노리고 있다.[59] 주현의 군사까지 합하여 무려 4만이란 대군이었지만 오합지졸의 봉기군이었기에 장기전으로 모랄빵이 터져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