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금)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금나라(金)의 제8대 황제. 선효태자 현종 윤공(宣孝太子 顯宗 允恭)의 장남으로 장종의 이복 형이자 위소왕의 조카였다.
2. 생애[편집]
장종의 형이었지만 서자였기 때문에 원래는 황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침공으로 인해 화북이 황폐화하고, 수도인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가 포위되는 막장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을 때 금 조정에는 궁정 분란이 일어나 위소왕이 승상 흘석렬호사호(紇石烈胡沙虎)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호사호는 위소왕의 조카인 나이 50살의 오도보를 제위에 옹립했다. 이 때 몽골은 금으로부터 암바가이 칸의 유물과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
선종은 황제에 오른 직후, 호사호를 숙청하여 그의 목숨을 빼앗은 뒤 1214년 5월, 수도를 중도 대흥부에서 원래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천도했다(정우의 남천). 이 사안을 놓고 조정에서 큰 소란이 있었지만[1] 선종은 천도를 단행하였으며, 옛 수도인 중도 대흥부에는 완안복흥과 태자 완안수충을 남겨서 그 곳을 지키도록 했다.
선종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수도를 카이펑으로 이전한 것은 다음과 같은 까닭들 때문이었다.
- 기존 수도인 중도 대흥부는 몽골 방면의 적에 대항할 군대가 있어야 방어가 가능하지, 그렇지 않으면 바람 앞의 촛불 신세나 다름 없었다. 이미 위소왕 때 중도 대흥부가 포위되면서 선종 자신이 직접 이 사실을 뼈져리게 느꼈던 전과도 있었다.[2]
- 천도의 필요성은 높지만, 카이펑같이 방어력이 높으면서도 자체 생산력도 좋은 지역을 요동이나 화북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산서 지역의 대동 같은 경우에는 방어력만 높지 경제력이 바닥인 데다가 역시 포위당하면 답이 없다. 그리고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면 이번에는 황하 이남인 금나라 영토의 지배 능력을 잃는다. 이미 화북의 황폐화로 대타격을 입은 금나라에서 해당 영토를 추가로 빼앗기면 세수 부족 등으로 바로 망해버린다.[3]
- 카이펑에서 북송이 방어에 실패했음은 정강의 변만 봐도 나오듯이 그들 스스로의 삽질이 큰 원인이었다. 지형만으로 본다면 황하와 대운하가 서로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해 그물망 같은 수로망으로 방어가 쉬울 뿐더러, 주변 농경지도 많아서 식량을 마련하기에 용이하다. 게다가 그나마 허술하다고 볼 수 있는 남쪽 방면의 방어망은, 이걸 실제로 쓰려면 남송의 영토를 지나야 하므로 몽골이 쉽사리 이 길을 고르기는 힘들었다.
- 남송은 약체화가 진행 중이었므로, 기회를 봐서 남쪽을 침공하면 남송의 경제력까지 확보해서 다시 한 번 몽골에 대항할 동력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단점도 있었기에 조정에서 난리가 났다. 심지어 겁에 질려서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으니...
- 국가를 창건한 요동과 옛 수도인 중도 대흥부 및 화북의 상당수를 사실상 방치했다. 이 때문에 금의 일부 신료들은 개봉은 너무 남쪽에 있으니 굳이 수도를 이전하려면 요동이나 산동으로 이전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아뢰기도 했다. 이는 실제로 현실로 나타났는데, 선종의 천도 사실을 안 몽골이 재차 침공하는 바람에 중도 대흥부를 지키던 황태자는 도망치고 대흥부가 불바다로 변했으며, 요동 지역은 본국과의 연락이 끊어져 쉽게 몽골이 빼앗았다.
- 몽골의 전력을 정면에서 상대할 만한 기병 전력을 더 확보하기 힘들었다. 과거 중국의 제국들도 북부와 서부의 변경 지대를 잃으면 말을 구할 수 없어서 기병 전력을 크게 축소하고 보병 위주의 전력으로 재편했는데, 이러면 수비 능력은 보유하겠지만 적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공세로 돌입하기 힘들었다. 특히 화북 지역의 많은 평야 탓에 기병의 위력은 느는 반면, 보병의 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당장 북송도 이 문제로 군대 꼴은 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한마디로 강남이 없는 상태의 북송 꼴인 셈이다.
- 카이펑과 하남이 당장 방어는 쉽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몽골과 남송 사이에 끼어있다. 만일 두 국가가 연합한다면 일시에 양면공격을 받고, 도망칠 길도 없다. 이는 금나라의 멸망 때 실제로 나타났다.
- 남송의 약체화가 진행되는 중이라지만 그렇다고 만만한 나라는 절대 아니다. 적어도 방어전에서는 양양성, 장강 등의 방어선 덕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때문에 남송을 먹어치우려면 장기전을 각오해야 하며 그러려면 그걸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이 필요했는데 금나라에게는 그럴만한 경제력이 없었다.
일단, 선종의 천도는 금나라가 당장 붕괴하는 것을 막고 10년 이상 버티면서 조금씩 실지를 회복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이 사안에 대해서는 둘 다 나쁜 선택지에서 그나마 좋은 선택지를 고른 경우라고 보면 된다.
다만, 남쪽으로 천도하면서도 일단 남송과 화평해 남쪽에 배치한 군대를 북쪽으로 상당수 돌려 실지 회복을 않고, 기회만 있으면 남송을 먹어버리려는 시도를 했었는데, 이것은 다음 황제 대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돌아왔다. 금의 지속적인 남침만이 아니라, 남송은 예전의 큰 원한도 있어서 선종의 다음 대인 금나라의 애종 시절에 몽골군의 남송 영토 통과를 인정해, 끝내 개봉이 뺏겨 금나라가 멸망하는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때 남송 조정에서는 과거의 원한과 금 선종의 찝적거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몽골 도왔다가 몽골이 금나라 멸망시키면 다음에는 우리 나라 차례가 아니겠냐? 차라리 금나라가 멸망하지 않게 도와주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기에 선종이 남송과의 화친에 신경 썼다면 정말 애종 대에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 점은 선종의 완벽한 잘못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선종은 금나라의 멸망은 물론 남송의 멸망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셈이며, 이 때문에 현대 중국에서는 만주족이든 한족이든 간에 선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다.
거기다 선종이 천도를 강행하자 칭기즈 칸은 그것을 적대 행위로 간주하고 다시 전쟁을 재개하여 중도 대흥부를 함락시킨 뒤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칭기즈 칸은 중국 전선을 부장인 무칼리에게 맡겼는데 금나라의 영토는 섬서성의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몽골에 의해 하북의 군현이 차례차례 함락되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구나 변경에 있는 여러 민족들이 빈번하게 반란을 일으키면서 금나라는 와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몽골이 중앙 아시아에서 전쟁을 하고 있어 여력이 없을 때, 금은 잠시나마 중도 대흥부를 제외한 여러 성을 수복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선종과 완안씨 황족들, 귀족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몽골에게 깨졌다는 소식이 들려 올 때는 한숨을 쉬거나 곡을 하다가 조금 지나면 그거 잊고 연회를 벌인다든가 국토가 피폐해졌는데도 나라에 바친 양들이 살찌지 않았다고 책망하고 격구에 쓸 채를 만들기 위해 흰 암소 가죽을 찾으러 다니는 등 일반 백성들이 볼 때는 보기가 영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금사에서는 노력은 했으나 성공한 것이 없었다고 평했다.
선종은 늦은 나이에 즉위하여 오랜 기간을 재위하진 못했고 간신히 금나라가 생명 연장을 하면서 망국의 군주가 되진 않았다.
3. 대외관계[편집]
3.1. 남송과의 관계[편집]
금이 변경으로 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송 측에서도 몽고에 대해 생각이 있었는데, 남송의 신하들은 교행간을 비롯한 일파들이 금과 몽골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덕수를 비롯한 일파는 금이 쇠퇴하는 걸 틈타 세폐를 중단할 것을 권하였고 송영종은 진덕수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금 선종은 남송의 세폐 중단에 대해 분개했고, 술호고기는 선종에게 남송이 세폐를 중단한 걸 구실로 송나라를 공격하라고 권했다. 이렇게 하면 북쪽의 손실은 남쪽에서 보충할 수 있고 남쪽에서 강토를 넓힐 수 있다고 했다. 상의 끝에 금나라의 적지 않은 장수들도 금군의 실력이 몽고보다는 부족하지만 송군보다는 넉넉하다고 여겼다. 이에 금 선종이 송을 침공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완안새불이 이끄는 금군이 광산, 나산, 흥주 등 여러 도시를 연파하고 송군을 거의 2만 명이나 참살했다. 동시에 금군은 여러 갈래로 나가 번성·조양·광화군·대산관·서화·계주·성주 등지에서 송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 형세가 금군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했고, 많은 성들이 득실복실하여 송군은 곳곳에서 격렬한 반격을 시작했다. 이때 전쟁과정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순탄치 않자 금 조정 내부에서 남송과의 화해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당시 금나라는 몽골 대군의 압박으로 세력이 궁핍해졌고, 진정한 통치 지역국은 하남 지역 및 섬서 일대였다. 설상가상으로 동시에 산동 지역에서는 한족 무장세력으로 구성된 홍오군의 기세가 날로 높아져 곳곳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이 외에도 금나라의 원래 통치가 비교적 확고했던 요동 지방에는 거란인 야율유가[4] 와 포선만노[5] 의 반란이 있는 등 대외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흥정 2년(1218년) 말, 송나라에 작은 우위를 점한 금 선종은 스스로 남송에 화친을 요구하였으나 남송은 금의 사신을 입국시키지 않을 정도로 단호했다. 화가 나서 태원이 막 몽골군에게 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금나라 흥정 2년(1219년) 봄 세 갈래로 나뉘어 남송에 군사공격을 감행하여, 서쪽으로는 섬서, 중로는 경호 방면, 동쪽으로 강회로 진격하기 시작했다.[6] 이에 금나라 출신이었던 이전(李全)은 홍오군을 이끌고 사방으로 금군을 사살했다. 그 결과 금군의 주력은 화호피에서 이전에게 대패하고, 퇴각할 때 또 추격을 받아 큰 손실을 입었다. 서쪽으로 진격한 금군도 처음에는 대산관을 무너뜨리며 승리했지만 끝내 양주(섬서성 일대)에서 장위(張威)에게 요격당해 수천 명이 죽고 결국 패배하여 북으로 도망쳤다. 중로는 금군 대장 완안와가가 수만 명의 금군을 이끌고 조양을 포위 공격했는데, 두 달여 동안 전쟁을 벌이다 송 장군 맹종정에게 격퇴당했다. 이때 금이 중로군이 지치자 조방이 조양성 밖에서 금군을 향해 돌발 공격을 퍼부었고, 맹종정이 다시 개성으로 출격하여 협공하자 금군은 이 전투에서 3만 명 이상이 죽고 완안와가 혼자 도주했다.
3.2. 서하와의 관계[편집]
금 선종 시기부터는 서북의 서하가 몽골과 연합하여 국경 지대에서 끊임없이 금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7] 이후 서하가 남송 정권에 금을 공격할 것을 권하자 남송 정권도 이를 수락했다. 서하군이 공주성을 공격하자 남송군도 공주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한다.
4. 둘러보기[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3 07:40:38에 나무위키 선종(금)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태학생들의 반대가 심했음[2] 특히 위소왕때 이미 금나라 병력이 수십만이나 갈려나간 상황이다.[3] 사실 금나라는 건국 이후부터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화북이 난장판이 되었으니 세수가 더 부족해지는건 당연한데 그나마 남은 황하 이남까지 잃는다면 어떻게 될 지는...[4] 요동 지역에서 후요를 세우나, 이후 칭기즈칸에게 투항함[5] 야율유가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으나 실패하고 동진국을 세웠다.[6] 여기서 회동 지역에서 금군을 격파했던 가섭이 산동 지역의 충의군과 연계하여, 고토 수복을 노렸다.[7] 이전 위소왕 시절 서하가 금에 지원군을 요청하였으나 금은 이를 무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