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 블라오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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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前 축구선수


이름
고란 블라오비치
Goran Vlaović
출생
1972년 8월 7일 (51세)
유고슬라비아SFR 크로아티아SR
노바 그라디시카

국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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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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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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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9cm
직업
축구선수(공격수[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NK 오시예크 (1990~1991)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1991~1994)
칼초 파도바 (1994~1996)
발렌시아 CF (1996~2000)
파나티나이코스 FC (2000~2004)
국가대표
52경기 15골 (크로아티아 / 1992~2002)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1. 개요[편집]


크로아티아의 前 축구선수.

크로아티아 대표팀 1세대의 주역 중 한 명이며 다보르 슈케르와 함께 크로아티아의 최전방을 책임졌던 공격수였다. 대한민국 팬들에게는 1996년 대한민국과의 평가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과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회 8강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쐐기골을 넣은 장면으로 기억에 남은 인물이다.


2. 클럽 경력[편집]


1989년 NK 오시예크 유소년팀에 입단해 1989-90 시즌 후반기 처음 리그 데뷔전을 가졌다. 이후 1990-91 시즌 마지막 유고슬라비아 1부리그에서 23경기 11골을 넣으며 일약 주목받는 신성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터진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고, 1992년 어렵사리 열린 단축 시즌이자 크로아티아 첫 원년 리그 시즌에서 GNK 디나모 자그레브에 입단해 22경기 9골로 좋은 활약을 이어나갔다. 이후 그는 자그레브의 주전 공격수가 되어 1992-93 시즌 23골, 1993-94 시즌 29골로 두 시즌 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특히 1993-94 시즌 기록한 시즌 29골의 기록은 이후 13년이 지나서야 브라질계 귀화 공격수 에두아르도 다실바가 경신할 때 까지 줄곧 크로아티아 리그 한 시즌 최다골로 남은 기록이었다.

이러한 활약에 이웃에 위치한 빅리그인 이탈리아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세리에 A칼초 파도바에 입단하게 되었다. 첫 시즌 27경기 5골로 적응기를 거친 후[2] 다음 시즌 23경기 13골로 팀의 주포로써 맹활약했으나 파도바는 두 시즌 연속 강등 싸움 끝에 결국 1995-96 시즌 최하위로 강등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받아 복수의 유럽 구단들이 그에게 영입 제안을 했고 결국 스페인의 거함 발렌시아 CF에 입단했다. 당시 발렌시아는 유럽에서도 잘 나가는 팀 중 하나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주전 경쟁이 빡셌다. 그 와중에도 블라오비치는 경쟁력을 인정받으며 1996-97 시즌 리그 24경기 8골, UEFA컵 7경기 2골로 시즌 10골을 채운다. 그 다음 시즌에도 리그 26경기 7골로 분전했지만 팀 내 주전 경쟁을 펼치던 클라우디오 로페스아드리안 일리에가 나란히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하며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고, 1998-99 시즌 그는 백업으로 밀리며 리그 2골에 그쳤다. 여기에 이 시즌 팀이 리그 4위 탈환에 성공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면서 팀에서의 그의 입지는 더욱 떨어지게 된다. 결국 1999-2000 시즌에는 철저히 엑토르 쿠페르 감독의 구상에서 멀어지며 시즌 7경기, 전경기 교체출장이라는 굴욕적인 기록을 남겼다.

2000년 여름 그는 그리스 리그의 강호 파나티나이코스 FC로 이적하며 부활을 도모했다. 첫 시즌 리그 22경기 12골로 감을 되찾았고, 2001-02 시즌엔 크로아티아 국가대표 동료인 로베르트 야르니까지 합세하며 리그 21경기 13골, 챔피언스리그 13경기 2골로 팀의 8강 돌풍에 일조하는 등 크게 활약한다. 이 활약으로 그는 극적으로 2002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린다. 이 시즌을 끝으로 그는 주로 교체 요원으로 활약하며 2002-03, 2003-04 시즌을 시즌 2골로 소소히 마무리했고 2004년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1992년 크로아티아의 호주 원정 A매치에서 처음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리그에서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유망주로 각광을 받던 시절이었고 팀이 치른 3차례의 평가전에 모두 출전하며 국가대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후 그는 1995년까지 단 두 경기를 더 소화하는데 그쳤다. 크로아티아 대표팀이 당시 공격자원이 워낙 빵빵하기도 했고, 1995년 받은 뇌 혈전 제거 수술의 여파도 있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국가대표팀 스케쥴을 소화하는데 무리가 있었던 이유도 있다.

그가 국가대표팀에서 입지를 다지게 된 경기는 홈에서 열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A매치였는데, 선발 출전하여 데뷔골은 물론 아예 해트트릭을 때려박으며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이 경기로 그는 일약 국가대표팀의 주력 공격자원으로 급부상하게 되었고, 예선 1경기만 소화했던 UEFA 유로 1996 대회 본선 최종엔트리에 깜짝 발탁되어 본선 조별리그 튀르키예전 결승골을 넣는 등 활약한다.[3]

이후 그는 다보르 슈케르, 알렌 보크시치와 함께 크로아티아 대표팀의 공격진을 구성하며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 우크라이나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어 팀의 첫 월드컵 본선진출에 일조한 뒤,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에도 무난히 승선한다. 본선에서도 전 경기에 출장했고 특히 8강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완벽히 경기 흐름을 가져오는 두번째 골을 넣어 독일을 침몰시킨다.

하지만 이후 발렌시아에서 교체 자원으로 밀리면서 자연스레 그 또한 국가대표팀에서 멀어졌다. 그러다가 파나티나이코스 이적 이후 폼을 되찾아 2001년부터 다시 A매치에 소집되었고 월드컵 예선을 꾸준히 소화하면서 2002 FIFA 월드컵 본선 무대를 다시 한 번 밟게 된다. 4년 전과는 달리 교체 요원이었고 토너먼트 진출 이후 활약이 기대되는 자원이었으나 크로아티아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게 되며 그는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채 자신의 두 번째 월드컵을 마감했다. 이후 2002년 8월 웨일스와의 경기를 끝으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벗었다.

[1] 스트라이커[2] 1995년 그의 머리에서 혈전이 발견되어 제거 수술을 받은 뒤의 여파도 컸다.[3] 이 골로 그는 크로아티아 독립 후 첫 메이저 국가대항전 본선에서 골을 넣은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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