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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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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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1.jpg
사진 출처 : Google Arts & Culture -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 미륵삼존불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4. 보물 제2071호


1. 개요[편집]


慶州 南山 長倉谷 石造彌勒如來三尊像.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초에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에서 만든 신라의 불교 조각상 3좌. '삼화령 애기부처'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졌다. 현재 3점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중인데, 2020년 7월 1일에 보물로 지정 예고되었다가 동년 8월 27일 보물 제2071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편집]




7세기 초에 만들어진 신라시대 석조불상 3점으로, 중앙의 가장 큰 본존상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 10월 10일, 경상남도 경주시 남산 계곡 중 한 지류인 장창곡(長倉谷)의 정상부근에 위치한 무너진 석실(石室)에서 발견되었다. 이 본존불보다 먼저 발견되어 경주 내남면 월남리 민가(民家)에서 보관 중이던 양옆의 두 협시보살상은 1924년 당시에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로 옮겨져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후 발견된 본존상과 함께 완전한 삼존불로 합쳐지게 되었다.

흔히 좌우 협시보살들의 자그마한 몸체와 천진난만한 표정 때문에 ‘삼화령 아기부처’(또는 애기부처)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의 대표 유물 중 하나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인기는 좌우 협시보살들의 발에 검게 탄 에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관람객들이 귀엽다고 한 번씩 몰래 만지고 간 손 때가 쌓이고 쌓여 생긴 흔적이다.[1]

파일: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2.png

파일: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3.png
최초 발견 당시의 모습. 사진 출처 : CPN문화유산 문화재TV -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보물 된다

이 불상들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644년(선덕여왕 13년) 생의(生義) 스님이 경주 남산 골짜기에서 발견하여 삼화령(三花嶺)에 봉안하였다는 미륵상으로 추정되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차(茶)를 공양했다고 하는 삼화령 미륵세존 설화의 대상이 된 작품이다. 일단 학계에서는 삼국유사에 남겨진 기록 및 불상에 보이는 조각기술 양식을 토대로 7세기 초에 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보고 있으나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이미 그 이전에 만들어져 있는 것을 644년에 옮겼다고 나와있으므로 7세기보다 더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이 작품들 중 가운데 앉아있는 본존의 자세가 특이한데, 이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倚子座)는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불상 가운데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상의 존명은 대부분 미륵불이며, 삼국유사의 기록과 중국의 예로 볼 때 이 본존불 또한 미륵불로 추정된다. 단단한 재질인 화강암을 조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신라의 대표적인 석불이다.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경주 남산이라는 원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되는 점,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의좌형 미륵삼존불이자 신라인들의 신앙생활이 반영된 대표작이라는 점, 마치 불심(佛心)과 동심(童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듯한 7세기 신라 전성기의 수준 높은 조각양식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한국 조각사에 중요한 학술‧예술적 위상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에 2020년 7월, 문화재청에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고,[2] 2020년 8월 27일 대한민국 보물 제2071호로 지정되었다.


3. 외부 링크[편집]




4. 보물 제2071호[편집]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慶州 南山 長倉谷 石造彌勒如來三尊像)’은 경주 남산 계곡 중 한 지류인 ‘장창곡(長倉谷)’의 정상부근 석실(石室)에 있던 석조불상이다. 본존상은 1924년 10월 남산 장창곡에서 발견되었다. 이전에 먼저 옮겨져 경주 내남면 월남리 민가에 보관되어 온 두 협시보살상은 일제강점기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오다가 본존상과 함께 완전한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이 삼존상은 삼국 시대 미륵신앙과 신앙행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는『삼국유사(三國遺事)』의「탑상(塔像)」편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 조(條)의 644년(선덕여왕 13) 생의(生義) 스님이 경주 남산 골짜기에서 미륵상을 발견하여 삼화령(三花嶺)에 봉안하였다는 기록과, 같은 책「기이(紀異)」편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에 기록된 삼화령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이 불상에 차[茶]를 공양했다고 하는 ‘삼화령 미륵세존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또한 이 삼존상은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한 용모로 인해 ‘삼화령 애기부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원래 봉안 장소라고 알려진 삼화령 또는 생의사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불상이 발견된 계곡 명칭을 붙여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미륵세존의 설화와 ‘삼화(三花)’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시대 미륵불은 화랑(花郞)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신앙되어 왔다. 따라서 장창곡 미륵여래삼존상은 망자(亡者)가 화랑으로 환생하기를 염원하였고 어린 화랑을 미래불인 미륵의 화신으로 여긴 신라인들의 정신세계와 제작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앉은 자세)을 취한 본존 미륵불과 입상의 좌ㆍ우 협시보살로 총3구로 구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의좌상 형식의 불상은 중국 남북조 시대(5∼6세기) 이후 크게 유행하였고 미륵불을 상징한 예가 많다. 이 불상의 경우 한국의 의좌상 불상 중 시기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서, 원만하고 자비로운 얼굴에 오른손은 손가락을 구부린 채 들고 있고 왼손은 주먹을 쥔 시무외ㆍ여원인(施無畏ㆍ與願印)의 변형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두 협시보살은 1미터 남짓의 아담한 체구에 머리에는 삼화(三花) 보관을 쓰고 각각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서 있다. 뺨이 통통한 아기와 같이 입가에 잔잔한 미소 짓고 있으며, 장식과 몸에 걸친 천의(天衣) 자락 등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이렇듯 어린아이의 몸 같은 4등신 정도의 단구형(短軀形) 신체 비례를 보이는 불·보살상은 중국 6∼7세기 북주(北周)시대부터 수대(隋代)에 걸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에 신라에서 주로 조성되었으므로 양식적 영향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경주 남산이라는 원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 점,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의좌형 미륵삼존불이자 신라인들의 신앙생활이 반영된 대표작이라는 점, 7세기 신라 전성기의 수준 높은 조각양식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한국조각사에 중요한 학술적ㆍ예술적 위상을 지닌 작품이므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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