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암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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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
금암기적비
黔巖紀蹟碑


소재지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52-29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 면적
석비 1基, 토지 1㎡
지정연도
1978년 12월 18일
소유자
(소유단체)

서울주택도시공사
관리자
(관리단체)

서울주택도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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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암기적비[1]
1. 개요
2. 상세
3. 구조




1. 개요[편집]


조선시대비석. 1978년 12월 18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받았다.


2. 상세[편집]


원래 이 자리에는 금암발참(黔巖撥站)이란 역참이 있었다. 의주로 가는 길목에 있어 중요한 역참 중 하나로 여겼던 곳이다.

1781년(정조 5년) 8월에 정조가 증조할아버지 숙종의 능(서오릉의 명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 영조의 옛 일화를 생각하면서 금암발참에 세운 비석이다. 비문 역시 정조가 직접 지었으며, 비문 건립과 동시에 그동안 거의 관리받지 못했던 금암발참을 새로 짓게 했다.

내용은 이렇다. 경종 재위 시절인 1721년(경종 1년)에 영조가 아직 연잉군일 때, 숙종환갑을 맞아 명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다 금암역참에서 잠시 쉬었다. 편히 쉬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창릉천을 건너가는 소도둑을 잡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 전해에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연잉군은 참장을 불러 "흉년에다가 춥고 배고파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일 테니 봐주라"는 명을 내렸고, 다음 날 궁으로 갔더니 왕세제 책봉을 받았다. 정조는 "영조가 숙종의 환갑을 기려 참배하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그날에 후계자가 된 것은 하늘의 뜻이며, 영조가 재위 내내 선정을 베푼 징조가 이 일이었다."며 칭송했다.

즉, 어려운 백성의 상황을 생각한 영조의 따뜻한 마음네??을 드러내는 내용이다.


3. 구조[편집]


  •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 비의 몸체)을 세우고, 상단에는 돌로 만든 팔작지붕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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